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 계집의 짐은 라파엘의 종들이 전부 털어갔느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너는 그걸 보고만 있었어? 뭐라도 했어야지!”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녀의 서늘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피어오르는 검은 마기가 내 숨통을 조였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개미가 바다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끅!”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아스모데우스가 이내 마기를 거두었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계약자여. 우리는 협력관계 일 뿐. 그대는 내 주인이 아니다.】
숨통이 트인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방금 네가 말했네. 우리는 협력관계라고.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야. 그러니까 네가 그녀를 도왔어야지.”
【한심하기는……. 정녕 그녀가 네 계획에 도움이 되어서 필요로 하는 것이냐?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계집이 네놈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죽이려고 하지 않았느냐? 감정에 사로잡혀 본질을 흐리지 말 거라. 무능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네 알량한 죄책감을 조금 덜어낼 뿐이지.】
그녀의 말이 옳다.
지금 내가 하는 건 그저 책임전가다.
내가 지키지 못 했으니, 그 죄책감에 남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
【이러고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네놈도 알다시피 라파엘의 종들은 마신숭배자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라고 부를 수 있지. 일련의 상황들에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더냐?】
그래. 고민은 나중 문제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무죄를 밝혀내야 한다.
그녀가 마신숭배자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진짜 마신숭배자인 내가, 진짜 마신의 사도인 내가 보장한다.
【나도 함께 가겠다.】
그녀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우선은…….”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라파엘 교단의 교구(敎區)로 가야 하나? 아니면 라파엘교의 본산…? 이미 그녀가 이송되었다면…….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든이 다급하게 말했다.
“교주! 지금 막 교인들을 통해 들어온 정보입니다. 프레이 님이 라파엘 교단으로 이송 중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도주라고……?”
젠장.
상황이 더욱 꼬이고 있다.
‘…생각하자. 생각해. 내가 만약 프레이라면 지금 당장 어디로 갈 거지…? 아니, 그 전에 그녀가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이지…?’
-오늘 아침, 칼리고 백작가에 심어두었던 푸른달의 살수 두 명과 연락이 끊어졌다.
-정확히는 실종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현재 조사 중이긴 하나 단서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프레이의 살인…. 그 자리에 있던 사딘 룬델.
때마침 사라진 푸른달의 살수들….
그리고 칼리고 저택의 하녀 레일라.
불현 듯 이어지는 하나의 퍼즐.
“이든. 공간전이(空間轉移) 스크롤 가지고 있나?”
이든이 품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예. 여기 하나 있습니다.”
스크롤을 받아든 나는 망설임 없이 찢었다.
부욱.
뒤이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 * *
비슷한 시각.
아카데미 인근 숲.
라파엘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라파엘 교단의 이단심문관들 사이에 온몸이 구속된 백금발의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에게 가야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퍽!
그녀의 옆에서 걷던 이단심문관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휙, 하고 돌아간 고개.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때린 이단심문관에게로 향했다.
죽은 눈동자.
초점이 없는 눈동자를 보자 이단심문관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소녀는 여전히 같은 말만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야 해. 지금… 당장… 가야 해.”
이단심문관이 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쯧. 재수 없기는…. 내 그럴 줄 알았다. 할튼 칼리고 그 양반이 마신의 힘을 빌려 소드마스터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 수상하다 했어.”
그때.
가장 선두에 서 걷고 있던 이단심문관이 크게 소리쳤다.
저 멀리서 한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정지!”
탁.
그의 한 마디에 모든 교인들이 일제히 정지했다. 선두에 서 있던 이단심문관이 눈앞에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시오? 우리는 라파엘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이오. 지금 이교도를 교단으로 이송하고 있으니 길을 막지 말고 비켜서시오.”
입가에 늘러 붙은 침 자국. 헝클어진 머리칼. 광대까지 내려온 그늘.
행색만 보면 거지가 따로 없었으나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그들 행렬, 아니 그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전신의 구속구를 차고 있는 백금발의 소녀였다.
“내 말 못 들었소?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소. 이 이상 길을 막으면…….”
사내가 말했다.
“나는 살로몬 아카데미의 교수 요한이다. 라파엘의 심복들이 무슨 명목으로 내 제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지? 그는 우리 아카데미의 학생이다. 아카데미는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어조.
이단심문관은 일순, 서늘함을 느꼈다.
그저 평범하게 말을 내뱉은 것 뿐 인데도 어쩐지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로몬 아카데미의 교수셨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이교도의 인도 절차에는 이미 맥도웰 학부장의 승인이 떨어졌소. 우리도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가는 것이니 이만 돌아가셨으면 하는 바요. 안 그러면 우리도……”
시종일관 무기력함만을 담고 있던 그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내 제자를 이교도라고 부르지 마라.”
움찔한 이단심문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라파엘의 사자로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경험한 그였지만 지금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 자는 위험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래봤자 교수에게 좋을 게 없을 것이오. 우리는 정당한 절차를 밟고, 죄인을 호송하는 것 일 뿐 다른…….”
“프레이.”
요한의 눈은 저 뒤편에 있는 프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온몸을 속박당한 프레이가 요한의 부름에 움찔했다.
“교수……. 내 말 듣고 있소…? 계속 이런 식….”
“많은 걸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입에도 마개를 달고 있었기에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전력을 다해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이 서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하.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오? 그렇게 나온다면…….”
“그거면 됐습니다.”
──그 순간.
요한의 머리 위로 수 십, 아니 수 백 개의 무기들이 날아올랐다.
하나, 하나가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마력을 품고 있는 병기(兵器).
푸른빛의 마나를 머금고 있는 무기들이 그의 손짓 한 번에 일제히 낙하했다.
“젠장! 저 빌어먹을 놈이! 형제들이여! 지금부터 저 놈을 이교도로 간주한다!”
다급한 이단심문관의 외침과 동시에 그들의 행렬 주위로 거대한 백색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성마술(聖魔術)로 이루어진 결계가 완성됐다.
콰과과과광──!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주변 일대에 울려 퍼졌다.
쩌저저적.
결계의 표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이교도의 정체는 마법사다! 모두 거리를 좁혀라!”
선두에 있던 이단심문관의 말 한 마디에 다른 이단심문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빠르게 진형을 갖춘 이단심문관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요한을 향해 돌격했다.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생물(無生物)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
“공간구속(空間拘束).”
요한의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푸른 광채가 허공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주변 일대의 공간 전체를 잠식했다.
그를 향해 달려오던 이단심문관들은 마치 동영상 배속을 늦춘 것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허나 그들 본인은 그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간의 주인은 오로지 단 한 명.
요한 크루이프였다.
“절단(切斷).”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이단심문관들의 양팔이 일제히 잘려나갔다.
투투두둑.
수 십 개의 팔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요한이 마력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부딪치자 공간을 구속하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뒤이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이 해제되고 나서야 본인들의 팔이 잘려나갔음을 인지한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이이이!!!!”
“아아, 라파엘이시여!! 부디 어린 양들을 구원해주소서!!”
“저 이교도를 죽여라!!! 신을 우롱하고, 악을 숭배하는 저 사특한 놈을 찢어 발겨라! 주신의 이름으로!!”
그야 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
신을 부르짖으며 신성력을 일으키는 이들과 적을 향한 살기를 불태우는 이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몸을 속박하던 구속구에서 빠져나온 프레이가 있었다.
다행히 요한 덕분에 그녀를 감시하던 이단심문관들 또한 본인의 팔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요한을 힐끔 바라 본 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사용해 뛰었다.
‘아버지……. 아버지를 봬야 해…….’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인해 전신이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그녀는 미친 듯이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순식간에 숲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이 왼쪽 검지에 있던 반지 하나를 빼냈다.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단순히 마력을 발산한 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기가 요동치고, 지면이 갈라졌다.
애초에 요한은 이곳에 온 순간부터 그들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제압하는 방식이 조금 과격했을 뿐.
그의 유일한 단점은 힘 조절을 못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성기사들이라는 점.
그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이 정도 힘을 사용하는 것쯤은 괜찮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징계를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그 정도야 이미 감수한 것이고, 최악의 상황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경우 당당히 도망칠 생각이었다.
대마도사(大魔道士) 아슈타르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기에.
또한 자신의 제자가 결코 마신숭배자일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하여도 이딴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그는 이해가 가지 않으면, 이해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요한의 눈동자가 저 뒤편을 향했다. 이단심문관들의 뒤편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푸른색 망토가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