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시간이 많지 않다.
사건이 터지는 것은 당장 내일.
지금부터라도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칼리고 저택가에 향하는 도중, 나는 로만을 소환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라면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기척을 차단하는 마법을 두른 채 칼리고 백작가에 도착한 나는 곧장 집사장 잭슨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왔던 전적이 있으니 길을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잭슨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발견한 잭슨이 투기(鬪氣)를 끓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여기서 그를 상대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복면을 벗었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아가씨의 친구 분?”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 세월 칼리고 백작가를 지탱해온 만큼 그 또한 프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잭슨이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야심한 시간에 대체 무슨 용무로 찾아오신 겁니까? 제 아무리 아가씨의 친구 분이라 하여도 대답 여하에 따라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칼리고 가문은 역사 깊은 무가다.
항상 제국의 최전방에서 솔선수범하며 백성들을 지켜왔던 긍지 높은 가문.
내가 아무리 프레이와 친구라고는 하지만 사전에 동의도 없이, 멋대로 침입한 것만으로 사실상 중죄였다.
허나 지금은 그런 예의 따위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곧장 미끼를 던졌다.
“제게 가주님의 병세를 호전시킬 방도가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회복술사도 아닌 당신이 어째서 그런 것을 알고 계신 거지요?”
그가 미끼를 물었다.
“그런 게 중요합니까?”
절박한 쪽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사실 내 쪽이 훨씬 더 절박한 건 맞지만 잭슨은 그 사실을 모른다.
“……중요하긴 하나. 가주님의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겠죠.”
내 손에서 보랏빛 마나가 피어올라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주신 라파엘님께 맹세하겠습니다. 저라면 가주님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그 어떤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음을 맹세합니다.”
잭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올바른 판단이다.
“저택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과 함께 칼리고 백작가를 떠나십시오. 물론, 가주님도 포함입니다.”
잭슨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요구하는 것은 그거 하나입니다. 이것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가주님을 원래대로 돌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붉은 물약이 담겨 있는 플라스크를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잭슨이 내가 쥐고 있는 플라스크를 유심히 살폈다.
“최상급 물약입니다.”
이어서 영롱한 녹색 빛을 띠고 있는 약초를 꺼냈다.
“이건 드미트리의 잎사귀입니다. 이외에도…….”
나는 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하나 같이 구하기 어렵다고 정평이 난 물건들이었다.
“이 귀한 것들을 어떻게…….”
“제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것들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라면 가주님의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침상에 누운 채 자신의 끝을 기약하는 할튼 칼리고가 아닌, 과거 당신과 함께 전장의 선봉에 선 채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던 그 시절의 할튼 칼리고를?”
잭슨이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 한들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째서 저희 가주님을 도와주시려는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희가 왜 백작가를 떠나야 하는 것인지. 이곳은 저희의 터전입니다. 칼리고 가문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가 깃들어있는 장소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기사로서, 그리고 칼리고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곳에 시작과 끝을 함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해 가주의 죽음을 방관하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곧 이 저택에 당신들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재앙(災殃)이 들이 닥칠 것입니다.”
“재앙… 말입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방안의 공기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중앙에 위치한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때가 됐군요.”
화들짝 놀란 잭슨이 소리쳤다.
“대체 무엇을 꾸미고 계시는 겁니까!”
일순, 공간이 비틀어지며 그곳에서 복면을 쓰고 있는 살수와 눈먼 노인이 걸어 나왔다.
“주인. 눈먼 현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잘했다. 로만.”
노인을 발견한 잭슨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대는…… 설마, 투귀(鬪鬼) 라다무스인가……?”
라다무스의 시선이 잭슨에게로 향했다.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목소리는 잭슨인가? 이거 오랜만이구만.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네.”
“그대가 어찌 이곳에…….”
나는 라다무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감님.”
“끌끌. 감사는 무슨. 나야 말로 그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았던가. 이렇게라도 그대를 도울 수 있어 기쁘다네.”
짧게 감사를 표한 나는 잭슨을 바라봤다.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 대화가 수월하겠군요. 아시다시피 이쪽에 계신 노인 분은 과거 투귀라고 불리던 라다무스님이십니다.”
“하하.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으니 부끄럽구먼.”
“현재는 ‘서쪽 숲의 눈먼 현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고 계시지요.”
잭슨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러니까 서쪽 숲의 눈먼 현자가 그… 싸움에 미친 광인인 라다무스 라는 말이오…?”
라다무스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크흠. 과거는 과거일 뿐이지.”
“그렇습니다. 투귀와 서쪽 숲의 눈먼 현자는 동일인물입니다.”
잭슨이 충격 받은 얼굴로 말했다.
“하하……. 오늘은 제정신으로는 잠에 들지 못 하겠구만. 그 투귀가 현자가 되었다니…….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어이가 없는 얘기는 처음이야. 그래서 저 자는 왜 이곳에 부른 건가?”
대체 과거에 어땠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피어올랐지만, 우선은 넣어두기로 했다.
“영감님.”
내가 부르자, 라다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 얘기는 잠시 접어두고, 자네 또한 ‘서쪽 숲의 눈먼 현자’에 대한 소문은 들어봤을 테지.”
“그렇네.”
“아시다시피 나는 미래의 편린을 볼 수 있다네. 그리고 최근에 칼리고 백작가의 다가올 재앙을 보게 되었지.”
잭슨이 심각한 얼굴로 라다무스를 바라봤다. 허나 그의 입을 열리지 않았다.
“…….”
“가까운 시일 내에 그대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백작가에 들이닥칠 걸세. 그리고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야. 이것은 정해진 운명.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네.”
“……저 자가 얘기한 게 정말 사실이라는 애기인가?”
라다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는 눈이 멀게 된 이후로 남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되었지. 영혼, 마력, 그리고 죽음 따위와 같은 것들을 말이야. 내가 왜 최고의 점성술사로 불리겠는가.”
하는 짓이나 하는 말을 보면 최고의 점성술사라기보다는 사기꾼에 가까웠다.
“……그럼 저 자의 말대로 이 저택을 떠나게 된다면 최악의 결말은 피할 수 있는 것인가?”
“모르지.”
“뭐?”
“그건 나야 모르는 일이지. 방금도 말했듯 나는 미래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어날 미래의 편린,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는 것 뿐 이야. 내가 원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전부지. 그러니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나는 알지 못하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지.”
“그게 무엇인가?”
“저 사내는 내가 본 미래를 바꾼 전적이 있다는 걸세.”
“……미래를 바꾸었다고?”
“지금껏 내가 본 미래가 틀린 적은 없었어. 내게 있어 이 빌어먹을 권능은 말 그대로 저주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강제로 보여주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관음하며 즐기기 위해 내려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실제로 내가 말한 것처럼 됐으니 아마 맞겠지. 그러나 그는 달라. 처음이었네. 내가 본 미래를 바꾼 사람은.”
잭슨의 눈동자가 가파르게 떨렸다.
“…정말 그를 믿어도 된다는 건가?”
그 말을 들은 라다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를 믿지 못하겠다면 한 때 같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나를 믿게나.”
“……그럼 더욱 믿지 못하겠는데?”
“잉?”
잭슨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일세. 자네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믿어도 되겠지. 어차피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 같으니.”
“제 말을 따라주시면 분명 미래는 변할 겁니다.”
결단을 내린 잭슨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도록 하겠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는가?”
“집사장님께서는 지금 당장 저택에 있는 모든 사용인들과 가주님을 모시고 여기 계신 영감님과 함께 하르만 백작가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하르만 백작 가문 말인가?”
처음에는 이들을 옮길 장소로 생각해두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72교단이었다.
제국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교단의 본산이라면 몸을 숨기기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이들은 내가 흑마술사라는 사실을 모른다.
대충 얼버무려 교단에 데려간다고 하여도 그곳에서 교인들이 흑마술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묻고 싶은 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직접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예. 도착하게 되면 그쪽에서 설명해줄 겁니다.”
그리고는 품에 있던 공간전이 스크롤 5장을 건넸다.
공간 계열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공간전이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더더욱 없고.
그렇기에 공간전이 스크롤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72 교단과 하르만 백작가에 도움이 없이는 나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겠네.”
“그럼. 영감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뵙죠.”
“그래. 걱정 말게나.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는 공간전이 스크롤은 급한 대로 내 걸 사용했네만 혹시 그에 따른 비용 청구가 가능한가?”
능글맞은 라다무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 또한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현자가 그렇데 돈을 밝히셔도 되는 겁니까?”
“그대도 알지 않은가. 내게는 딸린 식구가 있다는 것을. 이게 다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네. 자내도 배우도록 하게.”
“명심하도록 하죠. 말씀하신 스크롤 값은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 된다면 그에 따른 보수도 지급하도록 하죠.”
“오오! 역시 자네일세. 통이 커. 그럼 죽지 말게나. 이번에도 자네를 통해 내가 보는 미래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싶거든.”
“물론이죠.”
대화를 끝마친 나는 곧장 칼리고 백작가의 지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