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노인 또한 나를 알아본 듯 터번을 벗었다.
“…자일 지그하르트? 그대요?”
“진짜 라다무스 영감님이에요?”
프레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멀뚱 서 있었고,
옆에 있던 소년은 라다무스를 향해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스승님…? 아시는 분이에요…?”
“알다마다. 이 분이 내가 말했던 은인이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
“헤에!? 스승님이 본 미래를 바꾸고, 그 괴물을 쓰러트렸다는 그 분이요!? 대박!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스승님의 얘기를 듣고 꼭 만나보고…….”
나는 다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프레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래…? 괴물…? 그게 다 무슨 소리인가요, 자일? 혹시 저 노인 분과 만나신 적이 있나요?”
나는 라다무스에게 눈빛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
눈치 없는 제자 놈과 다르게 연륜이 묻어나는 라다무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하. 과거에 내가 한 번 그를 만난 적이 있었네. 그때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여기 있는 이 청년이 그 얘기가 별로라고 바꿔 준 적이 있었어. 아마 내 제자 놈은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
“읍읍!”
“맞아요, 자일?”
“그, 그렇죠. 제가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요. 하하.”
“하하하하하! 그렇지! 하하하하!”
그렇게 나와 라다무스가 한바탕 웃어넘기자 프레이도 딱히 더 추궁하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인가?”
“어쩐 일이긴요. 점 보러 왔죠. 여기 이 꼬마가 아주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해서 왔더니……. 뭡니까, 이건?”
라다무스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큼큼. 부업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숲에서 살지 않는가? 이 금쪽같은 제자 놈을 먹여 살려야 하니 돈이 많이 필요하단 말이지.”
“현자라 불리는 분이 여기서 점을 보시다니….”
“일종의 재능기부라고 할 수 있지! 으하하하하!”
“그래요. 뭐 어디든 돈은 필요한 법이죠. 그럼 이왕 온 김에 점이나 좀 봐주시죠. 돈은 드리겠습니다.”
라다무스가 미소를 지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나?”
“저희 사이에 정말 이러기입니까?”
“나도 먹고 살아야지 않는가.”
“저기 저 꼬마가 50프로 할인해준다고 하던데요?”
라다무스가 꼬마를 노려보았다. 눈도 보이지 않는 양반이 이럴 때보면 아주 귀신 같단 말이지.
“스, 스승님이 사람들 데려오라고 했잖아요! 자리를 이런 데 잡으니까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큼큼. 그래 알았다. 자일. 옆에 있는 처자까지 해서 1골드만 주게나.”
프레이가 놀란 듯 물었다.
“저 아이도 그렇고, 제가 여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신 거죠?”
“보다시피 나는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네. 때로는 그것이 독이 되기도 하지만.”
“……저에 대한 얘기는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손님들에 비밀은 철저히 함구하는 게 점성술사의 원칙이라네.”
“감사합니다.”
나와 프레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쪽 처자부터 보겠는가?”
“네.”
프레이가 금화 한 개를 건네자 소년이 냉큼 낚아채갔다.
“감사합니다.”
라다무스가 천이 덮어진 탁자 위에 타로 카드 같은 것들을 흩뿌렸다.
그걸 본 내가 어이가 없어 물었다.
“영감님. 점성술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점성술은 별자리로 보는 게 보는 게 아닌가요? 이건 아무리 봐도 타로카드 같은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타로카드는 점성술의 기본이네. 별자리의 흐름을 읽고 이 카드를 통해 미래의 편린을 보여주는 것이지.”
어찌 하는 말들이 하나 같이 사기꾼 같았다. 그래도 그의 능력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기로 했다.
“자, 이 중에 마음에 드는 카드 세 장을 뽑게나.”
“어…? 아무거나 뽑아도 되나요?”
라다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프레이가 이내 세 개의 카드를 뽑았다.
“뒤집어 보게나.”
첫 번째 카드를 뒤집자 검을 쥔 기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옆에는 수많은 검들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무엇이 그려져 있지?”
“검을 쥐고 있는 기사가 있네요.”
“흐음. 다음 카드는?”
프레이가 두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이번에는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앞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이 놓아져 있었다.
“무릎을 꿇은 기사. 그 앞에 황금빛 검이 놓아져 있어요.”
“마지막 카드를 뒤집어 보게나.”
그녀가 마지막 카드를 뒤집었다.
낫을 든 사신과 바닥에 부러진 검.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지?”
“거대한 낫을 쥔 악마…? 그리고 바닥에는 부러진 검이 놓아져 있어요.”
골똘히 고민하던 라다무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대는 혹시 검을 다루는가?”
프레이가 놀란 듯 대답했다.
“네. 어찌 아셨나요?”
“기사로서의 재능이 출중한 듯 하군. 허나 주변에서 쉽게 놓아주지를 않아. 끈질기게 붙잡고, 자네를 옭아맬 걸세. 허나 모든 시련과 고난은 더욱 더 그대를 성장시키는 양분이 될 걸세. 끊임없이 노력하고, 노력하다보면 그대가 원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야.”
프레이가 기쁜 듯 되물었다.
“…저, 정말인가요?”
라다무스 대신 옆에 있던 소년이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누나! 저희 스승님이 사기꾼처럼 보여도 점성술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거든요.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믿어도 돼요!”
“고마워…….”
지금의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힘이 되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라다무스가 다시 카드를 섞은 뒤, 탁자 위에 흩뿌렸다. 나는 대충 카드 세 장을 빠르게 골랐다.
“다 뒤집으면 되는 거죠?”
“…그렇다네.”
나는 카드 세 장을 동시에 뒤집었다.
허나 셋 모두가 같은 그림이었다.
아까 프레이의 카드에서 보았던 낫을 든 사신. 부러진 검은 없었지만, 사신은 똑같았다.
그걸 본 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스승님… 이건…?”
“왜요. 안 좋은 겁니까?”
라다무스가 침음하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뽑아보게.”
그가 다시 카드를 섞기 시작했고, 나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곧장 카드를 뽑았다.
결과는.
“또 같은 카드인데요?”
“다시.”
세 번째.
“다시.”
네 번째.
“다시 해보게나.”
다섯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똑같은 카드였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라다무스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듯 했다.
“흐음…….”
5분이 지나도 그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또 뭘 본 거야…. 이 영감탱이가.’
그가 이토록 입을 열지 않자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대.”
“저요?”
“미안한데 잠시 나가줄 수 있겠는가. 여기 이 청년과 긴히 나눌 얘기가 있네.”
“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라다무스가 제자를 향해 말했다.
“피노.”
“네. 스승님.”
“차단 마법을 사용하거라.”
소년이 짧게 영창을 외운 뒤 마력을 일으키자 주변 일대의 소리가 사라졌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소음 차단 마법까지 사용한 걸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듣게.”
“네.”
“방금 나갔던 여인이 있지 않은가.”
“네.”
“그 여인은 훗날 대륙을 대표하는 기사가 될 걸세. 충분히 그럴 만한 재능과 자질을 지니고 있어.”
그건 이미 나도 알고 있다.
“허나 곧 죽을 걸세.”
“……네?”
망치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에 뽑아 들었던 카드. 거기에 낫을 든 사신과 부러진 검이 있었다 했지?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네. 부러진 검은 저 여인인 셈이지.”
“대체 그게 무슨…!”
“우선 진정하고 내 말을 먼저 듣게나.”
“…네.”
그의 말을 듣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내 점성술은 내가 지닌 이 저주 받은 능력에서 기인된 걸세. 그렇기에 대부분 틀린 적이 없었지. 앞선 두 개의 카드는 그녀가 지닌 자질이 충분히 뛰어나고, 수많은 시련이 닥칠 걸 의미했다네. 그러나 마지막 카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 하나는 그녀가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다는 것.”
“…….”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네. 사실 부러진 검만 나왔다면 전자가 맞겠지만 사신… 그 카드는 확실한 죽음을 뜻하네. 죽음의 신이 이미 그녀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의미하지.”
잠깐.
그럼 내가 뽑은 카드는…….
“이미 눈치 챘겠지만 자네 또한 마찬가지네. 자네는 무려 다섯 번 연속으로 같은 카드를 뽑았어.”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이미 한 번 그와 같이 생사를 함께한 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의 죽음은 확정이네.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죽게 될 것이야. 이건 운명일세.”
“……하하.”
“미안하네.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나도…….”
“정말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습니까?
라다무스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지금껏 저 카드를 뽑은 이들은 전부 죽었다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내가 지닌 저주는 불행만큼은 확실하게 점지했지. 이 망할 저주가…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예언했다네… 내 가족들조차도 예외는 아니었지…….”
어쩐지 다섯 개 연속으로 똑같은 카드가 나오는 게 말이 안 된다 했더니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쇼. 정말 영감님이 점지한 미래에서 벗어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습니까?”
“지금까지는…….”
그 순간 라다무스가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있었군…. 그래 있었어. 자네가 있었군.”
그제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는 내가 본 미래를 바꾼 유일한 인간이었지……. 어쩌면… 그래, 자네라면 이번에도 내가 본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더 이상 들을 애기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말했다.
“이번에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운명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불안했다.
…나보다는 프레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이.
“미안하네. 이런 소식을 전해주어서. 내 돈은 받지 않겠네.”
“괜찮습니다. 그 돈은 액뗌한 비용이라고 치죠.”
“액뗌? 그게 무엇인가….”
“있습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한 마법의 단어가. 그럼 다음에 뵙죠, 영감님.”
“…그래. 조심히 들어가게나.”
나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천막을 빠져 나왔다.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점을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
천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레이가 내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나는 옅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영감님이 사기꾼이라는 얘기를 하다가 서로 얼굴만 붉히고 왔습니다.”
“푸흡. 어차피 재미로 보는 거 왜 그리 화를 내셨습니까.”
“돈 값은 해야죠. 얼른 가죠. 샬럿과 이든이 저희를 찾고 있을 겁니다.”
“아, 그러겠네요.”
나와 프레이는 왔던 길을 지나 다시 대로변으로 향했다.
어느덧 오후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오히려 낮보다도 더욱 많아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걷다가는 오히려 샬럿 일행과 엇갈릴 거 같아 일단은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프레이는 아까 라다무스에게 들은 얘기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는지 한껏 들뜬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틈에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프레이 말고도 후루탕을 먹는 사람이 있네….’
길가에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후루탕을 먹는 백발의 여인. 특이하게도 십자가가 그려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기사인가?’
잠깐…. 망토……?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조각.
-주신의 이름으로 지금부터 집행을 시작한다.
…십자가가 그려진 푸른색 망토.
그것은 청십자회(靑十字會)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제야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청십자회 주교 크리스 발렌타인……!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 뒤 곁눈질로 그녀를 살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나를 보고 멈췄다.
나는 속으로 제발 못 알아보기를 기도했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허나 내 간절한 기도와는 달리 그녀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