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전 용사파티의 일원이자 나의 동료였던 테레사 룬델이었다.
‘……암시는 아직까지 잘 통하는 군.’
뢴달은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새삼스럽게 뭘 놀라고 그러는 것이냐. 그녀는 과거 나의 동료지 않은가, 뢴달.”
“그, 그렇다 해도…….”
차마 뒤에 말은 할 수가 없는 듯 입을 다무는 뢴달.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지금부터 룬델 공작가를 급습할 인원들이다.
그리고 테레사 룬델은 그 가문의 직계이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모인 곳으로 직접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뢴달의 입장에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낄 수밖에.
“슬슬 주역들이 모인 것 같군. 뢴달, 영감님은 아직 인가?”
“지금 오고 계실 거다.”
테레사 끼어들며 말했다.
“아벨 크로이……. 아니, 자일 지그하르트……?”
“편한 대로 불러라. 테레사.”
“지금은 자일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쓰는 것 같으니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 자일 지그하르트. 우리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현재 ‘라미안의 속삭임’이라는 흑마술에 걸려 있는 상태다.
그것은 완벽한 세뇌라기보다는 일종의 암시에 가까웠다.
서서히 그녀 본인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에 뿌리부터 잠식해나가는…….
지금 그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호의와 신뢰에 가까울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더욱 더 강력한 세뇌를 걸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아를 잃고, 그저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를 뿐인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다면 내가 원하는 형태의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우선 앉도록 하지.”
“…….”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푸른달의 정예 살수들. 뢴달 하르만과 그를 지키는 그림자들.
그리고 테레사와 나 이 정도가 끝이었다.
“영감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얘기하도록 해라.”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무엇이 말인가?”
“아버님과 숙부님. 그리고 사딘…… 그 아이까지 마신과 엮어있다는 말이…… 정녕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불안정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대며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테레사.”
“……말해라.”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말을 기억하나?”
“…….”
“진짜 영웅이 되고 싶지 않냐고 물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너는 진정한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가?”
암시에 영향인지 그녀의 눈이 일순 멍해졌다. 그러더니 그녀의 입에서 나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 짜… 영… 웅….”
“그래.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지금의 네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 영웅 말이다.”
탁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깃들었다. 확고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되고 싶다. 강렬히 소망한다. 가짜 영웅 따위가 아닌, 진정한 영웅을.”
“그렇다면 네 손으로 네 가족을 벨 수 있겠는가?”
말을 내뱉고 있는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국을, 백성들을 지키는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모름지기 악을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가족이라 할 지라도. 영웅이 되겠다고 선언한 너는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테레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탄식하듯 말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숙부님이나 아버님이 마신숭배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사딘 또한 마찬가지다. 그 아이가 얼마나 순하고 착한 아이인데…….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지금도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이란 말이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조금 투정이 심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질만큼은 그 누구보다 선하다고 내가 자부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풉.”
그녀가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왜 웃는 것이냐?”
나는 방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 미안. 어이가 없어서.”
“지금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인가?”
“당연하지. 너 사람 볼 줄 모르잖아? 내가 뭘 보고 네 말을 믿겠어. 안 그래? 용사 파티 때만 해도 그래. 너는 라스 그 미친 새끼랑 린 메이지 그년이 정말 용사에 어울리는 인재들이라고 생각해? 용사는 개뿔이 용사야. 신의 가호가 없었으면 사람 구실도 못했을 놈인데. 안 그래?”
그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입술만 움찔 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사딘 룬델이 뭐 순하고 착하다고? 본성은 누구보다 선하다고? 프하하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야. 올 해 들은 말 중에서 진짜 제일 웃겼다! 제일 웃겼어! 너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그래도 누나라고 자신의 동생에 대한 비방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녀가 눈을 부라렸다.
“내가 키우다시피 한 아이다. 당연히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또 어줍잖은 논리를 들이대네? 네 말 대로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잘 알아야겠네? 그럼 탈선하는 아이들도 없겠고? 범죄도 뭣도 안 일어나겠네? 안 그래? 부모가 자식을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해도, 정작 뚜껑을 까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대다수야. 인간은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거든. 그 비밀이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을 만큼 커다라면 커다랄수록 더욱 완벽한 가면을 쓸 테고. 사딘 룬델은 너를 끔찍이 따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누님에게 부정적인 모습, 나쁜 모습 등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 걔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걔가 착하고 선하다? 그딴 새끼가 선하면 이 세상 모든 쓰레기들도 전부 선한 거야. 알아?”
“……그렇지 않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어떤 오해가 있을 것이다.”
“너는 네 가족들과 너희 가문에 대해서는 진짜 하나도 모르는 구나.”
나는 품에서 메모리 크리스탈을 꺼낸 뒤 음성을 재생했다. 사딘 룬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공자님? 프레이 칼리고와 대련을 해서 이기기만 한다면 맥도웰 학부장님의 제자로 추천해주시겠다고요?
-그렇다. 내가 거짓을 얘기하는 걸 봤는가?
-아닙니다. 공자님께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죠!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이참에 확실히 짓밟아 놓겠습니다. 다 무너져가는 백작가의 자식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설치기는. 안 그래도 꼴에 소드마스터의 자식이라고 매사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 믿고 있겠다. 리델. 어차피 머지않아 칼리고 백작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뚝.
재생이 끝났다.
음성을 듣던 테레사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된 것이야.”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도 못 믿겠지? 이래서 너는 안 된다는 거야. 그저 네가 보고 싶은 대로만 판단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감싸려고 하지. 그런 주제에 영웅? 가당키나 하겠어?”
“나는…….”
절망적인 목소리.
나는 더욱 더 강하게 말했다.
“룬델 공작가는 지속적으로 칼리고 백작가를 향해 각종 음해와 공작을 통해 그들을 절벽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가주인 할튼 칼리고의 병세를 악화시킨 장본인 또한 룬델 공작가의 사람이지. 이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나?”
“…….”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국의 영웅에게 독을 주입하고, 그의 자식과 가문을 위협하는 것이 네가 말하는 선인 것인가? 아무런 죄도 없는 인물을 마신숭배자로 몰고, 죽음을 계획하는 것이 네가 말하는 선이냐는 것이다! 대답해라, 테레사!”
탕!
책상을 내리쳤다.
“그들은 예지(叡智)와 개화(開化)의 마신, 단탈리온을 숭배한다. 이 제국에서 마신을 숭배하는 것만으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허나 나 또한 마신을 숭배하는 몸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허나 그들은 선을 넘었다. 마신과의 계약을 대가로 인간들을 제물로 받쳤지. 모든 마신이 인신공양(人身供養)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마신 일 뿐. 그 중에서도 단탈리온은 그 어떤 마신보다 인간을 원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테레사.
“…인간을 받쳤다고? 아버님이…?”
“그렇다. 몇 십, 아니 몇 백, 어쩌면 그 이상의 인간들을 희생시켰을 것이다. 이래도 네가 너의 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착각하지 마라. 너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마귀다. 흑마술사들이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받친다고 믿게끔 만든 쓰레기 같은 족속들이다. 내 선조와 최초의 초월자 살몬이 마신과 계약을 하기 위해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받쳤을 것 같은가? 그것은 흑마술사들 사이에서도 불문율의 금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홀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내가 나긋한 어조로 속삭였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버님이 그럴 리가. 숙부도, 사딘도 전부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룬델 가문은 예전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제국을 수호하던…….”
“그래. 이 정도로는 믿을 수 없겠지. 내가 직접 증거를 확인시켜주겠다. 그러니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판단해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옳고, 그른 것…….”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테레사, 영웅이 되어라.”
“영웅…….”
“그래. 진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끼이이익.
그때, 문이 열리며 라다무스가 들어왔다.
“아이고, 내가 조금 늦었네. 근데…….”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라다무스가 다시 문을 열며 말했다.
“타이밍을 못 맞춰서 온 것 같구먼.”
“아닙니다. 적절하게 잘 오셨습니다. 그럼, 이제 가보죠.”
“거기인가?”
“예. 영감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그곳에 진실을.”
“……그렇지.”
“진짜 용사가 될 우리의 조력자에게도 보여주어야지요. 추악한 진실을.”
라다무스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긴 하루가 되겠구만.”
“지금이라도 빠지셔도 됩니다?”
“……쯧. 이래놓고 빠지면 뭐라고 할 것 아닌가.”
“하하. 잘 아시네요.”
테레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서쪽 숲에 눈 먼 현자.”
“……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라다무스가 테레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갑네. 그쪽이 테레사 룬델인가?”
“그렇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걸세. 지금부터 마주할 진실은 자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찰지도 모르거든.”
“……예.”
“그럼 가시죠.”
하르만 가문의 별채를 빠져나온 우리는 곧장 룬델 공작가의 영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