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녀의 등장의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테레사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 봤다.
“사딘. 친구들이니?”
사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딘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샬럿이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테레사 룬델 님이시죠!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저는 린 메이지의 여동생 샬럿 메이지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네가 린의 여동생이구나. 그래, 반갑다.”
나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고, 테레사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쪽은?”
“……자일 지그하르트입니다.”
그녀가 뚫어지게 나를 바라봤다. 내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뭐랄까 낮이 익어서.”
“…아마 착각이실 겁니다. 저는 지금껏 변방의 시골 영지에서만 생활하다 이제야 수도에 입성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나저나 지그하르트라면 내가 아는 그 지그하르트 가문이 맞지?”
“그렇습니다.”
그녀가 살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넸다.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들이었다.
용사 파티에서 나를 대하던 그녀는 언제나 냉랭했다. 인간으로서, 혹은 본인이 정해놓은 기준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친절, 최소한의 예의.
딱 그 정도만 가지고 나를 대했다.
“대단한 가문의 후계자를 뵈었네.”
허나 지금은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의 친구들이니 이처럼 살갑게 대하는 것이겠지.
알고 있다.
인간은 다앙한 형태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이 또한 그녀가 쥐고 있는 가면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나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마왕을 물리친 영웅이자, 황실의 기사단장님을 실제로 뵙게 될 줄이야…. 저야 말로 영광입니다.”
‘마왕을 물리친’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이 또 다시 굳어진 것을 확인했다.
역시 제국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전말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하……. 동료들이 고생했지. 나는 대단한 게 없어.”
“그러십니까? 혹시 마왕과의 싸움이 어땠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정말 예전부터 용사님들에 대한 얘기를 너무 좋아해서……”
내 얘기를 듣던 사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자일 지그하르트! 네놈 따위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누님에게 그런 얘기를 묻는 것이냐!”
나는 당황한 척 연기를 하며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아…… 저는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무용담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큰 결례를 저질렀다면 지금 여기서 사죄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허나 내 이런 연기는 그의 역린을 더욱 자극했는지 참지 못한 그가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내가 그 따위 연기에 속을 것 같더냐! 같잖은 낯짝 집어치워라!”
당황한 테레사가 급하게 동생을 말렸다.
“사딘! 이게 무슨 짓이니.”
“누님. 이 자식 이거 전부 연기입니다. 제가 아는….”
그때, 저 멀리서 회색빛의 머리칼을 지닌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테레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숙부님.”
사딘 또한 황급히 멱살을 놓고서 같은 행동을 취했다.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것이…….”
사딘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가 나를 바라봤다.
뱀 같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뒤이어 권위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
“자일 지그하르트입니다.”
사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네놈이 지그하르트인가.”
내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자, 옆에 있던 샬럿이 다급히 속삭였다.
-야! 고개 안 숙이고 뭐해! 룬델 공작가의 부가주 제논 룬델이잖아!
샬럿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예의에 일종이지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황실의 핏줄이면 모를까, 같은 귀족끼리고 귀족 모욕죄 이런 게 존재하나?
뭐, 고개 안 숙였다고 죽이기라도 할 거야, 뭐야.
“당돌하군.”
“……,”
“겁이 없는 건가? 지그하르트의 핏줄이라…….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기긴 하는 군.”
그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뜩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자도 단탈리온과 계약을 했겠지.’
사딘 룬델이 단탈리온의 계약자라는 건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룬델 공작가 전체가 아마 단탈리온과 관려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만 가지.”
갑자기 등을 돌린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라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분명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거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아무 일도 없이 끝이 났다.
사딘 룬델은 사내의 뒤를 따라갔고.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봐요.”
테레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인파를 헤집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옆에 있던 샬럿이 나를 째려봤다.
“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고개 한 번 숙이는 게 어려워? 아니면 뭐 룬델 공작가랑 아예 척이라도 질 셈이야? 네가 잘난 건 알겠는데 상대는 룬델 가문이야. 공작가라고 공작가! 무슨 말인지 알아? 괜히 척 지어 봤자 네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야.”
“걱정하는 거야?”
“하아? 거, 거, 거, 걱정? 내가? 너를?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냥 네 하는 행동이 워낙 이해가 안 가서 말해주는 거야.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같길래 말이야. 어쨌든 룬델 공작가랑 싸울 생각은 절대 하지 마. 이 제국에서 발붙이고 살아남고 싶다면 말이야. 그게 네 신상에 좋을 거야.”
“룬델 공작가의 부가주는 강한가?”
“제국 최강의 소드 마스터인 가주만큼이나 뛰어난 강자야. 과거에는 8서클 끝자락에 도달했다고 했는데 모르지. 지금은 어디까지 도달했을지. 무력도 무력이지만, 그 성정이 워낙 냉정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해서 다른 귀족들도 어려워하는 인물이야. 그러니까 어찌됐건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좀 융통성을 길러. 애초에 그들이랑은 엮일 생각도 하지 말고. 네가 아무리 영웅의 후예라고 해도 공작가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라. 그리고 대체 사딘 룬델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말은 저렇게 해도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제대로 느껴졌다.
이런 부분을 보면 은근히 사람을 챙기는 걸 잘하는 거 같다.
“그냥. 마음에 안 들잖아.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아서라. 아서. 건드려봤자 하나도 좋을 거 없어. 아카데미에서는 네가 더 강할지 몰라도, 제국 안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이길 수 없으니까. 사딘은 룬델 공작가의 차기 가주로 거의 확정시 된 인물이야. 친해지지는 못 하더라도 적은 되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충고 고맙군.”
확실히 룬델 공작가의 권력은 다른 귀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듯 했다.
주변의 귀족들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만 해도 확연히 보였다. 그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은 역시 같은 공작가인 메이지 가문 정도가 끝이겠지.
룬델과 메이지.
검과 마법.
제국을 대표하는 두 가문.
최강의 권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
황실을 견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잠깐만.”
“어디가게?”
“화장실 좀.”
나는 샬럿을 두고서 홀을 나와 복도 쪽으로 향했다. 테레사가 이곳으로 향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마 손님용 객실에 가서 쉴 생각인 듯 했고, 그건 나에게 기회라 판단했다.
지금부터 그녀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그녀가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방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나는 마나를 끓어 올려 소음을 차단하는 마법을 복도와 방 전체에 발동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이제 막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고 있던 테레사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너는 사딘의 친구인 지그하르트……?”
“안녕하세요.”
“그, 그래. 근데 여기는 어쩐 일로 들어온 거니?”
“이쪽으로 들어오시는 게 보여서요.”
테레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럼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들어왔다는 거니? 어째서 그런 행동을…?”
“테레사님께 드릴 얘기가 있어서요.”
그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동생의 친구이다 보니 최대한 친절하게 얘기하려는 티가 났다.
사딘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도 그러는 걸 보면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미안한데 지금 말고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내가 지금은 너무 피곤한 상태거든.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원래라면 상당한 결례야.”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맞은편에 있는 의지에 앉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꼰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대체 자기가 뭘 본 것인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휘둥그레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일 지그하르트. 너 지금 뭐하는 거지?”
슬슬 짜증이 나는 듯 했다. 당연한 얘기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동생의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인간이 멋대로 방에 들어와 꼬장을 부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일 테니.
나는 슬슬 승수를 띄우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길게 끌어봤자 좋을 건 없었다.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용사파티가 마왕을 처치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생각에는 절대 불가능하거든요?”
그녀의 태도가 180도가 바뀌었다. 싸늘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는 것이지…?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자일 지그하르트.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이 이상 지껄이지 말고 지금 이 방을 나가.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뭐 어쩌실 건데요? 죽이기라도 하게요? 하긴 지금껏 수많은 마족들을 죽여 왔으니 그런 건 어렵지 않겠죠.”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날카로운 살기.
“인간들,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내게 감히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아 그 검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드셨구나. 어이가 없네요. 정작 생명을 죽이는 것은 못하겠다고 남에게 책임이나 전가하던 인간이.”
그 말을 듣자,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그, 그게 무슨…….”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맞잖아요. 당신 자기 손으로도 마족 한 번 죽여본 적 없잖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런 적 없다!”
“왜. 내 말이 틀렸어? 황실 기사단장이란 사람이 지금까지 한 번도 살생(殺生)을 해 본 적이 없잖아. 그래서 마족이랑 싸울 때도 당신 손의 피 묻히기 싫어서 언제나 마무리는 나에게 부탁했잖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라고?”
나는 권능을 해제했다.
“그래. 나. 말이야.”
얼굴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흉터. 허나 전보다는 흉터가 줄어들어있었다.
“오랜만이야. 테레사.”
나를 본 테레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 아벨 크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