69화
눈보라 속을 헤맨 지도 대충 1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이 정도면 슬슬 보일 법도 하건만 아직까지 신전 코빼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염병.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워낙 눈보라가 거셌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눈 뿐 이고,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방향 감각은 이미 맛이 간지 오래.
‘나침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무작정 직진하는 게 전부였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걷자.
계속 걷자.
그러면 언젠가 나오겠지.
“지구는 둥그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토록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한 쪽은 끔찍한 열기.
그 반대쪽은 끔찍한 한기.
마치 초열지옥과 한빙지옥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이쯤 되면 도대체 그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는 품안에 있던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는 거 아니지?”
“귀찮게 하지 말거라.”
“근데 너 마신이잖아. 그리고 그 몸은 인형이고. 추위를 느끼기는 해?”
“물론이다. 이 몸의 생생한 인간계 생활을 위해 모든 감각을 똑바로 구현해놓았다.”
나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신 중에서도 최상위 마신이, 고작 눈보라 따위에 추위를 느낀다? 심지어 그녀는 인형의 몸을 빌리고 있었다.
인형이 추위를 느낀다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냥 지발로 걷기가 귀찮아서 그러는 게 틀림없다.
“불경하도다. 불경해.”
“왜 그래. 우리 동업자잖아. 할 것도 없는데 이 참에 뭣 좀 물어보자. 대체 그 시온 지그하르트라는 인간은 뭐야? 애초에 인간이 맞긴 해?”
그녀가 내 품 안쪽으로 더욱 파고들며 말했다.
“인간이지. 허나 인간치고는 상당히 강했다. 그렇기에 마성도 극복하고, 신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금까지 보아온 인간들과는 많이 달랐다.”
“…얼굴은? 지금 내 얼굴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온 쪽이 100배는 잘 생겼다.”
“아니. 누가 더 잘생겼냐를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지금 이 외형도 권능으로 만들어낸 거고.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냥 내 취향대로 설정한 외형이 어떻게 시온 지그하르트와 비슷할 수 있냐는 거지. 생각해보면 그래. 지그하르트 가문을 자처한 것도, 그의 창을 얻게 된 것도, 마치 누가 전부 계획한 것처럼 너무 딱딱 들어맞잖아.”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것이냐. 나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원래 알 수 없는 것들이 투성이인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전부 알았다면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아닌 지혜와 지식의 마신으로 불리지 않았겠느냐?”
“…그, 그렇긴 하네.”
“예전에 비해 실력이 꽤나 늘긴 했으나 시온 지그하르트에 비하면 너는 개미만도 못한 수준이니라. 그리고 무엇보다 전투를 할 때 생각이 너무 많다. 많은 생각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알겠어. 근데 시온 지그하르트가 그렇게 강했어?”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초월자 중 하나였니라. 그의 창술은 싸움에 미친 그 바르바토스 또한 인정할 정도였지. 그 정도는 돼야 단신으로 악룡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용이란 놈들이 그렇게 만만한 것들이 아니거든. 특히 파프니르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살아온 놈이었기에 다른 용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봤자 이 몸에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지만.”
인형의 몸으로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자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내뱉었다.
“조그만 게 귀엽네.”
아스모데우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린아이가 바느질을 한 것이라 엉성했기에 그 모습마저도 귀여웠다.
“네놈이 아무리 나의 계약자라 하여도 감히! 마신인 이 몸에게! 귀엽다고 하는 것이냐! 불경하도다. 불경해!”
퍽. 퍽.
조그마한 손으로 내 가슴팍을 때려댔다.
문득 그녀의 본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태를 지니고 있을까.
애초에 마신이니까 정해진 형체가 없을 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외형 따위는 그저 인간으로 따지면 옷 같은 것이다.
“궁금 하느냐?”
“조금?”
“아서라. 레메게톤도 얻지 못한 네놈이 내 본 모습을 보았다가는 아마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 정도인가…….”
그렇게 한참을 아스모데우스와 수다를 떨었다.
별로 중요한 대화들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필터링 없이 얘기를 할 수 있어 나름 즐거웠다.
“찾았다….”
드디어 거대한 신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말하면 동굴 입구를 신전처럼 꾸며놓은 형태였다. 안쪽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마 이곳이 재앙의 근원이 위치한 곳인 듯 했다.
나는 불의 정령을 앞세운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는 불꽃을 잔뜩 집어 삼켜 꽤나 덩치를 키운 상태였는데, 지속적으로 한기에 노출 된 탓인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크기에 비례해서 힘도 상당히 약해진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얼음의 정령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동굴 곳곳을 방방 뛰어다녔다. 확실히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한기가 더욱 강해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느낌이다. 덩치가 커진 얼음의 정령이 주변에 한기를 빨아들이고 있어서 이 정도지.
눈보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꾸역꾸역 참고 앞으로 전진 했다. 입이 얼어붙은 탓에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아…스…모…데우스…….”
“왜 그러느냐.”
“나 이…러…다 얼…어 죽는 거 아…니…야?”
“죽으면 게헤나로 데려가주마.”
그건 싫다.
집에 가고 싶다.
동굴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다만, 한기가 너무 지독하여 빠르게 움직일 수 없을 뿐.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건…?”
동굴 끝 쪽에 위치한 푸른색 보석. 크기는 내 머리만 했다. 아무래도 저 보석이 이 지긋지긋한 한기의 근원인 듯 했다.
눈으로는 확인할 수 있어도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의 정령이 온 힘을 다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이미 눈에 띄게 작아진 상태였다.
그것을 본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빙룡(氷龍)의 심장인 듯 하구나. 느껴지는 냉기로 보았을 때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룡(古龍)인 듯 하군. 저런 게 이곳에 있으니 주변 일대가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빙룡의 심장이고, 자시고 이대로는 내가 얼어 죽을 판국이었다.
재앙의 정체는 알았지만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여기에 봉인 돼 있던 마신이 저걸 억제할 수 있었단 거 아니야? 대체 그 마신은 어디 있는데?”
“내 예상이 맞다면…….”
인형의 손가락이 밑을 가리켰다.
“이 바닥…?”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 바닥 아래 전체.”
“……엥?”
그때.
얼음의 정령이 빙룡의 심장 쪽으로 성큼성큼 뛰어갔다.
“야! 잠깐…….”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입을 크게 벌린 채 단숨에 심장을 집어삼켰다.
꿀꺽.
저 작은 체구로 어떻게 자신보다 덩치가 큰 심장을 집어삼켰는지는 둘째 치고.
주변 일대의 기후조차 바꿔버릴 한기의 근원을 과연 저렇게 삼켜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컸다.
저러다 배탈이라도 나는 게 아닌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쓸데없는 의문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동안 얼음의 정령의 몸에서는 서리로 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척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도 정령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멈춰있었다.
마치 얼음으로 된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괘, 괜찮니?”
조심스레 물었지만,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리는 없…….
“괜찮아요.”
…응?
눈앞에 푸른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앞을 바라봤다.
푸른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볐다.
여전히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있던 것은 조그마한 얼음 정령이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는 푸른색 머리칼을 지닌 어린 소녀가 있었다.
나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다, 아스모데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스모데우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거지…?”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 떨기는. 쪽팔리니 어디 가서 내 계약자라고 말하지 말 거라.”
“이게 별것도 아니라고…? 눈앞에서 정령이 소녀가 되었는데…?”
아스모데우스가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르네프의 자식이더냐?”
소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저것은 물의 정령왕인 르네프의 핏줄이다. 네놈이 생각하던 최하급 정령 따위가 아니란 말이지.”
“…정령왕? 아무리 봐도 최하급 정령이었는데?”
“정령왕의 핏줄들은 태어날 때부터 최하급 정령과 다름없는 형태를 지닌다. 스스로 성장하며 자아를 확립하고, 왕위 다툼을 하는 거지. 저 녀석은 방금 빙룡의 심장을 먹음으로서 다음 단계로 성장한 것이다. 만약 버티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소멸했을 테지. 그 중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는 정령들도 있느니라. 그리 신기해 할 것 없다. 정령왕의 핏줄은 네놈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그럼 불의 정령도……?”
“그렇겠지.”
불의 정령은 마치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눈을 빛냈다.
‘얘네가 다 정령왕의 자식들이라고…?’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령왕의 자식들은 많은 것 같았다. 성장을 하면서 왕위 다툼을 하다니 정령들의 세계도 상당히 빡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정령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거지…?’
“정령왕의 권속이 되거나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상상 이상으로 냉혹했다.
뭔가 내가 생각하던 정령의 이미지와는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됐건 재앙 중 하나를 해결했고, 거기에 얼음의 정령도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맑고 청아한 것이 마치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름을 지어주세요.”
“내가? 괜찮아?”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르네. 어때?”
“르네……. 마음에 들어요.”
소녀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자, 얼음 경정 하나가 떠오르더니 이내 내 손등에 깃들었다. 얼음 문양의 성흔이 손등에 새겨졌다.
“계약의 증표다. 네놈이 마음에 들었나보군.”
내가 르네를 바라보자, 르네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르네.”
계약의 영향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더 이상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얼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이게 웬 떡이냐!’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불덩이도 뭘 먹이면 르네처럼 진화한다는 거지?’
돌아가는 길에 불바다가 된 들판 쪽을 다시 들려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 지긋지긋한 한기가 해결된 건 좋은데……. 레메게톤은 여기에 없는 건가……?”
새로운 힘을 얻은 것은 좋지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결국 레메게톤 때문이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레메게톤을 찾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반대쪽 신전을 가야 하나…….”
그때였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내가 딛고 있던 바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중심을 잡기 위해 벽에 손을 댔다.
“뭐, 뭐야!”
그러나 떨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도 잠시. 떨림이 멈춘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을 벌려 나를 집어삼켰다.
꿀꺽.
나는 심연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