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역덕스럽게 대꾸했다.
“숨겨? 숨기긴 내가 뭘 숨긴다는 거야?”
“지금도 그렇다. 비록 탈퇴했다 하여도 용사 파티의 일원이였던 그대가 애써 살로몬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위장한 이유가 무엇이지? 자일 지그하르트라는 새로운 신분을 써가면서까지 말이다. 설마 내 동생에게 접근한 것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확실히 마왕 토벌전 이후 그녀의 상태가 많이 악화된 것 같았다.
그래도 용사 파티 중에서는 가장 정상인의 범주에 들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그렇고, 예민함이 극에 달한 것인지 감정의 변화도 종잡을 수 없었다.
지금도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 밑을 뒤덮은 다크서클이 보였다.
아마 최근 들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검집에 손을 댔다.
“대답해라.”
그 순간.
나는 살기를 끓어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검 뽑으면 너 죽어.”
진심이었다.
그녀가 여기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른 순간, 나는 그녀를 당장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다만 그녀에게 아예 악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없더라도, 적어도 이 몸의 원 주인이었던 아벨 크로이는 그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내게 검을 뽑아든 인간을 살려둘 만큼 나는 선한 인간이 아니다.
또한 그녀는 사실상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
앞으로 활용하기에 따라 이용가치야 있겠다만 나를 죽이겠다고, 검을 뽑아든다면 살려둘 이유는 없다.
이미 이 세계에 와서 수 십, 수 백의 목숨을 빼앗았고, 내 손에 묻은 핏물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살인을 망설일 만큼, 그 살인의 대상이 옛 동료라 해서 인정을 베풀 만큼,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이 무디지는 않았다.
“궁금하면 뽑아도 상관없어.”
그녀의 전신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며 또렷한 발음으로 내뱉었다.
“근데 그러면 너 무조건 죽어.”
그녀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마신서의 사본을 얻음으로서 마기가 대폭 늘었는데,
그로 인해 내가 뿜어낼 수 있는 기운도 격이 달라진 듯 했다. 나름대로 살기를 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레사 정도 되는 무인이 움츠러들 정도이니.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경이로운 발전이었다.
그녀가 검집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이해할 수가 없군. 나를 둘러 싼 모든 게 전부 거짓인 듯 하다. 그저 짐꾼인줄 알았던 칼 데미안이 상상도 못할 괴물이었고, 이제는 용사파티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보조마법사가 살기만으로 나를 압도하다니. 하하. 하하하하!”
조금만 더 선을 넘었으면 죽여서, 사역마로 만들 생각이었다.
테레사 정도의 기사라면 충분히 사용가치가 있었다.
살생을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어차피 언데드로 다시 태어난다면 내 명령에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만 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이것은 일종의 저울질이다.
지금 그녀를 살려두어서 얻게 될 이득과 그녀를 죽임으로서 얻게 될 이득을 저울질 하고 있었다.
‘이미 내 정체를 알아버렸단 말이지…. 허나 여기서 그녀를 죽이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녀를 죽인 뒤 마물로 만들어 멀쩡한 척 연기를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또한 리스크가 컸다.
그녀가 속한 가문은 룬델 공작가.
제국 최고의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 받는 귀족 가문이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내가 흑마술사라는 사실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일궈왔던 계획들은 고사하고, 앞으로 평생 이단심문관들에게 쫓기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몰랐다.
지금의 나라면 이단심문관 한 두 명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여자 같은 괴물은 가늠이 안 된다.’
이제 와서 그런 도박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확실하게 준비가 됐을 때 이빨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머릿속에서 책이 떠오르더니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수십 가지의 흑마술들이 떠올랐다.
‘이건……!’
괜히 마신서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최초의 흑마술사 살몬이 직접 만들어낸 저서답게 그 안에는 흑마술의 정수가 담겨져 있었다. 비록 원서가 아닌 사본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새로운 형태의 흑마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매번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단순히 흑마술을 알려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 그 지식들을 강제로 때려 박는 기분이었다.
진정한 주입식 교육이랄까.
살몬 그 양반에게는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건네주었던 응축된 마기의 정체가 이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좋은 선택이다. 나도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누구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충분히 대화로 해결해나갈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이지.”
“지성이라…. 내가 너와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군. 제국을 나와 마족을 상대하며 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내가 그저 우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을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내가 대답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이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면 알려주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어려울 것 없지. 아까 얘기했다시피 마왕과의 결전은 칼 데미안의 개입으로 인해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진짜 괴물은 마왕이 아닌, 칼 데미안이었거든. 웃기지 않은가? 우리가 가장 무시했던 인간이, 알고 보니 그동안 우리를 살려주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포함한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칼 데미안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신의 가호와 성검을 지닌 용사도 상대가 안 되던가? 너와 샬럿도 8서클에 도달한 기사와 마법사가 아닌가. 그럼에도 상대가 안 된다고?”
테레사의 눈동자가 푹 꺼졌다. 비릿하게 올라간 미소만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상대? 으하하하! 상대라니……. 코끼리가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을 상대라고 표현하던가?”
속으로는 경악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도의 차이라고…?”
“모르지. 나는 고작 개미였으니까. 칼 데미안이 코끼리인지, 혹은 그 이상의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따위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그 괴물 같은 인간의 손짓 한 번에 전부 죽게 될 것이었다는 것이다. 린 메이지가 지닌 공간전이 스크롤이 없었다면 모두 사이좋게 저승에 가겠지. 그 과정에서 라스는 이미 한쪽 팔을 잃었다. 성녀인 리아조차도 그의 팔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없었지. 이제 좀 실감이 나는가?”
용사 라스가 팔을 잃었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정보였다.
“진짜 마왕은 따로 있었다. 아니. 그것은 마왕도 아닌, 마신(魔神)이다.”
“마신이라…. 풉.”
“뭐가 웃기지?”
“아,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네. 그래서 어쨌든 마왕을 죽이려다가 칼 데미안에게 호되게 당했고, 린의 공간전이 스크롤로 목숨만을 부지한 채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얘기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천악천의 회복속도가 더욱 빠른 것 같았다. 천악천이 강한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육체.
그가 빙의된 용사파티의 짐꾼 칼 데미안의 몸이었다.
그가 제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육체는 본인의 것이 아니었기에 원래의 힘을 회복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천악천은 이미 내 예상을 뛰어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런 것이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마왕을 죽였다고 공표하고?”
“……그렇다. 할 말이 없군.”
정리해서 보니까 이 새끼들 그냥 트롤 집단 아니야?
“보나마나 린 메이지 그년이랑 라스 그 새끼가 하자고 했겠구만.”
테레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허나 오히려 그 침묵이 내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칼 데미안은 너희가 처리할 수도 없고, 황실에 솔직하게 보고한다고 하면 그간 너희들이 쌓아온 공적이나 이미지는 개판이 될 테니까…. 그냥 이대로 묻어버리려고 한 거지? 아주 뻔뻔하게 말이야.”
“……그래.”
“그 덕에 제국은 축제를 열고 있지. 너희들의 승전보를 기념하며 귀족이고, 천민이고, 할 거 없이 모든 백성들이 매일 같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테레사가 힘껏 주먹을 쥐며 울분을 토해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백성들은 우리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찌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하란 말인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소를 뱉었다.
“역시 변한 게 없네. 뻔뻔한 년.”
그녀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네놈이 대체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괜히 변명 하지 마. 알잖아, 너도? 지금 네가 하는 말들. 그냥 다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거. 그냥 솔직히 말해. 너희가 지금껏 쌓아왔던 재력이며, 명예며, 인망이며 그냥 그런 것들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 너희가 정말 국민들을 위했더라면 솔직하게 말했어야지. 마왕을 퇴치하지 못했다, 그보다 더 괴물이 등장했다. 이렇게 경고를 했어야지. 그 알량한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다가올 위기에 대해 경고를 하는 게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길이 아닐까?”
“아니다…. 나는 정말 그런 게 아니야….”
“정말 만에 하나, 천에 하나의 확률로 너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치자.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 결국 너는 다른 일행들의 의견에 동조했고, 그로 인해서 황실과 백성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생각하겠지. 그러다가 나중에 기습이라도 당하면? 그 피해는 누가 책임질 거지?”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야.’라고 중얼거렸지만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의 손에 죽었던 마족들이 반대로 제국의 백성들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나? 너희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정보로 인해 제국이 다가올 침입에 준비를 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면? 그때도 너희들의 잘못이 아닐 거라고 되뇌이며 자위를 할 셈인가?”
그녀는 완전히 죽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는 그저 제국을 구하기 위해…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후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내게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
“내가 칼 데미안을 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