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무저갱.
말 그대로 심연이었다. 사방이 온통 어둠이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위를 봐도….
어디를 보아도 짙은 어둠 뿐.
그야 말로 암흑 그 자체.
“X발…. 뭐야, 이게….”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를 집어삼켰다.
누가 이 말을 믿어줄까.
바닥이 나를 집어삼켰어요.
이런 소리를 하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며 개소리 하지 말라고 비웃어대겠지만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몸소 겪은 사람이다.
갑자기 바닥에 집어삼켜질 줄 누가 알겠는가.
예언가도 이건 모를 것이다.
라다무스 그 영감도 절대, 절대 몰랐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스모데우스?”
【여기 있다.】
“어디…?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 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니 포기해라. 여긴 레비아탄의 뱃속이니까.】
레비아탄…….
어디서 들어봤더라. 이 이름을….
레비아탄. 레비아탄.
아….
설마….
“폭식과 우울의 마신 레비아탄…?”
레비아탄.
아스모데우스와 같이 7대 죄악을 상징하는 마신으로서 그 또한 서열의 구애를 받지 않는 최상위 마신 중 하나였다.
【그래. 몇 백 년 동안 게헤나에서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그 놈의 유충 속이다.】
“…네? 유충…이요?”
【레비아탄의 진체는 마신들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크기를 지니고 있느니라. 그렇기에 평소에는 진체를 쪼개 이렇게 유충들을 퍼트려놓아 활동하지. 그 유충이란 것들도 하나 같이 큼지막하지만…. 이 놈은 아마 분신 격의 유충인 것 같구나. 우리들로 말하면 화신체인 셈이지.】
“그럼 살몬이 봉인했다던 마신이 레비아탄이라고…?”
【그렇겠지. 그 놈이라면 한기든 열기든 뭐든 상관없이 다 먹어치웠을 테니까. 살몬에 대해 묻고 싶어도 묻지 마라. 어차피 제약 때문에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없느니라.】
“이곳에 계속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혹시 모르지. 1만년 이상 머물게 되면 소멸하게 될 지도. 허나 그렇게 긴 시간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건 모르겠구나.】
“경험이 있나 보네? 얼마 정도 있었는데?”
【대략……. 천년 정도였던가.】
“미친. 지금 당장 나가야겠어. 나가는 방법을 알려줘. 아스모데우스.”
【모른다.】
“모른다고? 그럼 그때는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는데?”
【눈을 뜨니 밖이었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레비아탄이 직접 뱉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온갖 지랄을 떨었거든.】
“그렇게 해서 걸린 시간이 천 년이라고? 그럼 천 년 동안 온갖 개지랄을 떨어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단 말이야?”
【이 몸의 경험상 그랬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자살도 소용없다. 이미 천 년 전에 내가 전부 다 해보았느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원시회귀는 발동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공간에서는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느니라. 레비아탄의 권능이 괜히 폭식이겠느냐. 이 공간 자체가 그의 권능인 셈이지.】
“…그럼 그냥 잠자코 천 년을 기다리라고? 마신인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이야. 인간의 정신으로 천 년을 버티다가는 미쳐 버릴 거라고. 천 년이 뭐야, 천 년이. 200년만 지나도 정신 나가 버릴 걸?”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느니라.】
“뭔데!?”
【레비아탄과 계약을 맺는 것이다. 그래서 권능을 직접 발휘해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것이지. 어떻느냐. 제법 괜찮은 생각이 아니더냐?】
“아이디어는 좋은데……. 레비아탄이랑 어떻게 계약을 맺는데? 애초에 말이 통하기는 해?”
【……통하긴 한다. 통하기는 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아스모데우스. 너의 힘으로도 어떻게 안 되는 거야?”
【이 인형으로는 내가 지닌 본래의 힘을 대부분 발휘할 수 없다. 허나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느냐를 묻는다면 답은 가능하다. 너와는 다르게 그냥 연결을 끊으면 되기 때문이지.】
“일단 알겠어.”
【열심히 노력해 보거라.】
어차피 이곳에 누워 있는 다고 한들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무작정 걷자.
우선은 걷기로 했다.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드넓은 공간.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걷고 있는 것인지,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위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냥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걷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아스모데우스의 얘기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곳은 레비아탄의 뱃속.
애초에 레비아탄에게 잡아먹히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스모데우스가 어떤 방법으로 빠져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월적인 힘을 지닌 마신조차도 강제로 빠져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설령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내가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폭식의 권능이라니……. 개 사기잖아….”
드렌트들이 모시던 마신의 정체가 레비아탄이었다니. 그건 그거대로 충격이다.
레비아탄 정도 되는 마신이 잠들어 있으니 한기(寒氣)와 열기(熱氣)가 지금까지 동굴을 빠져 나오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거겠지.
살몬은 이걸 노리고 레비아탄을 이곳에 봉인한 것일까.
고작 드렌트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어쩐지 석연치가 않았다.
【배-고-파-아-아-아!!!】
이 목소리는…….
레비아탄의 것인 것 같았다. 마치 고래가 우는 소리와 비슷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레비아탄의 본체는 거대한 고래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꼬리만 해도 대륙을 뒤덮을 정도라고 했으니….
얼마나 커다란지 가늠이 가지를 않았다.
【살… 몬…. 밥… 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고래 울음소리만 들리니 미칠 노릇이었다.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레비아탄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아까 보았던 눈보라와 불바다가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드렌트들은 이곳에 침입한 인간들로 인해 레비아탄이 잠에서 깨어나 그렇게 되었다고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고작 그 놈들 따위가 레비아탄의 잠을 깨울 수가 없다.
레비아탄이 화기와 냉기를 먹지 않게 된 것에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 배…고파. 불…꽃, 얼…음. 맛없어….】
보아라.
지금도 그는 연신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다. 정 배고프면 근처에 있는 불꽃이라도 쳐 먹으면 될 거 아닌가.
애꿎은 인간 말고.
폭식이라는 놈이 맛 없다고 편식이나 하고 앉아 있고.
나 같은 인간 따위 먹어봤자 저 커다란 덩치의 허기가 채워질 리가 있겠는가.
잠깐.
편식…?
“……마기.”
어쩌면 그가 원하는 것은 마기가 아닐까?
그것도 최초의 초월자이자, 모든 마신들을 다룰 수 있었던 살몬의 마기라면 저 놈이 저렇게 배고파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살몬은 그를 이곳에 묶어두는 대가로….
거대한 양의 마기를 주었고, 레비아탄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마기를 양분삼아 주변에 화기와 냉기를 집어삼켰다. 허나 지금 그 마기가 다 떨어져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다.
아무리 폭식이라지만 아무런 맛도 없는 불꽃과 얼음은 먹기 싫은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체로 불길한 생각은 잘 들어맞는 법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레메게톤이고 자시고, 그딴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내 예상보다 도 훨씬 더 심각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거 자칫하면 아카데미, 나아가 대륙 전체가 통째로 사라질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은 레비아탄이 징징거리는 것 외에는 딱히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 허기를 참지 못하고 갑자기 폭주하게 되어버린다면 폭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변 모든 것들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아카데미이다.
그리고 제국.
그 뒤에는 대륙.
…하하.
아니겠지.
【배-고-프-다-고!!!!!!!】
이번에 들린 목소리는 어찌나 커다랬는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어차피 주변이 암흑이라 보이는 것도 없었기에 인지하지 못 했지만 분명 잠깐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점차 반응이 격앙되는 것이 내가 했던 생각이 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로 소리쳤다.
“레비아타아아안!!”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 공간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한 번 힘껏 소리쳤다.
“나와 계약하자아아아아!!!!”
역시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들리지 않는 걸까…?’
어떻게 하면 레비아탄이 나에게 관심을 보일지에 대해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 백날 소리친다고 해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관심을 끌만한 얘기를 던져야 해.’
관심을 끌만한 주제가 뭐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 마신 뒤 다시 소리쳤다.
“살몬 보다 맛있는 놈이 여기 있다!!!”
이번에는 과연 반응이 올까.
나는 숨죽인 채 기다렸다.
잠시 후.
눈앞에 거대한 흑색 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처음에는 고래가 아니라 무슨 산이 나타난 줄 알았다. 레비아탄의 뱃속에 들어 와서 처음으로 보는 것이 레비아탄이었다.
고래의 입이 열리며 울음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어쩐지 슬픈 음색을 띠고 있었다.
“인…간…. 살…몬 보다 맛…있어…?”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살몬의 마기보다 더 맛있는 걸 지니고 있지. 나라면 너의 허기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레비아탄. 그러니까 나와 계약하자.”
온통 흑색으로 물든, 소름끼치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계…약…?”
“그래. 나와 계약한다면 앞으로 평생 허기지지 않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내 말에 진의여부를 파악하려는 듯 흑색 눈동자는 내게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렇다면 먼저 맛을 봐라! 그래. 이건 일종의 시식이다. 네가 직접 맛을 보고, 나와 계약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거다. 내 이름은 자일 지그하르트. 정욕과 격노의 마신인 아스모데우스의 사도이다.”
“시…식…. 아…스…모…데…우…스…의… 사…도….”
내가 이토록 자신만만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아스모데우스가 언급했던 바알의 저주.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려 지옥의 왕이라 불리는 서열 1위 마신의 저주였다.
살몬의 마기를 맛있게 먹었던 레비아탄이라면 바알의 저주에는 아예 환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상식적으로 인간의 마기가 뛰어나봤자, 모든 마신들의 왕에게 버금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알…겠…다…”
검은 고래가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나를 집어삼켰다.
“시…식…”
꿀꺽.
이로써 레비아탄에게 두 번째로 삼켜지는 것이었다.
레비아탄의 뱃속에서 레비아탄에게 또 다시 삼켜지는 기이한 경험.
부디 나를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