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페이지를 넘긴 순간,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눈앞에 보이는 검푸른색의 강. 얼마나 넓은지 누군가 바다라고 말해도 착각할 정도였다. 허나 뒤쪽으로 갈수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어둠.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망령(亡靈)으로 보이는 것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보아히니 저 강을 넘어갈 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아예 배를 타는 것을 포기한 채 강물을 핥아 먹는 이들도 존재했다.
뱃사공으로 보이는 이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굴을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늘 위에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서로 뒤엉킨 채 절규하고 있었다.
울부짖는 듯한 비명소리가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지옥.
그 이외에 달리 이곳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어쩌면 그 중간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가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 망령들을 따라 강을 건널까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왠지 모르게 저 강을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탁!
어디선가 손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환한 빛과 함께 주변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방이 흰색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
중앙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아져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식탁 위에 찻잔이 생겨났다. 안을 들여다보니 정체모를 액체가 있었다.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셔도 된다네.”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앞에는 흑단처럼 짙은 검은 장발의 신비로운 금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연령대는 대략 20대 초중반.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차를 마셨다.
꿀꺽. 꿀꺽.
“맛있네…?”
첫 부분은 달콤하고, 끝 맛은 씁쓸한 것이 의외로 내 취향이었다. 사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괜찮지?”
“네. 정말 맛있네요.”
“내가 누군지는 묻지 않을 건가?”
“살몬……. 맞습니까?”
차를 한 잔 마신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은 어디죠?”
“내 잔류사념이 만들어낸 이공간. 자격이 있는 자를 위해 준비한 공간이지.”
“자격이요…?”
“응.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야.”
최초의 초월자 살몬.
이렇게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직접 눈앞에서 본 그는 자자한 명성보다도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신을 영접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는.
“뭐, 비슷하긴 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 이세계의 인간인 네가 어째서 이 세계에 빙의하게 된 건지, 레메게톤은 무엇인지.”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말을 이어가는 살몬.
‘빙의’라는 단어에 흥분한 나는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제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댓글 한 번 잘못 달았다고 이런 일을 겪는 건 부당하…….”
살몬이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입이 닫혔다.
“미안.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지 않아. 이 공간을 만들 때의 내 마기가 얼마 남지 않았거든.”
“당신도 흑마술사였습니까?”
살몬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는냐는 듯 방긋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인류 최초의 흑마술사인걸. 레메게톤을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네가 이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은 레메게톤의 사본 중 하나인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을’ 얻었다는 얘기겠지.”
“맞습니다. 헌데 사본 중 하나라는 것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해. 나는 너희가 레메게톤이라고 부르는 마신서의 원서, ‘아르스 게티아(Ars Goetia)’를 각각 4개의 사본으로 나누어서 따로따로 보관했어.”
“그 말씀은……. 4개의 사본을 전부 모아야 온전한 ‘레메게톤’, 즉 ‘아르스 게티아’가 된다는 것입니까…?”
“똑똑하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흩어져 있는 4개의 사본을 전부 모아 ‘아르스 게티아’를 완성시켜도 결국 ■■를 얻지 못하면 반쪽 자리에 불과해. 원서와 ■■.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 비로소 레메게톤이 되는 거야.”
‘결국’과 ‘원서’, 뒷부분에 나온 단어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살몬이 미간을 찡그러트렸다.
“■■. 이런…. 대놓고 떠먹여주는 건 그들이 용납할 수 없나봐. 미안하게 됐네.”
주변에 공간들이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어째서 레메게톤을 4개로 나누신 겁니까?”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사본들이 숨겨져 있는 위치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미안. 나도 알려주고 싶지만, 이곳에 나는 다른 세 개의 사본들을 숨기기 전에 만들어진 사념이라서 알려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그 대신….”
툭.
그가 손짓하자 허공 위로 검은색 보석 같은 것이 떠올랐다.
‘마기를 응축시킨 건가…?’
잠시 후.
그 보석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자격을 갖춘 자에게 주는 선물이야. 앞으로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지식이 필요할 테니까.”
이제는 찻잔과 탁자까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신 그 단어! 그 단어에 대한 힌트라도 좀 주십시오!”
내 몸도, 살몬의 몸도 하반신부터 천천히 투명해진다.
“힌트라……. 마신서가 계약서라면, 그건 도장이야. ■■가 있어야만 비로소 자물…….”
억지로 그 단어를 꺼낸 영향 때문인지 그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허망한 얼굴로 그가 앉아있던 공간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는 이내 나 또한 형체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돌아왔나.”
다시 레비아탄의 뱃속으로 돌아온 내게 아스모데우스가 말을 건넸다.
【대체 어찌 된 것이냐.】
나는 살몬과 있었던 일들을 아스모데우스에게 들려주었다.
【허……. 간만에 놀라운 얘기를 들었군. 그럼 그 사본은 확실히 네게 된 것이냐?】
“응. 느껴져. 지금이라면 제대로 된 계약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야 한 걸음 내딛었군. 그럼 지금 당장 레비아탄과 계약을 맺도록 하거라. 저 놈 아까부터 멀뚱멀뚱 선채로 너와 계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느껴진다.
다룰 수 있는 마기의 양이 월등하게 늘어난 것이.
머릿속에 수많은 흑마술들이 저절로 그려진다. 이제는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을 발휘하여도 쉽게 지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비록 4개로 나뉜 사본 중 하나일지라도 무려 최초의 흑마술사가 남긴 유산.
그 파급력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마기(魔氣)를 다루는 것을 넘어, 마기(魔氣)를 지배하는 것 같은 감각.
인간으로서의 껍데기를 한 꺼풀 벗은 것 같은 기분이다.
거대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레비아탄이 느릿느릿 입을 움직였다.
“살…몬…의…책….”
나는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을 펼치며 마기를 끓어 올렸다.
내 마기에 공명하듯 마신서가 검은 빛을 뿜어냈다.
나는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폭식과 우울의 마신, 레비아탄(Leviathan).”
촤르르르륵!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Leviathan」이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 * *
계약을 마치고 동굴을 빠져 나온 나는 곧장 들판으로 향했다.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주변 일대의 지형이 처음 왔을 때와는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땅 곳곳이 녹아내린 게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처럼.
“…꽤나 격렬하게 싸웠나보군.”
주위를 둘러봐도 벨라 트레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조지 레프너인가 뭔가 하는 인간에게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했던 그녀였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본인 입으로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라 하였고, 애초에 그녀는 달랑 나뭇가지 하나만 들고 나를 상대했다.
그런 그녀가 고작 불 속성 좀 다루는 마법사한테 질 리가 없었다.
애초에 상성으로 봐도 그녀가 유리했다.
나는 들판을 계속 걸어갔다. 이번에도 똑같이 동굴 입구에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마신서의 사본을 얻은 덕분인지 불의 정령의 도움 없이, 마기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별 문제 없이 동굴 안쪽까지 도달 할 수 있었다.
“저건가….”
이번에도 동굴 가장 안 쪽에는 붉은 보석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불의 정령이 허겁지겁 뛰어갔다.
얼음의 정령이 진화한 것을 보며 배가 많이 아팠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둘 다 상극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서로를 견제하는 듯 했다.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내는 보석을 불의 정령이 단숨에 집어삼켰다.
꿀꺽.
뒤이어 불의 정령에 전신에서 거친 열기가 기둥의 형태로 솟아오르더니 이내 그의 모습이 변했다.
얼음의 정령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것인지 그가 나를 보며 브이를 했다. 그러더니 내 뒤편에 있던 르네를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르네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나도 계약할래, 계약!”
“그래라.”
소년이 손짓하자 작은 불씨가 내 손등에 새겨졌다.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소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도 이름! 이름 지어줘!”
잠시 고민하던 내가 이내 입을 열었다.
“불덩이.”
“……싫어!”
“장난이고. 음…. 그래, 아그니.”
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법 마음에 든 듯 했다.
“좋아!”
소년은 자기도 이름이 생겼다며, 정신 사납게 주변을 뛰어다녔다. 옆에 있던 르네가 ‘이래서 불의 정령들이란…’라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모든 용무를 끝낸 나는 드렌트들의 마을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숲 안쪽은 미로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떠올렸다.
그때도 꼬마 드렌트가 길잡이 역할로 우리와 함께 했었다. 그냥 무작정 가볼까 고민하던 찰나 숲 안쪽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혀어어어엉!”
저 멀리서 꼬마 드렌트가 밝은 얼굴로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름이…….
“우디?”
꼬마 드렌트가 웃으며 다가와 내 정강이를 콩, 하고 걷어차며 말했다.
“우드에요! 우드!”
“그래. 우드 반갑다.”
“붉은 머리 누나가 이제 곧 형이 돌아올 거라고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다. 거기에 내가 길을 헤맬 거까지 생각해서 우드를 보낸 거 보면 선생은 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이 조금 지랄 맞기는 하지만.
어찌된 게 주변에 정상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없었다.
나는 투머치토커인 우드에게 멈추지 않는 질문공세를 받으며 드렌트들의 마을로 향했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줄래, 우디?”
“우드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