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하르만 백작가의 상징인 푸른달과 붉은 검이 새겨진 망토를 펄럭이며 뢴달 하르만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 옆에는 그의 친부이자, 내가 조종하고 있는 게놈 하르만이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건강해보였다.
“하르만 백작이 병에 걸렸다더니 너무 멀쩡한데요? 그저 소문이었던 걸까요?”
“그러게요. 오히려 전성기 때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 걸요? 역시 이 바닥의 소문은 믿을 게 못되나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교계에서 새어나오는 말들의 대부분은 전부 거짓인거.”
“하하. 그렇긴 하죠. 그래도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 칩거하고 계셨던 걸로 아는데…. 어디서 좋은 영약이라도 구해 먹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차기 가주는 장남인 기레스 하르만이 아니었던가요? 어째서 차남인 뢴달 하르만이…….”
“그거야 뻔하지. 장남인 기레스 하르만의 고약한 성질머리는 여기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알지 않소? 인성이 글러 먹었으니 아무래도 가주를 맡기는 건 힘들겠다고 판단한 것이지. 게놈 저 양반이 저래 봬도 옛날에는 눈동자의 총기가 가득했다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차기 가주로 확실시 됐던 기레스 하르만이 떨어지고, 차남인 뢴달 하르만이 가주가 되었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했다.
심지어 취임식임에도 불구하고 기레스 하르만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동생이 가주가 되었으면 응원이라도 해주지 못할망정 꽁해가지고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 것을 보면 상당히 나쁜 새끼가 틀림없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바꾼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좀 이상하긴 하군. 그 망나니 성격상 분명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인데……그러고 보니 기레스 하르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구만.”
“저 같아도 안 올 겁니다. 무려 동생한테 가주 자리를 뺏…….”
말을 하던 귀족들이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구석 자리에 위치한 중년의 사내가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높은 계급의 귀족인 듯 했다. 여기 있는 귀족들이 눈빛만으로도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누구지…?’
나는 좌중들 틈에 섞여 가주를 조종하고 있었다.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봐 상당히 긴장을 한 상태였다.
계단에서 내려온 뢴달과 가주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내가 얘기 할 차례였다.
가주의 입이 열렸다.
“반갑소. 하르만 가문의 가주 게놈 하르만이라 하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취임식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이 늙은이에 마지막 자리를 빛내기 위해 찾아와준 수많은 친우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오.”
아까보다 더 커다란 박수가 쏟아졌다.
“그럼 지금부터 취임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소.”
다행히 지금부터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취임식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에 땀이 흥건했다. 속으로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지. 누가 마기를 알아채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성직자가 들이닥치면 어떡하지.
등등.
별의별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었다.
이런 내 걱정과는 별개로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뢴달이 가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가주가 그의 어깨에 검을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하르만 가문의 충실한 검이 되겠느냐.”
“네.”
“가문의 위기가 들이닥쳤을 때 가장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를 수 있겠느냐.”
“네.”
“제국을 수호하는 달이 되어 평생을 받칠 수 있겠느냐!”
“네!”
“좋다. 하르만 가문의 가주 나 게놈 하르만은 이로서 뢴달 하르만이 차기 가주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이다!”
주변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뢴달은 단상에서 내려와 식솔들이 줄지어 서있는 붉은 카펫을 걷기 시작했다.
‘후우…. 드디어 끝인가….’
그때였다.
양쪽에 서 있던 식솔들이 붉은 카펫으로 뛰어들더니 뢴달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나는 지금이라도 막아서야 하나 고민했지만 주변 모두의 반응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뢴달 조차 사뭇 진지한 얼굴로 검을 잡는 게 아닌가!
미친.
몰래 카메라인가…?
“갑자기 이게 무슨….”
너무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었는데, 옆에 있던 여인이 대답했다.
“멍청이~ 하르만 가문의 전통도 모르고 취임식에 온 거야?”
“샬럿…? 네가 어째서 여기에…?”
내게 말을 건 여인은 다름 아닌 샬럿이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베베 꼬며 나를 노려봤다.
“참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국 최고의 마도가문인 메이지 공작가의 차녀라고! 그런 내가 이곳에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녀 또한 공작가의 자제였다.
“아……. 맞다. 그럼 다른 분들은?”
“나 혼자야. 언니는 아직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으셨고, 아버지는…….”
그녀는 말을 줄였다. 아무래도 공작은 처음부터 본인이 직접 올 생각은 없던 것 같다.
그저 대외적인 관계성을 보여주기 위해 차녀인 샬럿을 보낸 거겠지.
“그런데 넌 왜 여기 있는데? 설마 너…….”
“네가 뭘 생각하든 전부 다 아니다. 우연히 뢴달 하르만과 연이 좀 닿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
“그래……? 최근에 기숙사에서도 잘 안 보이더니 그 사이 뢴달 하르만과 친분을 쌓았나 보구만?”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뭐라 말해도 전부 변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근데 가문의 전통이라는 게 혹시 저걸 말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하르만 백작가는 대대로 취임식에 마무리에는 저렇게 붉은 양탄자를 걸어가며 자신의 무위를 증명했어. 실제로 그 과정에서 죽는 가주들 또한 존재했고.”
아니. 뭔…….
상상 이상으로 막장이었다. 대체 그딴 쓰레기 같은 전통은 왜 만든 것인가.
“죽는 가주도 있었다고…? 그럼 새로운 사람이 또 가주가 돼서 저 짓거리를 해야 한다는 거야?”
“당연하지. 가문의 전통이라는 게 아카데미 교칙 같은 건 줄 알아? 가주로서 그 정도 무위도 증명할 수 없다면 당연히 죽어야지. 그게 당연한 거야.”
“…그래서 저게 언제 끝나는데?”
“저 양탄자에 끝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뢴달에 앞을 가로막는 백작가의 기사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살수 가문답게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대부분 짧은 단검이었다.
허나 뢴달은 흡사 귀신과 같은 몸놀림으로 기사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뒤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연하게도 목숨을 잃은 이들은 없었다.
부하를 아끼는 뢴달이 가문의 기사들을 함부로 죽일 리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는 전보다 실력이 더 상승한 것 같았다.
대부분이 1합. 길어야 3합 정도였다.
이제 거의 카펫에 끝자락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기사들은 그의 충실한 부하들이자,
내가 사자소생(死者蘇生)으로 되살린 푸른달의 조장급 살수들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모시는 상관이니만큼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싸울 거라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
처음에는 뢴달이 우세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가 늘고 있었다.
‘저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저렇게 죽게 되면 뢴달 또한 사자소생으로 되살려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전신에서 붉은 오러가 뿜어져 나오며.
“제 1식(式) 그믐달.”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하르만 가문의 무투기인가…!’
사사사삭!
역수로 쥐어진 검날이 허공의 궤적을 그렸다. 마치 새벽 녘 구름 사이에 가려진 그믐달을 보는 듯 했다.
기울어진 달이, 검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털썩.
그를 가로막던 마지막 기사들마저 바닥에 쓰러졌다.
저벅. 저벅.
뢴달의 몸 곳곳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양탄자는 붉은 색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위화감도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서 준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뢴달이 양탄자의 끝부분에 도착하자 양쪽에 줄지어 서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ㄹ힘차게 소리쳤다.
“하르만 백작가의 새로운 달을 뵙습니다!”
“뵙습니다!”
주변에서 함성을 내질렀다.
“이야! 뢴달 백작! 예전에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구려!”
“꺄아아아! 백작님. 전보다 더 늠름해지신 거 같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딸과…….”
“최근에 벽을 뛰어넘은 듯 하군. 이제는 기레스 하르만에 그림자가 아닌, 뢴달 하르만의 그림자가 기레스 하르만이 되겠어. 놀랍군.”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특출납니다. 거기에 저 무투기(武鬪技)…. 하르만 가문의 저런 무투기가 존재했었나요?”
“나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어쩌면 뢴달 하르만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무투기일지도 모르겠구만. 제국의 새로운 신성(晨星)이 모습을 드러냈어.”
모두가 한데모아 그의 무위를 칭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샬럿마저도 상당히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뢴달 하르만이 저 정도로 강했었나……?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저 정도로 놀랄 수준인가 싶었으나 그냥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와. 대단하다. 정말 강하네. 뢴달 하르만.”
“…비꼬는 거 같은데?”
“크흠.”
모두가 그의 무위를 칭찬하며, 온갖 축하를 건네고 있을 때 아무런 인사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존재했다.
한 명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지 대충 예상이 갔다.
회색빛의 머리칼.
룬델 공작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깔이었다.
‘사딘…. 저 놈도 이곳에 왔군.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가족인가? 테레사는 보이지 않는군.’
그때, 사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죽여 달라고 의뢰를 넣어놓은 주제에 뻔뻔하게 구는 저 태도를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났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도 그때 본인들이 했던 의뢰에 대해 항의하러 온 것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사딘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제발 내가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아무리 봐도 방향이 맞았다.
내 쪽으로 다가온 사딘이 샬럿에게 인사를 했다. 마치 일부러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반갑군. 샬럿.”
“그래. 오랜만이네. 사딘.”
“어째서 저딴 놈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지? 몰락한 변방 귀족보다는 차라리 이쪽으로…….”
그때, 샬럿이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지그하르트 가문.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 있어? 지금은 가세가 조금 기울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제국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의 일족이잖아? 그런 가문의 핏줄과 어울리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지?”
그 말을 들은 사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바라봤다.
“네놈이 이곳에 어쩐 일이지?”
“그냥 초대받아서 왔는데요?”
“네놈 따위가 하르만 백작과 연이 있다는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 군. 귀족들의 모임에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고 온 거겠지. 괜히 어슬렁거리지 말고 그만….”
그 순간.
사딘의 뒤편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딘…? 여기서 뭐하고 있니…?”
“누님?”
나는 그 여인을 본 순간, 석상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황실 기사단장이자, 용사파티의 멤버.
테레사 룬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