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전 소드마스터 할튼 칼리고의 장남(長男) 프레이 칼리고.
그대는 본인의 하나 뿐인 아버지가 어째서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가? 전투로 생긴 상처? 제국의 유명한 회복술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 전부 틀렸다.
-그것은 그의 몸에 지속적으로 주입된 마기 때문이다. 칼리고 백작가의 사용인들 중 마신숭배자가 있다.
그자가 가주의 몸을 망치고 있다. 그가 먹는 음식과 그가 먹는 약에 지속적으로 마기를 응축한 독을 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게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대의 아버지의 몸을 망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A 클래스 뒤편에 있는 창고로 와라.
-단,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오로지 프레이 칼리고 그대 혼자 이곳으로 오도록 해라.
프레이의 머릿속에서 쪽지의 내용들이 재생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사딘 룬델이었다.
쪽지를 건네준 것은 리델이었지만 쪽지를 읽은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딘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까지 들던 불길한 예감의 정체가 이것이었을까.
창고 앞에 선 그녀는 천천히 숨을 갈무리했다.
“스읍… 후우…….”
이대로라면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얘기했던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분노에 사로잡혀 일을 치르는 것만큼 멍청한 것은 없다고 배웠기에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점차 분노가 가라앉고, 이성이 뚜렷해진다.
언제부터였을까.
프레이에게 사딘 룬델은 친구였다.
비록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과 같은 검의 길을 걷는 그를 존중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둘은 어긋났다.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생각했건만, 이제는 완전히 갈라진 길의 모퉁이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행선상에 놓인 그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접점은 그때 그 시절이 끝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지금의 그녀는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가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만 또한 그림자의 몸을 숨긴 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다.
프레이가 전방에 있는 리델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대인가? 이 따위 장난질을 친 것이?”
리델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래. 프레이 칼리고. 내가 쪽지를 보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쪽지를 보낸 거지…? 감히 칼리고 백작가를 우롱하는 것인가…? 우리 가문의 사용인들 중 마신숭배자가 있단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거짓된 정보로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그들은 내게 모두 가족과 같은 이들이다. 오랜 세월 함께한 그들이 아버지를 배신할 것 같으냐!”
“정말 확신하는가?”
“…뭐라고?”
“정말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너는 정말 칼리고 백작가의 사용인들 중 단 한 명의 배신자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느냐? 한때 제국을 대표하던 소드마스터인 할튼 칼리고가 고작 전투 중 입은 상처 때문에 지금까지 침상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프레이는 대화를 하면서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은 지금이 처음일 텐데 마치 이런 경험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시감(旣視感).
‘뭐지 이 느낌은……? 내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나는 분명 오늘 처음으로 이곳에 왔어. 그럼 뭐지?
이 기분은…? 그저 내 착각에 불과한 것인가…?
“그래. 그 표정을 보아하니 네놈도 어느 정도 납득하는 모양이군.”
프레이가 흉흉한 눈빛으로 리델을 응시했다.
“그 입에 아버님의 존함을 담지 마라.”
“허세 부리지마라. 네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쪽지에 적힌 내용은 사실이다. 나는 칼리고 백작가에 사용인 중 누가 마신숭배자인지 알고 있다.”
“원하는 게 뭐지?”
“대련. 나와의 대련을 통해 네가 승리한다면 칼리고 백작가에 숨은 쥐새끼가 누군지 알려주마.”
“고작 그거면 충분한가?”
“하! 네놈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프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 방금 이 장면 분명 내 기억에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기시감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방금에 대화는 분명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대체 뭐지……? 마법인가……?’
그럴수록 프레이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리델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재수 없는 녀석. 네 까짓 게 감히 나를 무시해? 고작 S 클래스 따위가?’
제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자식이라지만 이곳 아카데미에서 그녀는 이제 막 생겨난 신생 클래스였고, 자신은 무려 A 클래스였다.
그렇다면 무시를 해도 자신이 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래. 그 오만한 콧대를 눌러줘야 내 직성이 풀릴 것 같구나. 조건이 있다. 네놈이 나와 대련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제 발로 아카데미를 나가라.”
“알겠다.”
리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명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상당히 예리한 날을 지니고 있었다.
“검을 뽑아라.”
프레이는 연무장에서 사용했던 녹슨 검을 뽑아들었다.
품질 자체는 좋았으나 오랜 시간 사용한 탓에 날이 무뎌져 있었다.
“지금 장난하는 것이냐? 고작 그 따위 검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은가. 그 입 다물고 검이나 휘둘러라.”
평소라면 이토록 거친 언행은 절대 쓸 리가 없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신경을 상당히 곤두세운 상태였다.
가문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시감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
기껏 감정을 가라 앉혔는데 다시 또 짜증이 치솟아 오른다.
‘……진정하자.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지만 상대는 아카데미의 동급생이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 해.’
리델이 이를 악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후회하지 마라.”
둘의 검이 격돌했다.
언뜻 보기에는 리델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정작 그의 검은 유효타는 하나도 내지 못한 채 애꿎은 허공만 쉴 새 없이 베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리델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고, 도리어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마나까지 사용해가며 공격을 퍼부었지만 프레이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체력이 전부 소모된 리델.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프레이가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텅!
“승부는 끝났다.”
허나 리델은 포기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뒤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딘 룬델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그가 항복을 선언했다.
“……내가 졌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사딘 룬델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더욱 처참하군.”
프레이는 생각보다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크게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사딘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리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쓸모없는 녀석.”
붉게 물든 눈으로 살기를 뿜어내던 리델이 돌연 검을 집어들어 프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죽여야 돼……. 프레이 칼리고를 죽여야…….”
방금 대련 때와는 차원이 다른 몸놀림.
──서걱!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리델의 양쪽 팔과 발목이 잘려나가며 그가 고꾸라졌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딘의 얼굴이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일그러졌다.
“네놈은 누구냐.”
“…….”
프레이의 앞을 가로 막은 복면의 사내.
로만이었다.
프레이 또한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분노로 가득 찬 사딘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네놈은 누구냐 물었다──!”
물론, 로만이 그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은 지금 여기서 그를 죽일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이 두 개 뿐 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인님이 일러준 내용대로라면 아직은 그를 죽일 타이밍이 아니었다.
로만이 프레이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저 자가 무엇을 하든 반응조차 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저 당신은 누구…….”
그리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의 수준으로는 로만의 은신을 간파할 수 없었다.
사단이 보기에 그는 말 그대로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의 전신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프레이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건 마기……!?”
사딘이 프레이를 향해 손을 뻗자, 칠흑 같은 마기가 그녀에게로 쏘아졌다.
“비탄(悲嘆)의 저주.”
당황한 프레이가 급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치잉!
허나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주위에 생겨난 원 형태의 결계가 사딘 룬델이 쏘아버린 마기를 소멸시킨 것이다.
경악한 사딘이 소리쳤다.
“네놈이 어찌 성마술을……!”
그의 말처럼 그녀의 몸 주위를 둘러싼 순백색의 막은 분명 신성력을 담고 있었다.
“여기 마신숭배자가 있다! 라파엘의 사자들은 어서 이교도를 구속하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쳤다.
“프레이 칼리고! 주신 라파엘의 이름으로 네놈을 구속한다.”
프레이를 향해 달려든 이단심문관들이 그녀의 팔에 구속구를 채웠다.
그 과경을 본 사딘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알 수 없는 사내의 개입으로 인해 계획이 조금 어긋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프레이만 교단으로 넘긴다면 자신의 승리였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로만은 여전히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봤다.
──그 순간.
“그 손 놔라. 머저리들아.”
“감히 누가 라파엘의 사자들에게…….”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이단심문관이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주, 주교님?”
한 쪽 눈의 안대를 낀 험상궂은 인상의 여인과 선한 인상의 작은 체구를 지닌 소년.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는.”
“죄, 죄송합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비, 빌리 해밍턴이라고 합니다!”
“그래. 빌리 해밍턴. 너 뒤지고 싶냐? 일 똑바로 안 할래?”
“예? 그, 그게 무슨…….”
두 명 모두 십자가가 그려진 푸른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청십자회 소속 주교, 아이리와 토미였다.
아이리가 프레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목에 있는 로자리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 보여, 안 보여?”
“…보, 보입니다.”
“보여? 눈깔은 멀쩡하게 달려 있나 보네? 응?”
자신을 빌리라고 소개했던 이단심문관이 몸을 덜덜 떨며 물었다.
“……제,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아이리가 픽하고 웃었다.
“눈깔을 달고 있으면 뭐해. 쓸모가 없는데. 확 빼줘? 어?”
“…죄, 죄, 죄송합니다!”
얼이 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딘이 흉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다하다 이제는 별 시덥잖은 것들까지 끼어들어 방해를 하는 구나. 나는 룬델 공작가의 사딘 룬델이다.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꺼지…….”
정색한 아이리가 사딘을 바라보며 말했다.
“토미. 저 새끼 구속해.”
“예. 자매님.”
사딘에게 다가간 토미가 순식간에 그를 제압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빛으로 된 구속구를 만들어내 그의 전신을 구속했다.
사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전신이 속박됐다. 토미는 사딘의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읍! 읍!”
“조용히 좀 해주시겠어요? 이교도(異敎徒)님.”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기사를 지망하는 사딘이 단숨에 기절을 할 정도였다.
토미가 기절한 사딘의 입을 벌려 안에 있던 부러진 이빨 세 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등에 사딘을 맨 채 아이리에게 다가갔다.
“구속 완료했습니다. 자매님.”
“잘했다.”
아이리가 빌의 머리채를 잡은 채 그의 얼굴을 프레이의 로자리오 쪽으로 갖다 댔다.
“너는 성직자라는 새끼가 이걸 구분 못해? 저건 토마스 추기경님의 성물이잖아.”
“……그, 그럴 리가.”
“한심한 새끼. 추기경님의 성물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마신숭배자로 몰아가려고 했던 거냐? 하여튼 요즘 새끼들은 빠져가지고는. 안 그래, 토미?”
“맞습니다. 자매님.”
아이리가 이단심문관들을 바라보며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 모두 교단으로 따라와라. 물어볼 게 잔~뜩 있으니까.”
그리고는 프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쪽도 일단 따라오시고. 쫄 필요 없어. 뭐 좀 물어보려고 하는 거니까.”
프레이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딘을 등에 맨 토미가 저벅저벅 걸어 나가자, 그 옆에 선 아이리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토미. 근데 공작가의 후계자가 마신숭배자라니 이거 완전 난리 나는 거 아니냐? 우리한테도 불똥 튀면 어떡해. 네가 나 지켜줄 거지?”
“자매님. 저희는 라파엘의 검입니다. 검은 생각 따위를 할 필요가 없고요.”
“하여튼 고지식하기는…. 어? 근데 방금 인기척 느껴지지 않았어?”
“저는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자매님.”
“그래? 착각인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로만은 발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