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제국 서부에 위치한 해롤드 산맥의 중턱.
워낙 험한 산세와 마물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에 인간들의 발길이 끊긴 이곳에 고통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으으으아아악!!!!”
“괴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연합이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서걱!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은 사내의 머리통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내뱉은 한 마디가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발에 걸린 머리통을 귀찮다는 듯 걷어 찬 사내가 앞에 놓인 제단을 바라봤다.
“어떠한 의식이라도 치른 것인가.”
제단 위에는 인신공양에 쓰인 인간들의 시체와 각종 제사 도구들이 놓아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핏물로 새겨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수 백 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깔끔한 절단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시체의 바다.
시체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사내는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길을 걷는 도중에 눈에 밟혔기에 치웠을 뿐.
그들이 여기서 악마소환 의식을 하든, 인신공양을 하든 그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죽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우연히 산을 오르던 사내의 손에 마신숭배자들의 교단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사내의 손짓 한 번에 마신의 선택을 받은 사도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보았으니 그들이 느낀 공포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진득한 피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냄새를 맡은 마물들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내의 주변에 수 십 마리의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침을 질질 흘리며, 살기 어린 안광을 번뜩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살기 위해서 줄행량을 치거나 혹은 절망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터지만 사내는 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마물들을 바라볼 뿐.
“기이하게 생긴 놈들이로군.”
그것이 마물들을 마주친 그의 감상이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생김새를 지닌 마물들을 보았기에 신기하다.
그게 전부였다.
“크아아악!!!!”
“끼에에에에엑!!!”
마물들이 일제히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명이 자자한 만큼 마물들의 종류 또한 다양하였는데 팔이 여러 개 달린 원숭이처럼 생긴 것들이 있는 가 하면 머리는 뱀, 하반신은 말의 모양을 한 괴기스러운 생명체도 존재했다.
사내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화려한 기교 따위 없이 깔끔한 동작.
무어라 명칭 할 것도 없는 단순한 횡 베기였다.
촤자자자자작!!!
허공에 새겨진 선을 따라 마물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잘려나갔다. 덩달아 주변에 있던 거목들 또한 힘없이 쓰러졌다.
일검(一劍).
단 한 번,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산맥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마물들이 고깃덩어리로 전략했다.
충격적인 광경에도 사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지루하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은 채 다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사내가 향하는 곳은 근처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본래 어떠한 용무가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사내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기운이 은은하게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동굴 내부는 훨씬 더 넓었다. 안쪽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더욱 더 짙어지는 강렬한 기운.
그것을 느낀 사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영물(靈物)이라도 살고 있는 것인가.”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벼락이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동굴 전체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뒤이어 울려 퍼지는 웅혼한 음성.
【──감히 누가 내 잠을 깨운 것이냐!】
마력이 깃든 목소리는 동굴 전체를 진동시킬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어갔다.
곧이어 사내의 눈앞에 거대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전신은 온갖 종류의 암석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마치 작은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지룡(地龍). 아게시오.
헤롤드 산맥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커다란 도마뱀이로구나.”
사내의 감상평은 그게 전부였다.
지룡 아게시오는 얼빠진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인간……? 고작 인간 따위가 내 잠을 깨운 것이냐……?】
용이란 존재는 오랜 세월을 사는 만큼 많은 시간을 잠에 할애한다.
그런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잠에서 깨우는 것이다. 물론, 웬만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날 리 없었다.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한 그들의 레어에 겁도 없이 들이닥칠 미친놈은 없었으니까.
헌데 그런 그를 깨울 만큼 흉흉한 기운에 눈을 떴더니 웬 좁쌀만한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비유를 하자면 코끼리가 잠을 자는데 개미가 깨운 격이다.
【작위를 지닌 악마도, 마신의 화신체도 아닌 고작 인간이라고……?】
마신의 화신체는 아니었으나 얼추 비슷했다.
그는 바알을 제외한 지옥의 최강자 중 한 명이라 불리는 투쟁(鬪爭)의 마신,「바르바토스」의 사도였으니까.
물론. 그가 원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를 마음에 들어한 바르바토스가 일방적으로 사도의 자리를 내어준 것 뿐.
“이쪽 세계에 것들은 하나 같이 신기하게 생겼군.”
아게시오는 대체 저 인간이 무엇을 믿고, 자신 앞에 저리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경험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날고 긴다 하는 인간 놈들이 용살자(龍殺者)가 되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그를 찾아온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가 그의 거대한 기운에 압도되어 목숨을 구걸하기 일쑤였다.
본래는 감히 찾아올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하등한 인간들이 겁도 없이 용들을 찾아오게 된 것은 악룡 파프니르 때문이었다.
시온 지그하르트가 그를 토벌했기에 본인들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허나 정작 용들은 그를 동족의 수치로 여겼다.
그런 머저리 같은 놈 하나 때문에 인간들이 자신들을 만만히 여기다니 용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기가 찰 노릇.
【──같잖아서 죽일 마음도 들지 않는 군. 하등한 인간이여.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 터이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도록 하여라. 본래라면 네놈의 몸을 잘근잘근 씹어 삼켜도 부족할 터이지만 오늘 한 번은 변덕을 부리도록 하겠다. 운 좋을 줄 알거라.】
잠을 깨운 것이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욱 다시 잠에 들고 싶었다.
“고작 영물 주제에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구나. 주절주절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어디 한 번 네 힘을 보여 보거라. 도마뱀이여.”
그 말을 들은 순간, 아게시오는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어졌다.
【너희 인간이란 족속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제를 모른다는 것이다. 네놈들의 그 방자함이 결국 네놈들의 목숨을 앗아가지. 지혜의 신에게 버림받은 것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학습능력이 없구나!】
사내가 딛고 있는 지면 위로 송곳 같은 바위가 빠르게 솟아올랐다.
사내는 발을 한 번 내딛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허나 그런 사내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했다는 듯, 주변에 있던 바닥에서 일제히 돌기둥이 솟아올랐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마법.
아게시오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미련한 놈. 용이 우습더냐.】
고작 인간 따위가 이것을 견딜 리는 없었다.
그것은 오만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경험에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역시 짐승은 짐승인가.”
그러나 사내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아주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눈높이에서.
허공을 발판 삼아 발을 내딛은 사내가 검을 내질렀다.
푹!
아게시오의 거대한 눈동자에 검이 박혔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고통일까. 지금껏 고통이란 것을 잊고 산 그에게는 색다른 충격이었다.
【이노오오오오옴!】
우레와 같은 노호성을 뿜어내던 아게시오가 꼬리를 휘둘렀다.
크기가 크면 속도가 느린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의 꼬리는 상식이라는 범주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그는 쉴 새 없이 꼬리를 휘둘렀고,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꼬리는 애꿎은 동굴 벽면만 박살낼 뿐이었다.
천악천은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그의 공격을 모조리 흘러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듯이.
‘이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위기감을 느낀 아게시오는 그간 모아두었던 힘을 전부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가로 또 다시 오랜 잠을 청해야 할 터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어차피 죽으면 전부 도로 아미타불이다.
아게시오의 입에서 가공할 만한 마력을 지닌 음성이 흘러나왔다.
【굳어라!】
용언(龍言).
말 그 자체가 마법이 되는 현상의 기적.
용들을 고등생물이라 부르며 다른 종족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허공 위에 떠 있던 사내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내는 침착하게 자신의 몸을 살폈다. 발끝부터 서서히 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용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군. 이것이 이 세계의 용들이 사용하는 마법인가….’
그대로 추락하는 사내.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콰직!
바닥에 떨어진 사내의 몸이 아까 전 생겨났던 송곳 형태의 바위와 충돌했다.
인간의 몸이라면 당연히 박살이 나야 정상.
【후우……. 날파리 같은 놈……. 쓸데없이 끈질….】
말을 하던 아게시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뚜두둑.
이 소리는 사내가 자신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돌들을 밀어내고 있는 소리였다.
【분명 몸이 굳었을 터인데…!】
사내의 몸에 붙어있던 돌들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호신강기(護身剛氣).
내공을 끓어 올려 몸에 두름으로서 전신을 뒤덮은 돌들을 전부 밀어낸 것이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아게시오가 다시 한 번 용언을 발동했다.
【무너져 내…】
아니.
발동하려고 했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사내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내공이 뿌려졌다.
붉은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이며, 그가 쥐고 있던 검이 허공에 사선을 그렸다.
“제 2식(式). 용살(龍殺).”
【…려라.】
서걱──!
아게시오의 몸과 함께 동굴 전체가 붉은 강기를 흩뿌리는 검의 궤적을 따라 사선으로 갈라졌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동굴.
잔해들의 틈바구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이등분이 난 아게시오의 시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팍을 갈라, 연갈색의 심장을 꺼내들었다.
“이것이 내단인가.”
그것을 품에 넣은 사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결국 초월자는 만나지 못했군.”
사내의 이름은 천악천(天惡天).
새로운 용살자(龍殺者)의 탄생이었다.
──헤롤드 산맥의 지배자, 지룡 아게시오가 단 한 명의 인간의 손에 의해 토벌됐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