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무엇을 말입니까?”
“대련이요.”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와 대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 있으십니까?”
“네. 지금이라면 자일을 흠칫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군요.”
어쩐지 그녀의 자신감은 다른 곳에서 기인한 듯 했으나 딱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나는 근처에 있던 목검을 쥐어든 채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규칙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대방의 기권 혹은 의식을 잃으면 그만두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나는 강화마법을 발동해 전신을 강화했다.
보랏빛 마나가 전신을 휘감았다. 검을 쥐는 것은 익숙지 않았기에 허공에 대고 연신 검을 휘둘렀다.
후웅! 후웅!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자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프레이가 물었다.
“어째서 검을 쥐신 겁니까? 자일의 주 무기는 창이 아니던가요?”
“변덕이라고 해두죠.”
항상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를 상대로는 창을 드는 것도 과분하다 이 얘기인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프레이.”
“됐습니다. 제가 직접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지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반박자 빠르게 검을 뻗었다.
후웅!
황금빛 마나를 머금고 있는 검날이 날카롭게 내 머리칼을 스쳤다.
서걱!
깨끗하게 잘린 머리카락 한 웅큼이 공중에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진지하게 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싫으면.”
그녀가 빠르게 다가오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나는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검을 튕겨냈다.
퉁!
강화마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저릿했다.
“그 프레이……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말씀해주시면 안 됩니까? 평소에 모습과는 많이 다른 듯 한데…….”
“화가 났다고요? 제가요? 화 안 났습니다!”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이 도리어 그녀의 화를 돋운 것인지 그녀의 검격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검격.
유려한 궤적을 띄며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검은 아니었으나 하나하나가 묵직하고 정갈했다.
피하기에는 정확하고, 반격하기에는 강력한.
그야말로 프레이 칼리고 다운 검술.
허나 그렇기에 더욱 파악하기가 쉬웠다. 모든 동작들이 너무 정직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공격을 피해낸 채 지면을 박차고 순식간에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장검의 특성상 안쪽으로 들어오는 상대를 베어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당황한 프레이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반대쪽 주먹을 뻗었다.
이마저도 예상했던 것이기에 가볍게 주먹을 붙잡았다.
그녀가 잔뜩 열이 받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혹시 그럼 제가 아리아 발렌타인이나 B 클래스의 마리라는 학생과 춤을 춘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당황한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나를 밀쳐냈다.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리고는 곧장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후웅!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검.
저걸 머리로 맞았다가는 두개골이 그대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넘실거리는 황금빛 마나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번 자신 있으면 막아보라고.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고개를 돌려 회피한다고 하여도 어깨를 내주게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
바닥을 구르는 것.
나려타곤(懶驢打滾).
그럴듯한 이름에 속아 대단한 기술인줄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저 힘차게 바닥을 구르는 것 뿐인 기술이다. 아니, 기술이라 하기에도 부끄럽다.
그것을 본 프레이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바닥을 구르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머리통이 깨지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는 바보가 있습니까? 살기 위해서는 명예든, 자존심이든 다 버려야죠.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한가요. 바닥 한 번 구르는 걸로 목숨을 구하는 거면 싼 거죠.”
그녀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어이가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프레이.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모르는 겁니다. 언제나 정직하게만 산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알아주는 게 아니에요. 올곧은 것도 좋지만 때로는 굽힐 줄도,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걸 잔머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이럴 때 보면 정말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습니다.”
“프레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이게 다 자일 때문 아닙니까!”
촤르르륵!
황금빛으로 물든 목검이 그 기세를 더했다.
점차 모여드는 강대한 마력. 이내 환한 빛이 연무장 전체를 감싸자 그녀의 검이 허공에 잔상을 남겼다.
‘이건 무투기(武鬪技)……?’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이 수 십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허상일까.
아니.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일단 저걸 파훼하는…….
“큭!”
‘전부 진짜라고…?’
옆구리에 검이 박힌 나는 공중에 뜬 채로 연무장 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당연히 허상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전부 진짜였다.
찰나의 순간, 마나를 일으켜 수 십 개의 검들을 구현해낸 것이다.
위력 자체는 별 볼일 없었으나 내 눈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겨우 공중에서 중심을 잡은 내가 바닥에 발을 뻗었다.
치지지직!
충격의 여파로 인해 발이 미끌리며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옆구리가 욱신욱신 거렸다.
강화를 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하면 갈비뼈가 그대로 박살날 뻔 했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걸어오고 있는 프레이를 바라봤다.
‘역시 미래의 소드마스터는 다른 가……?’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 보여준 힘도 그녀가 지니고 있는 힘의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정도면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이길 것 같은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력이라는 것이 흑마술을 사용했을 때를 포함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지금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봉오리에 불과하다. 개화(開花)도 하지 못한 상태로 나를 이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
꽃은 피웠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좋았습니까?”
“뭐, 뭐가 말입니까?”
“여자들이랑 춤을 춰서 좋았냐는 말씀입니다!”
후웅!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풍압으로 인해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가속(加速).
심장이 빠르게 뛰며, 몸 곳곳에 퍼져 있던 마력이 급격히 뜨거워진다.
이중내구강화(二重耐久强化).
뒤이어 쥐고 있던 목검을 더욱 단단하게 강화시켰다.
나를 제외한 주변의 시간이 보다 느리게 흘러간다.
나는 그녀의 뒤편으로 이동한 뒤 양 다리를 걷어찼다. 아마 그녀에게는 내 움직임이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보일 것이다.
다리를 걷어차인 프레이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가 촉촉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그래서 좋았냐고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안 좋았습니다.”
“정말요?”
“네. 정말로요.”
“진짜로?”
“네. 진짜로요.”
“거짓말이면 알죠?”
“…….”
마지막 질문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내 손을 쥐고 있는 그녀의 악력에 오히려 비명을 지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검을 내려놓은 뒤 씁쓸하게 말했다.
“……저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요?”
내가 묻자, 이번에는 입을 다물었다. 조그마한 입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 하는 것이 무슨 대답을 할지 상당히 고민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를 보채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도 자일과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
프레이가 나를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바보 같죠? 모르겠습니다. 저도 왜 그런 것인지. 그냥 자일이 다른 여성과 춤을 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여성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남성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런 자리에서 자일과 춤을 출 수 없다는 사실을….”
고개를 숙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자일.”
“프레이.”
나는 다시 검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대련은 이제 됐습니다. 이만 돌아가시…….”
“춤 한곡 추시죠.”
“갑자기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해 저는 춤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무(劍舞)도 춤 아닙니까? 그러니 프레이만 괜찮다면 이런 저와도 춤 한 번 춰주시겠습니까?”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활짝 웃었다.
“……좋아요.”
우리는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과는 다른,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서로의 호흡이, 동일한 리듬의 발자국이,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아름다웠다.
이것이 우리의 노래였고.
이것이 우리의 춤이었다.
밝은 얼굴로 아름다운 백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검무(劍舞)를 추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방금 깨달은 것이 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를 때 비로소 빛이 난다는 것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검의 궤적 하나하나가 음표가 되고, 멜로디가 되며, 춤이 되었다.
“그거 아시나요, 자일?”
“어떤 거요?”
“붉은 달이 뜨는 날 함께 춤을 춘 남녀는 반드시 미래의 연인이 된다는 거.”
나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붉은 달이 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그녀가 내 검을 튕겨내고, 내 목덜미에 검을 갖다 대며 빙그레 웃었다.
“…분명 검무(劍舞)도 춤에 포함되는 거겠죠?”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나 또한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검을 내린 그녀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녀는 상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거면 됐어요. 함께 멋진 춤을 쳐주어 감사합니다. 자일. 덕분에 잊혀 지지 않을 멋진 추억이 생겼네요.”
“저 프레이…….”
“왜 그러시죠?”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품에 있던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프레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이번 축제에서 마법 사격 1등을 하여 받아낸 경품 반지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내 입으로 말을 하고 있음에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모를 지경.
“아…… 그 어떤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그 친구니까, 친구로서 주는 겁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프레이가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는 최근에 마력도 많이 늘고, 강화 마법 사용자니까 마력이 그렇게 많이…….”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횡설수설.
반지를 품에 안은 프레이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리고 다음 날.
그녀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