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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71화 (71/180)

71화

포근한 느낌.

마치 엄마 뱃속에 있었던 그 시절 그 기분을 느끼는 듯 했다.

따뜻한 양수에 둘러싸여 안심하며 지내던 그 감각.

사실 기억하고 있는 감각은 아니었다. 누가 기억할 수 있겠는가.

엄마 뱃속에서 있던 일들을.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말이.

의외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통증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통증은커녕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고통도 없고.

감각도 없고.

그저 멍하니 붕 떠 있는 기분.

“얼마나 지난 거지?”

시간 감각조차 없었기 때문에 내가 먹히고 나서 얼마나 흐른 것인지조차 알 수 가 없었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할 즈음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 공간에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

손이라고 부를 것도.

다리라고 부를 것도.

내 신체라고 칭할 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힘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떠들어대는 주체인 ‘나’라는 자아는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만큼은 똑바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모른다. 이마저도 어쩌면 나의 망상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고.

아무래도 레비아탄이「시식」을 하는 중인 듯 했다.

바알의 저주.

다른 마신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분명 바알의 기운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어째서 아벨 크로이의 몸에 이런 것이 있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레비아탄이 환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시식치고는 뭔가 너무 많이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불안했다.

내가 생각하는 ‘시식’과 레비아탄이 생각하는 ‘시식’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야! 레비아탄! 분명 맛만 보라고 했어, 맛만! 그 이상은 안 돼! 빨리 뱉어!”

꿈틀.

내 말을 들은 것인지 이번에는 공간 전체가 꿈틀거렸다.

【퉤.】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눈앞에 아까 보았던 거대한 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나오니까 어쩐지 몸이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침인가……?’

그래. 침이면 어떻고, 위액이면 어떻겠느냐.

우선은 이 고래를 구워삶는 게 우선이다.

“그래. 시식한 소감이 어때? 네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들이랑 아주 차원이 다르지?”

칠흑처럼 짙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봤다. 눈동자의 크기만 해도 이미 내 두 배는 돼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맛…있…다…. 익…숙…한… 맛….”

“뭐? 익숙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네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니야?”

“착…각…아…니…다…. 나… 이…맛… 알…고…있… 다…. 내… 가… 무… 척… 좋… 아… 하…는… 맛….”

뭐지? 이미 바알의 마기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나를 시식한 결과는 나쁘지 않다는 얘기였다.

헌데 그보다 느려터진 말투로 인해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건지, 원래부터 저렇게 말한 것인지, 컨셉충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성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빠르게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 나와 계약을 한다면 앞으로 이보다 더 맛있는 것들을 많이많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어때, 탐나지 않은가? 지금껏 맛보지 못한 것들은 전부 먹게 해주마. 약속하지.”

레비아탄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바위 같은 눈동자가 지긋이 나를 응시하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약…속…지…켜…야…돼….”

“물론이지. 나는 내가 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다.”

“약… 속… 지… 키… 지… 않…으…면 너…를… 먹…을… 거… 야… 나… 배…고…픈… 거… 싫…어….”

저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레비아탄과 계약을 맺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그래. 만약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라. 다만,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얻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이해해 주길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야. 그 전까지는 아스모데우스의 마기로 좀 참아.”

“알…겠…다….”

그때,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멋대로 남의 마기를 거래에 써먹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계약자여?】

…하하. 미안. 상황이 상황이잖아.

조금만 이해해주라. 여기서 레비아탄이랑 계약하면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잖아? 응? 따서 두배로 갚을 게. 좀 봐줘.

【하아…. 도박 중독자 같은 말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내뱉는구나. 내가 어쩌다 이런 인간을 믿고 계약을 한 것인지… 네놈의 재능은 아무리 봐도 그 혓바닥에 몰려 있는 게 틀림없구나.】

지옥의 왕.

내가 확실하게 만들어줄게.

【그래야지. 그것이 우리의 거래였으니. 약조를 어기고, 죽게 되면 아마 죽어서도 편해지지 못 할 것이다. 이미 7대 죄악 중 2 죄악의 마신이 네놈을 노리고 있으니.】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해 내야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둘 게 있느니라. 내가 지닌 마기가 무한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나, 말 그대로 가까운 것이지 무한정한 것은 아니다. 폭식이라 불리는 저 괴물 놈의 허기를 전부 충족시키기에는 그만큼 많은 양이 소모된다는 것이지. 내 힘이 불안정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 놈은 더 많은 양의 마기를 갈구하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더욱 날뛸 게 될 것이니라.】

정리하자면 아스모데우스가 지닌 마기로 레비아탄의 허기를 충족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결국엔 역시 레메게톤을 찾아 레비아탄의 허기를 충족시킬 다양한 마신들을 모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 네놈이 생각한 것처럼 저 괴물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하면 네놈 뿐만 아니라 네놈 주변에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놈이다. ‘폭식’의 근원이 ‘이지’라는 껍데기를 지니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 본능만 남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뻔한 얘기지. 겉으로는 멍청해 보인다고 해서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절대로.】

어째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타임 어택은 점점 더 빡세지는 기분이었다.

천악천을 막지 못해도 세계 멸망.

레비아탄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해도 세계 멸망.

아스모데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영혼 채로 소멸.

‘…산 넘어 산이구만.’

【네놈이 벌려놓은 일이니 네놈이 처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니라.】

‘그렇게 말하니까 마신이 아니라 꼭 깨달음을 얻은 신선 같잖아?’

【마를 다루는 것 뿐. 본질은 거기서 거기다. 우매한 자식아.】

‘쨌든 항상 신세를 많이 지네. 고마워, 아스모데우스.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거야.’

【…흥. 입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네놈은 그저 나를 게헤나의 왕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마신왕(魔神王) 바알을 뛰어넘을 유일신으로 말이다.】

게헤나의 지배자. 마신왕(魔神王).

1계위(階位). 마신(魔神) 바알.

태초(太初)의 마신(魔神)으로서 그 강함은 지옥 전체를 아우른다고 한다.

최상위 마신인 아스모데우스조차 수 백, 수 천 번의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초월적 존재.

그때, 레비아탄의 거대한 입이 뻐금뻐금 움직이며, 음울한 울음소리가 같은 것이 들려왔다.

“계…약…안…해…?”

“아, 해야지. 해야지. 잠깐만…. 근데 혹시 있잖아. 너 레메게톤이 뭔지 알아?”

“레…메…게…톤…? 먹…는…거…?”

“아니. 아니. 먹는 게 아니라 책 같은 건데…….”

전혀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 지금껏 대화를 나눠 보니 어떤 정보를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애초에 이곳에 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레메게톤의 주인인 살몬 이곳에 직접 방문했었다는 늙은 드렌트의 얘기를 들었을 때.

이번에는 무조건 있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살…몬…. 책….”

‘살몬’과 ‘책’이라는 두 단어를 들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래. 너를 이곳에 봉인해두었던 그 인간. 혹시 그 인간이 네게 맡긴 책이 있었어…?”

제발. 제발. 제발.

간절히 기도하며 레비아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대답 대신 의문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거대한 고래의 몸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렸다.

꿈틀. 꿈틀.

한참을 꿈틀거리던 레비아탄이 갑자기 되새김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가 되는 순간, 레비아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진 책 한 권이 뿜어져 나왔다.

“이, 이건…?”

분명 처음 보는 책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그 책을 본 순간, 단숨에 제목을 떠올렸다.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

…아니.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책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대체 어떤 연유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과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책에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치 기억 속 자물쇠가 해금된 것처럼.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냐?】

“찾았어…….”

【무엇을 찾… 설마…! 레메게톤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냐?】

“응. 정확히 말하면 사본이지만.”

【사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마신서 레메게톤의 사본이 존재한다는 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네놈이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더냐?】

“차라리 나도 그게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정보들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걸까.

아마 이 책을 발견하지 못 했더라면 앞으로도 영영 떠올리지 못 했을 것이라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책이 나를 부르고 있다.

어서 이리로 와 자신을 쥐고, 페이지를 넘기라고 손짓 하고 있다.

자신을 읽게 되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들을, 그토록 궁금해 하던 것들을 알 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책을 읽게 되는 순간.

내 운명은 이제 분기점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영영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격인가.”

뭘 망설이는가.

출발선에 서지 않으면 나아갈 수조차 없다. 한 걸음 발을 내딛은 자만이 끝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야 말로 마성(魔性).

거부할 수 없는 마력(魔力)을 지닌 마귀의 속삭임.

“…….”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클리셰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나도…….

이미 내 다리는 책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내 손은 벌써 책을 쥔 채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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