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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96화 (96/180)

96화

“왜 말이 없어?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와? 마족인 내가 인간들을 멸종시키겠다는 게 뭐가 이상하니?”

나는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인간을… 전부요…?”

“그래. 쓰레기 같은 신을 섬기고, 쓰레기 같은 짓만 일삼는 벌레들을 전부 박멸시키는 게 이 대륙에도, 이 대륙의 피조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만.”

내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냐. 장난. 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과연, 장난일까?

그녀가 방금 내뱉은 말이 지금껏 그녀가 들려준 어떠한 말들보다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건 전적으로 아버님의 결정이야. 인간들은 용사니, 뭐니 하면서 몇 백 년에 걸쳐 마족을 침공해오고 있잖아? 그 용사라는 것들은 어디서 양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끊이질 않고 생겨나니 우리 마족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프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적에 대해 먼저 파악하는 건가요.”

“그래. 그렇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누가 그랬다지? 우리라고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야. 꽤 오래 전부터 제국의 첩자들을 심어두었지. 근데 인간이란 족속들은 어찌 그렇게 명예와 핏줄을 중시하는지 제대로 된 신분이나 이력이 없으면 제국의 수뇌부는커녕 중간까지도 갈수가 없더라고.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모든 게 이곳, ‘살로몬 아카데미’와 유착이 돼있어.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나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잖아?”

그런 것치고는 그녀의 지금까지 행보가 너무 막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뭐. 이건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개인적으로 따지자면 내가 이곳에 한 번 오고 싶기도 했거든. 나를 버리고 간 그 인간이 다닌 아카데미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설마. 그녀의 어머니가 아카데미 출신이었던 건가?

“혹시 어머님께서 아카데미에 다니셨었나요?”

“그렇다고 하더라고…. 아버님께서 그 여자에 대한 얘기는 도통 하려고 들지를 않으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말이야. 너 진지하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

“…제가 아리아님 밑에서요?”

“어. 너 정도면 꽤 쓸만하다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까지 아카데미 내에서 보여주었던 행동들도 그렇고. 또 나랑 같은 반인반마잖아? 너와 내가 지양하는 목표는 다르더라도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꽤 비슷할 거라고 보는데. 어때?”

“……그것이 마족의 차기 왕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라면 따르겠지만 혹여나 개인적인 제안이라고 하시면 제가 고민을 좀 해봐도 되겠습니까?”

“좋아. 고민은 너 자유니까. 나도 싫다는 놈한테 억지로 시킬 마음은 없어. 다만 네가 내 적이 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 질 거야.”

“네. 그 부분은 잘 이해했습니다.”

“그래. 너라면 잘 이해하고 있겠지. 반인반마에 마족의 피도 진하게 물려받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부터 마음만 먹으면 인간으로 살수도 있지 않겠어? 잘 고민해봐. 뭐가 너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지 말이야.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내 손을 놓은 뒤 우리가 있던 장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주변에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처음에는 어째서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으나 이내 곧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놓고, 먼저 저벅저벅 걸어가는 모습이 남들의 눈에는 충분히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자리로 돌아오자, 샬럿이 입을 놀리고 싶어 근질근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 왜.”

그녀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풉. 보아하니 차였네, 차였어. 그치? 너 방금 차인 거지?”

“차이긴 뭘 차여. 그냥 얘기만 하고 온 거야.”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는 다 이해한다. 이해해. 원래 이 나이 때에는 다~ 그런 거야. 알지, 알지.”

모든 걸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샬럿의 이마를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후우…. 진짜 줘 팰 수도 없고….”

“뭐? 너 방금 뭐라 그랬냐?”

“뭐가.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때 슬그머니 프레이가 내 옆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차라리 말이라도 걸었으면 했건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거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프레이……?”

그녀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봤다.

이쯤되니 슬슬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가 불길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흠. 프레이…?”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둘이 무슨 얘기를… 아니, 어째서 아리아 발렌타인 양이 자일에게 춤을 추자고 한 거죠? 원래 그렇게 두 분이 친한 사이였나요?”

“아…… 가끔 말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저에게 춤을 추자고 한 건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던 거였고요.”

“할 얘기요? 그게 뭔데요?”

어쩐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조였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아니었다.

“…그냥 무투술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습니다.”

“무투술이요? 왜 하필 무투술에 대한 얘기를 자일에게 물어보는 거죠? 무투술이라면 자일보다 저에게 묻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그런 것 같아요.”

“낯을 많이 가리시는 분이 왜 자일에게는 춤까지 요청하는 걸까요? 제게 뭔가 숨기는 게 있나요, 자일?”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B 클래스에 있는 여학생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뒤쪽에서는 친구들이 그녀에게 응원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이 내게 말했다.

“저기…. 네가 자일 지그하르트 맞지?”

나는 영문 모를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어. 맞는데 왜?”

그녀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우물쭈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B 클래스 소속인 마리 아나스라고 해.”

“어. 그래 반갑다.”

“저기 괜찮으면…… 나랑 같이 춤추지 않을래?”

설마… 춤을 추자고 할 줄이야.

아리아 발렌타인이야 대화를 나누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반에 학생까지 내게 춤을 추자고 할 줄은 몰랐다.

‘원래 이런 문화인건가?’

당황한 내가 고민하고 있자, 안절부절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 역시 나 같은 거랑은… 춤추기 싫겠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조금 당황스러워서. 왜 나한테 춤을 추자고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그게… 어쩌다보니 입학시험 때부터 쭉 지켜봤는데… 되게 늠름하고, 또 멋있고… 그렇더라고….”

말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감쌌다.

옆에서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프레이가 말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일. 숙녀가 먼저 춤을 요청했는데 그러고 있으실 겁니까? 어서 일어나서 춤을 추러 가시지요. 당.장.”

그 말을 들은 마리 아나스가 서서히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봤다.

커다란 눈망울이 반짝이며 이어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그래. 네가 괜찮다면야.”

“정말? 정말이지? 고마워!”

마리는 굉장히 기쁜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는 이내 휙 끌었다.

어쩐지 뒤통수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리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러 가는 동안 뒤쪽에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얼떨결에 아리아 발렌타인에 이어 옆 반의 학생과 춤을 추게 되었다.

아까 전 아리아 발렌타인에게 춤을 배운 탓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아리아가 춤을 엄청 잘 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마리라는 여학생은 나와 비슷한 수준인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것인지 춤을 추는 내내 내 발을 밟으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앗! 아프지? 미안….’ 등의 말을 쉬지 않고 해댔다.

이 정도면 춤을 추자고 부른 게 아니라 발을 밟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슬슬 축제의 마무리에 가까워지는 나오는 노래도 대부분 잔잔한 것들이었다.

대충 10분 정도 그녀와 춤을 추고 나자, 그녀가 자신과 함께 춤을 춰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당황했을 텐데 흔쾌히 받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자꾸 발 밟아서 미안해! 절대 고의는 아니었어! 사실 내가 춤을 그렇게 많이 춰보지는 않아서….”

“그럴 수 있지. 나도 춤은 거의 처음이라 실수가 많았는데 덕분에 잘 끝냈어.”

“저기. 그럼 혹시 다음에…….”

그때.

저 멀리서 벨라 트레이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일 지그하르트! 이쪽으로 좀 와봐라.”

“미안. 선생님이 부르시네. 먼저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아…. 잘가…!”

그녀에게 인사를 한 나는 운동장 한 쪽 구석에서 담배를 연신 태우고 있는 벨라트레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그녀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어. 왔냐.”

“예. 무슨 일이십니까?”

“맥도웰 그 노인네가 좀 보잔다.”

“맥도웰 학장님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로…”

아, 설마 저번에 말했던 제자 제안 때문인가?

생각해 본다고 한 뒤로 벌써 2주가 지났나…….

“나야 모르지. 쨌든 저쪽으로 가봐.”

“네.”

그녀가 손을 가리킨 곳은 운동장 뒤편에 있는 호수였다.

듣기로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호수는 아니고, 아카데미가 내부가 너무 답답하다는 학생들의 건의사항을 수용하여 인공으로 만들어낸 호수라고 한다.

그리 넓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호수를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깔려져 있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에 도착하자 호수 앞쪽에 서 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어두운 낯빛으로 시커먼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맥도웰 학장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를 발견한 맥도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그래. 자네 왔는가?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일단 앉을까?”

“넵.”

나와 맥도웰은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발을 절었지……. 맥도웰 정도의 기사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의 흑마술사가 있었단 말인가?’

힐끔 그의 다리를 바라보았으나 육안으로는 아무런 티도 나지 않았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맥도웰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쩐지 방금 전과는 달리 꽤나 차가운 어조였다.

“왜 그러지? 내 다리에 뭐라도 묻었나?”

“아, 아닙니다… 그저 저번에 학장님을 뵈었을 때 다리 쪽을 다치신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맥도웰이 감정 없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보아서는 안 될걸 보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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