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사딘 룬델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건 채 능청스럽게 말했다.
“무엇을 말하는 건가?”
프레이가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쪽지를 보낸 것도, 이 대련을 꾸민 것도, 전부 다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패배를 시인한 리델이 어째서 제게 검을 휘두른단 말입니까!”
“이거 웃기는 군. 그걸 왜 내게 묻는 것이지? 리델이 검을 휘두른 것은 오로지 리델만이 알고 있을 터. 허나 그는 이미 죽어버렸지 않은가. 그대의 손에.”
“……당신도 보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나를 탓하고 싶은 것 같은데… 증거도 없이 사람을 범인으로 몰면 당사자는 얼마나 억울할지 생각해보지 않았나?”
“…….”
모든 정황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에 말처럼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프레이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동급생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마땅한 생각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퍼부어대는 사딘 룬델.
“크하하하하하하하!!”
프레이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것입니까?”
연신 웃음을 터트린 사딘이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놈의 표정을 보는데 어찌 재미없을 수가 있겠느냐!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구나. 프레이 칼리고. 이 상황이 억울해 미치겠느냐? 왜 자신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냐? 그렇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려주마.”
그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소름끼치는 미소.
원초적인 악의(惡意)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네놈과 네놈의 애비가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꼴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찮은 백작 가문 주제에 소드마스터랍시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꼴을 봐줄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게 분수도 모르게 왜 그렇게 설쳐대는 것이냐. 왜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이냐고. 그냥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진 채 살아갔으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니더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을 먹게 되면 죽는다. 팔짜에 맞지 않게 살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네놈 애비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고.”
프레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사딘은 그 얼굴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나냐고 물었지? 그래, 맞다. 아주 정확히 봤구나. 나다. 내가 너를 이 상황에 놓이게끔 만들었다. 내가 네 애비를 불구로 만들었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네가 그토록 믿고 있던 백작가의 사용인이 네 아비의 음식에 독을 탔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 없어…….”
“하녀 레일라.”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은가? 그녀가 네 아비의 음식에 독을 탄 범인이다! 모두 내가 시킨 짓이지! 한 평생 심장에 마나를 새겨 넣은 소드마스터의 육체에 마기를 주입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으하하하하하하! 바로 네놈 애비처럼 되는 것이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느냐? 멍청한 것. 본인의 아비가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헛짓거리만 하고 있는 꼬라지라니.”
“그럼 우리 가문이 이렇게 된 것도 전부…….”
“그래! 다 내가 한 것이지! 의도적으로 너희 가문을 향한 소문을 퍼트리고, 너희들의 자금줄을 끊어놓았다. 가주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고, 너희가 머무는 저택 지하실에 마신숭배자를 위한 제단을 세워놓았지.”
그가 탐스러운 먹잇감을 바라보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칼리고 백작가를 마신숭배자들의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을 잃은 프레이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검을 뽑아들고 사딘을 향해 돌진했다.
“─────사디이인 룬데에에엘!!!!”
무시무시한 기세.
녹이 슨 검날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외침에 사딘이 얼굴을 찌푸렸다.
“비탄(悲嘆)의 저주.”
사딘의 손에서 피어난 마기가 프레이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힘이 빠진 프레이가 검을 놓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은 채 사딘을 향해 기어갔다.
팔을 뻗고, 다리를 뻗어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오로지 그를 죽이겠다는 맹목적인 의지만이 새겨져 있을 뿐 이었다.
사딘이 그런 그녀를 보며 조소를 터트렸다.
“풉! 푸큽! 이제는 하다하다 네발로 기어오는 것이냐? 이거 완전 짐승이 따로 없구나. 허나 지금 나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죽… 인… 다….”
“흐음.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 네놈의 애비와 식솔들을 죽일 살수들이.”
저주에 걸려 기력이 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정신력을 발휘해 계속해서 기어가던 프레이가 돌연 정지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사딘을 바라봤다.
“……거짓…말이지?”
이제 그녀의 눈에는 증오보다 간절함이 깃들어있었다.
사단이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며 활짝 웃었다.
“거짓말 같나? 풉. 크흡. 푸큽. 프하하하하하──! 전부 진짜다. 네놈의 애비와 식속들, 칼리고 백작가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전부 죽게 될 것이다. 그들을 구하고 싶은가? 이 모든 게 거짓이었으면 하는가? 그런데 어쩌나. 네놈은 이미 이곳에 있는데.”
사딘의 손에서 검은 마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리델의 시체로 향했다.
콰직!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리델의 시체가 검게 변모했다.
“지금 당장 간다면 늦지 않을지도 모르지. 허나 그게 가능할까?”
힘겹게 숨을 내쉬던 프레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가…….”
한 쪽 다리를 먼저 세운 뒤, 반대쪽 다리를 세웠다.
팔로 몸을 지탱하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겨우 제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실핏줄이 터진 그녀의 눈동자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호오. 그걸 견디고 일어날 줄이야. 그래. 네놈의 정신력 하나는 인정하마.”
──뒤이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준비된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리델의 시체에 다가가 마기를 확인했고, 곧장 프레이를 속박했다.
사딘 룬델의 저주로 인해 그녀의 몸에 깃든 마기를 발견한 뒤 그녀를 구속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짜여진 각본 같았다.
“프레이 칼리고! 주신 라파엘의 이름으로 네놈을 구속한다.”
그녀의 팔과 다리에 구속구를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를 보는 사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자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시는 겁니까?”
옆을 바라보니 프레이가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붉은 달.
연무장 근처 벤치.
프레이와 함께 검무를 추었던 그 날이었다.
돌아왔다.
다시 돌아왔다.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딘을 찾아가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그래선 안 된다.
그렇게 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
나도 모르게 손아귀의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장난스럽게 웃었다.
“꿈이요……? 에이, 또 장난치시는 거죠? 방금 막 검무를 끝내고 쉬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꿈을 꿉니까!”
“하하……. 그러게요.”
지독히도 엿 같은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내일 현실이 될 터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꿈은 반대라고들 하잖아요?”
그녀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고 있을까.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미래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그걸 안다면 지금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지 못하겠지.
아스모데우스가 보여준 기억 속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던 것은 고통과 절망, 절규, 간절함 따위가 전부였다.
“제가 바꾸려고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요? 혹시 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권능을 사용한 대가로 인해 최근 잠잠했던 환청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뭐? 너 따$%&^위가 미래%^&%를 바꿔?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불%^&가%^능%^7해. 포6기6해.
-풉! 킥! 키킥! 키키키긱! 푸푸풉! 푸파하하핳핳!! 키키6키킥!!! 케게케6키6키키!!
-내가 예언66#$$5하나 할까? 너는 결국 미래#$를 바꾸지 ▒할 거야. 프레@@#$이는 또 다시 잘게 썰린 고깃#@@#조@#각이 될 테고, 너는 또 미쳐 날뛰며 성기사들@#의 손에 전신이 도륙 나겠지. 지금##@@도 팔 다@#리가 욱신욱신하지? 조@금#만 기다려. 곧 그렇게 될 테니까──
가지각색의 목소리.
노인의 것도, 아이의 것도, 여인의 것도, 사내의 것도, 종류는 다양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
모두가 내 실패를 당연시 여기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미 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전적이 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회귀를 거쳐야 할지, 그 전에 내 정신이 붕괴하는 것은 아닌지.
영영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또 다시 그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실 선택지 중에는 굳이 회귀를 거듭하지 않고도 이 상황을 무마하는 방법이 있다.
간단하다.
그녀를 구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
본래 이 세계의 흐름대로라면 그녀는 내 앞길을 막아서게 되는 가장 큰 벽 중 하나니까.
──허나 이제는 아니다.
내가 바꾼 이 세계에서 그녀는 내게 필요한 인물이다.
내가 그녀를 살리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내게 필요하기 때문.
그 이상의, 이하의 이유도 없다.
그거면 충분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일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 됐든 저는 자일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제 말이 자일도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아 온 자일은 항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왔으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하지 않을까요?”
환청의 영향일까. 정신이 불안정해서일까.
내게는 그녀의 말이, 이번에는 자신을 꼭 구해달라고 들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그날 새벽.
나는 홀로 칼리고 백작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