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말없이 이든을 노려보았고, 그는 ‘아차!’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콩 찍었다.
괜한 얘기를 꺼내서 화제를 만든 것보다 저 어처구니없는 리액션을 보는 게 더 화가 났다.
벨라 트레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일 지그하르트?”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뻔뻔하게 대답했다.
“새벽에 제가 나갔다고요? 아……. 잠이 오지 않아서 잠깐 연무장에서 땀을 좀 뺐습니다.”
벨라 트레이가 사악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도 어제 새벽에 연무장에 있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던데?”
“하하…. 아무래도 시간대가 맞지 않았나 보군요.”
“새벽에 나가는 건 딱히 상관없지만 내게 허락을 맡고 나가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기숙사 밖으로 향했다.
프레이와 약속했던 축제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멤버는 나와 프레이, 샬럿, 그리고 이든.
불청객이 두 명 껴 있었지만 이제 와서 빠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를 다니면서 즐기는 건 처음이네.’
현생에서의 나는 제대로 된 축제 자체를 즐겨 본 적이 없었다.
중, 고등학교는 쥐 죽은 듯이 보냈고 대학교는 아예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글을 쓰겠다고 설쳐 됐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갈만큼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딱히 미련은 없었다.
그나마 뽑자면 청춘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 축제를 제대로 즐겨보지 못한 것 정도.
…내 인생에서의 축제는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부랄 친구들이 운영하던 주점을 몇 번 가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손에 꼽힐 정도였고.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축제를 즐기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군.’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를 고양감이 차올랐다.
1주일간의 축제.
용사 일행의 마왕토벌을 기념하여 열린 것인 만큼 제국과 아카데미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특히 살로몬 아카데미는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합쳐져 있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유급을 밥 먹듯이 하는 학교의 특성 상 다양한 나이대의 학생들이 분포되어 있었지만 제국 기준으로는 그들 대부분이 성인이다.
한 마디로 가장 사랑과 연애, 청춘에 관심이 있을 나이에 아이들이 전부 모여 있는 곳이라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기숙사를 벗어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내 시야에는 동물의 왕국을 연상케 할만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저거 하러 가자!”
“좋지. 좋지. 내가 또 마법 사격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하잖아. 마력 운용 수업에서는 A 랭크를 받았다고!”
“어머, 어머. 우리 자기 너무 멋져! 역시 우리 자기는 못 하는 게 없단 말이야!”
“하하. 그럼 그럼. 앞으로 나만 믿어. 마족이든, 흑마술사든 다 나오라고 해! 내가 지켜줄 테니까!”
처음부터 한 몸으로 태어난 것 마냥 팔짱을 낀 채 사랑을 속삭이는 수많은 학생들.
부모의 두 손을 꼬옥 잡고 신기한 얼굴로 노점상을 바라보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가족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하나 같이 행복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본 풍경들 중 가장 낯설지만…….
가장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꽤 많네.’
제국 전체에서 행해지는 축제다보니 아카데미 내부에는 일반 시민들 또한 존재했다.
원래라면 자격이 없는 시민들은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제한되지만 이처럼 규모가 큰 축제가 열리는 경우에는 특별히 아카데미를 개방하여 모두가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신기한 게 많네.’
마법이 당연시 여겨지는 세상인 만큼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형태의 놀이기구들과 음식들, 그리고 노점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는 바이킹과 비슷한 형태의 놀이기구도 존재했는데 아무래도 염동 계열 마법으로 직접 움직이는 듯 했다.
주력 마법사가 배를 조종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변에 다른 마법사들이 대기하는 방식이었다.
‘염동력을 이용한 바이킹이라니 아이디어 하나는 기가 막히는 군.’
줄지어 늘어선 노점상들을 보며 샬럿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흥! 이딴 것들이 뭐가 재미있다고 난리들이야!”
“그래요? 제법 재미있어 보이던데……. 샬럿님은 저 마법 사격 관심 없으세요? 1등하면 경품도 준대요.”
“하아? 마법 사격? 평민. 너 무슨 세 살 배기 꼬마야? 고작 저런 거에 재미를 느끼게?”
이든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형님은요? 어떠세요? 저랑 내기 한 판 하실래요?”
“음……. 굳이?”
“허어. 딱 보니까 저한테 질까봐 겁 먹으셨네. 그렇죠?”
…이 씨X놈이?
오늘 아침부터 자꾸 슬금슬금 기어오르며 성질을 긁어대는 것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 하자, 내기. 뭐 걸래?”
이든이 넘어왔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떻습니까?”
“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샬럿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그럼 나도 할래!”
“뭐야, 너 안 한다며? 갑자기 왜?”
“새, 생각이 바뀌었어! 너희 둘이 내기 할 거라며. 마법이라면 내가 너네 따위한테 질 리가 없으니까 이참에 본보기 좀 보여주려고. 한 쪽은 힘만 무식하게 센 멍청이고, 평민은 검도 마법도 어중간한 놈이니까.”
평소에 헤실헤실 웃고만 있던 이든도 샬럿의 도발에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여전히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좋습니다. 이참에 제 본 실력을 보여드리죠.”
“흥! 그래봤자지.”
“둘 다 후회하지 마라.”
우리는 마법 사격을 주력으로 삼는 노점상으로 향했다.
인상 좋게 생긴 주인장이 우릴 맞이해주었다.
머리가 발랑 까진 탓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 것을 빼고는 전체적으로 선한 분위기를 띠는 양반이었다.
“사격 하시려고?”
“네.”
프레이와 샬럿을 힐끔 바라 본 주인장이 넉살 좋게 말했다.
“여학생이 인기가 많구만. 잘생긴 남정네를 셋이나 데리고 다니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게임 설명이나 해주세요!”
평소라면 어디 하등한 평민이 말을 붙이냐고 윽박을 지르고도 남았을 테지만 나름 사람이 된 건지 그런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제발 그렇게만 자라다오.’
“허허. 성깔 있는 학생이군. 한 판에 10동화. 기회는 총 20번일세. 만발을 맞추면 저기 저 아티팩트를 주겠네.”
1등 상품이라고 적혀 있는 보관함 안에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가 놓아져 있었다.
대부분의 노점상들이 그러하듯 저건 말이 상품이지 사실상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호갱님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관상용 아이템에 불과하다는 말씀. 허나 그런 걸 알고도 즐기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이 인간들의 심리였다.
우리는 돈을 지불했다.
심판은 프레이가 맡기로 했다. 혹시 모를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룰은 간단했다.
각자 앞에 놓아진 사격용 권총에 마력을 주입하여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게 끝.
다만 표적을 맞추면 맞출수록 표적이 움직이는 속도가 증가하는 형태인 듯 했다.
“내가 먼저 할게. 다들 불만 없지?”
“그럼요.”
“마음대로.”
첫 번째 타자는 살럿.
비교적 키가 작은 그녀였기에 그녀를 배려한 주인장이 발판을 놓아주었다.
발판 위에 올라 선 샬럿이 권총을 쥔 채 한 쪽 눈을 감았다.
탕!
첫 발은 가볍게 표적에 명중했다.
“호오. 처음부터 맞추는 이들은 흔치 않은데 아가씨가 실력이 대단하구만.”
샬럿이 한층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말했다.
“흥! 이까짓 거 별 거 아니지.”
탕! 탕! 탕!
연달아 세 발을 갈기는 샬럿.
이번에도 모두 명중이었다.
확실히 마나를 운용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격용 권총에 마나를 주입해 정밀한 사격을 하는 것은 고도의 마나 운용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살짝이라도 마나를 많이 주입하거나 혹은 적게 주입하면 사출되는 마력탄이 일정하지 않기에 대부분 실수를 하기 마련.
극도로 미세한 컨트롤을 할 줄 알아야 연발 사격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탕!
이번에는 표적에 빗나갔다. 속도가 달라진 것도 있지만 정작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녀가 쥐고 있던 권총이 과열된 것이다.
일부러 적정량 이상의 마나를 주입하면 총이 과열되게 설계가 된 것 같았다.
‘처음부터 최소한의 마력만을 이용하여 운용해야 하는 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과열된 총에 맞게 마나를 주입해 사격을 해야 했다.
탕! 탕! 탕!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사격은 점점 더 빗나가기 시작했다.
권총에서 쏘아져 나간 마력탄이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모든 사격이 끝났다.
결과는 20발 중 총 13발.
나름대로 준수한 성적이라 볼 수 있었다. 허나 그녀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인장을 노려봤다.
“아저씨! 장난해? 내가 13발 밖에 못 맞출 리가 없잖아! 이 총 불량이지? 감히 나를 상대로 사기 치려는 거야?”
허나 주인장 또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상인.
고작 이런 진상 손님에게 휘둘릴 만큼 유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허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장사 인생 20년. 나 란돌프는 단 한 번도 손님을 상대로 사기를 친 적이 없소. 라파엘 신에게 맹세하지!”
신에게 맹세까지 한다는 말에 샬럿이 당황했다.
“그, 그럼 내가 이상하다는 말이야? 분명 총이 제어가 안 됐다고!”
“하하. 아가씨께서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그 총은 원래 그렇게 설계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준치 이상의 마력이 주입이 되면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해 스스로 출력을 조절하는 그야 말로 마도 공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물건이지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을 하지만 결국 손쉽게 상품을 내주고 싶지 않아서 술수를 부리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0발 중 13발을 맞춘 것도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셈이오. 내가 20년 간 이 짓을 하며 먹고 살았지만 20발 중 10발 이상을 맞춘 사람은 백 명도 채 되지 않았소.”
그 말을 들은 샬럿이 씨익씨익 거리며 발판에서 내려왔다.
“평민! 네 차례야!”
이든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향했다.
“이야. 우리 S 클래스의 자랑인 샬럿님도 고전할 정도면 이거 꽤나 어려운가 보군요? 저 따위는 10발도 제대로 못 맞출 거 같은데요.”
“닥치고 쏘기나 해!”
“예예.”
권총을 쥔 이든이 자세를 잡았다.
탕!
탕! 탕! 탕!
“―!”
주변에서 그걸 지켜보던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5발을 연달아 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표적에 정확히 맞은 것이다.
지나가던 학생들마저 뒤에서 이든의 사격을 구경할 정도였다.
잠깐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사격을 시작하는 이든.
탕! 탕! 탕!
계속해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샬럿과는 다르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속해서 총을 쌌다.
순식간에 사격이 끝났다.
결과는 20발 중 19발.
“…….”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야. 좀 치는데?”
“자기야! 우리도 저거 하자! 재밌겠는데? 자기도 저렇게 쏠 수 있어?”
“물론이지. 저 정도는 껌이야. 내가 왕년에 마법 사격술 A랭크였다고!”
“어머, 어머. 역시 우리 자기 멋져!”
주인장마저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대, 대단하군! 과거에 따로 사격술을 익힌 것인가? 내 20년 간 장사를 하며 19발을 맞춘 이는 지금까지 딱 두 명 봤네! 이제 자네까지 포함하면 3명이지! 정말 훌륭해!”
“하하, 감사합니다.”
이든은 아쉽다는 듯 자리에서 내려왔고, 샬럿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음 차례는 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자리로 향했다.
프레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입모양으로 힘내라고 응원해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은근 긴장되는군.’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이내 권총을 쥐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
한 쪽 눈을 감은 뒤, 표적지를 확인했다.
잠시 후.
격발음과 함께 마력탄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