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라다무스가 말한 죽음이 설마 이건가…!’
심장이 빠르게 뛰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청십자회가 대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그녀 외에도 십자가가 새겨진 망토를 두른 기사들 몇몇이 보였다.
아무래도 축제인지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단심문관들이 호위를 서고 있는 듯 했다.
‘근데 왜 하필 저 괴물이야!’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가 뻗은 검날이 이블의 전신을 산산조각 내버리던 그 광경이.
‘침착하자. 침착해.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래. 이렇게 티를 내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것이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없…….
‘마신의 사도…. 마신숭배자들의 교주….’
지는 않은 것 같다.
“자일.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색이 안 좋습니다만?”
이 와중에 그녀는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프레이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내 앞에 선 크리스 발렌타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네?”
두근. 두근.
“마법 사격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아십니까?”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녀의 시선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이 찰랑였다.
‘뭐지…? 정말 길을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다행히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격이 다르다고 평가 받는 청십자회의 주교를 눈앞에 두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나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블 사건과 내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면 곤란해지는 건 내 쪽이다.
‘이사장도 나에게 경고 했었지…. 축제 기간 동안은 좀 사려야겠다.’
최근 제국 내에 마신 숭배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하니 경계가 삼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축제와 같이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니까.
“어! 저기 샬럿과 이든이 오고 있네요!”
프레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샬럿과 이든이 지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평민 너 달리기가 이렇게 빨랐어?”
“샬럿님이야 말로 육체 단련은 아예 하지 않은 거 아니셨습니까?”
대체 어디까지 갔다 온 건지 둘은 녹초가 되어있었다.
‘아카데미라도 한 바퀴 돌고 온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샬럿. 대체 어디까지 갔다 오신 겁니까?”
“글쎄! 이 평민 놈이 바람 계열 마법까지 쓰면서 도망가는 거 있지? 진짜 어이가 없어 가지고 아카데미 한 바퀴는 돌고 온 것 같다니까!”
“살기 위해서 뭔들 뭣하겠습니까! 여러분도 저를 쫓아오는 샬럿님의 눈빛을 보셨어야 합니다. 진짜 잡히면 죽일 기세였다니까요?”
“…잘 아네.”
“진짜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서로 티격태격해도 은근히 죽이 잘 맞는 듀오였다.
“그래. 땀도 빼고 왔겠다. 이제 슬슬 내기의 결과를 이행해야지?”
둘 다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먼저 이든.”
“네. 넵!”
“오늘 아침부터 잘도 날 골려대더라?”
“하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건 형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겠죠?”
“아니. 모르겠는데?”
“…….”
“너는 오늘 하루 동안 말끝마다 죄송합니다를 붙여라. 이게 내 소원이다.”
이든이 그거면 되겠냐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죄송합니다. 붙여야지.”
“아…. 죄송합니다.”
“한 번이라도 안하면 하루씩 추가다. 소원이니까 불만없지?”
“네….”
“하루 추가.”
“아! 죄송합니다.”
나는 흡족한 얼굴로 샬럿을 바라봤다.
“샬럿.”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왜, 왜!”
“너는…….”
“대체 뭘 시키려고!”
“이제부터 말끝마다 냥을 붙여라. 너도 이든과 똑같이 한 번 실수할 때마다 하루씩 추가야. 내기는 내기니까 지켜야겠지?”
그 말을 들은 샬럿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그딴 건 어떻게 해!”
“하루 추가. 약속은 약속이야, 샬럿. 명색이 제국 최고의 마도명가의 자제가 자신이 내뱉은 말도 지키지 않을 텐가?”
내가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소리쳤다.
“그, 그치만…….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니야! 하겠다고!”
“방금도 안 했다. 이틀 추가.”
우물쭈물하던 샬럿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씨……. 알았다…냥.”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풉.”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 그저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뿐. 옆을 바라보니 프레이도 고개를 돌린 채 안간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악!”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는 샬럿.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머리칼보다도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샬럿?”
“왜 부르……. 으아아아악! 못해! 못하겠다고! 대체 왜 이딴 짓거리를 시키는 거야!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돈은 필요 없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그저 네가 수치스러워 하는 모습이니까. 아, 그리고 방금도 안 했으니 삼일 추가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든 샬럿이 씩씩 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두고 봐…. 진짜 가만 안 둘거…냥.”
“꼬우면 이기든가.”
결국 참다못한 이든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이거 아주 장관이군요.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신 겁니까? 역시 형님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샬럿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민…. 그 입 한 번만 더 열면 죽여버린다…냥.”
“아, 알겠습…. 푸흡. 죄송합니다.”
“이드으으은!!!!”
샬럿의 전신에서 붉은 마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이담심문관이 주위에 있다는 걸 확인한 상황에서 괜한 주목을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진정해 샬럿. 그렇게 분하면 내기 한 번 더 할래? 네가 원하는 종목으로?”
샬럿이 고개를 휙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눈빛이었다.
“좋아! 내가 이기면 이 거지 같은 소원은 취소하는 거다…냥?”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뭐 할 건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샬럿이 한 노점상을 가리켰다.
“저거!”
“펀치 기계…? 저걸로 하겠다고…?”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번화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펀치기계와 축구기계, 그리고 망치로 내리쳐 점수를 환산하는 기계가 차례로 세워져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내가 하자고 한 건 저 망치야! 펀치 기계는 당연히 내가 불리하지. 너는 강화마법 사용자잖아 …냥!”
이든이 물었다.
“저 망치는 뭐가 좀 다릅니까? 옆에 있는 것들과 비교해도 별 반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결국 힘이 센 사람이 유리한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멍청한 평민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저 망치는 오로지 마력으로만 작동한다는 말씀! 그러니까 무작정 힘으로만 내려친다고 점수가 높게 나오지 않는 단 거야…냥!”
“호오! 그거 신기하군요. 하지만 저는 이번에 기권하겠습니다. 힘이나 마력은 두 분을 당해낼 엄두가 나지 않네요. 하하. 죄송합니다.”
프레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프레이가요?”
“프레이 너도 하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들이 내기하며 놀았던 모습들이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네! 재밌을 거 같네요. 기사인 저도 참가해도 될까요?”
“음……. 어차피 마력을 주입하면 되는 거라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마법사인 우리들에 비해 불리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아, 이왕이면 그 옆에 있는 것들도 한 번씩 해보고 싶군요.”
“그래. 간 김에 그것도 같이 해보자냥.”
다음 목적지를 정한 우리는 곧장 이동했다. 노점상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
접근하기 쉬워 사람들이 꽤 많이 몰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다른 노점상들에 비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쾅!
2m가 족히 넘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가 펀치 기계를 후려쳤다.
띠리리링!
빠르게 올라가는 점수.
9260점.
랭킹 1등.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사내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컨디션이 별로군.”
프레이가 다가가 물었다.
“끝나셨으면 제가 해도 될까요?”
프레이를 바라보던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하하.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괜히 무리 하지 말고 쉬는 게 어때?”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조심하라고. 생각보다 단단하니까 말이야. 힘 조절 못했다가 팔이라도 부러지면 골치 아프잖아? 크하하하!”
“조언 감사합니다.”
펀치 기계 앞에 선 프레이가 팔을 빙빙 돌리더니 이내 준비동작도 없이 곧장 기계를 후려 갈겼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
띠리리리리링!
쉴 새 없이 올라가던 점수가 어느덧 9000점을 돌파했다.
“살짝 약했나?”
결과는 9998점.
당연 1등이었다.
거구의 사내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자, 자네…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프레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카데미 학생입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축구 기계로 향했다.
쾅!
원래라면 먼발치에서부터 달려와 그 힘을 이용해 차는 게 국룰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그대로 후려 찼다.
이번에도 쉴 새 없이 오르는 점수판.
9999점.
단연 1등이었다.
펀치기계 앞에서 힐끔거리고 있던 거구의 사내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이거 재미있네요?”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생긴 건 현생에서 보았던 기계들과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곳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능들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당연하게도 저 기계들 또한 특수한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을 터….
“수, 수련을 열심히 했나 보네요. 프레이.”
지가 찬 것도 아닌데 샬럿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프레이야!”
그러더니 실수를 깨달았는지 나를 보며 흠칫 놀랐다.
‘…한 번은 봐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해머.
사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망치를 들고 원통 모양의 패드를 내려치는 게 끝.
그런데 기계 옆에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꽤나 익숙했다.
“교수님…? 그리고 조교님…?
나를 알아본 무명이 반갑게 인사했다.
“자일 군! 다른 학생들도 여기 계셨군요. 축제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네…. 조교님과 교수님은 여기에 어쩐 일로?”
대답을 한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특유의 나른한 얼굴로 귀찮다는 듯 말했다.
“보다시피 당직이다. 축제 기간 동안 교직원들이 번갈아가며 당직을 서기로 했지.”
그리고는 입이 찢어지랴 하품을 했다.
“할 거면 빨리 해라. 너희를 끝으로 문 닫을 거다.”
“여기 교수님이 관리하시는 거에요…?”
“임시로 배정 받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도 교직원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이 일대는 전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마무리하면 또 순찰을 가야 해요….”
말을 마친 요한이 하늘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푸른색 구체 수 십 개가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저걸로 이 주변 전체를 다 감시하고 있는 건가?’
“프레이 군….”
“네, 넷!”
“그대가 먼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프레이가 두 손으로 망치를 쥐었다.
“너무 힘을 줄 필요 없습니다…. 신체가 아닌 망치에 마나를 주입한다는 감각을 먼저 일깨워보세요….”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금빛 마력이 망치를 향해 이동했다.
“좋습니다…. 그 감각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오러를 발현한다는 느낌으로… 망치에 마력을 쏟아 부으세요….”
나른한 어조와 다르게 요한은 제대로 된 코치를 해주고 있었다.
프레이가 쥐고 있던 망치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광채.
이윽고 프레이가 망치를 휘둘렀다.
―쾅!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순간적으로 주변 일대가 흔들렸다.
띠리리리리링!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점수.
허나 뭔가 이상했다.
주변에서도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다들 한 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이, 이거 왜이래? 숫자가 안 멈추는데…?”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데… 기계 고장 난 거 아니야?”
이쯤 되면 멈출 법도 했는데 점수는 여전히 올라가고 있었다.
최고 점수는 9999점.
그러나 이미 한참 전에 넘은지 오래였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링!!!!!!!!!!!
기계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정도로 빨라졌다.
잠시 후.
펑, 소리와 함께 기계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본 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퇴근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