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공간전이 스크롤을 사용한 우리는 룬델 공작령에 소속된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룬델 공작의 저택과는 약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룬델 공작가(公爵家) 자체가 워낙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었기에 찾는 것이 꽤 어려웠지만 사전에 미리 정보를 모아둔 덕분에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라다무스가 권능을 통해 본 장소.
그리고 푸른달과 72교단의 교인들이 얻어낸 정보들을 조합해 보았을 때 이곳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이외에도 몇 군데가 있겠지만 이곳이 가장 확률이 높다.’
우리는 얼굴까지 뒤덮을 수 있는 로브를 걸친 채 마을 안쪽을 걸었다.
마을은 규모에 비해서 상당히 조용했다. 거리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폐허(廢墟)라고 보기에는 건물들의 상태가 깔끔하고, 곳곳에는 생활의 흔적들이 엿보였다.
“어떤 거 같습니까?”
“확실히 이질적이군.”
“라파엘의 석상을 보셨다고 했죠?”
“그렇네.”
라다무스는 맹인(盲人)이다.
두 눈의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앞을 볼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남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마력(魔力), 마기(魔氣) 혹은 영체(靈體)와 같은 것들.
그를 구태여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그가 가진 권능과 그의 눈 때문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던 테레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곳은…….”
“아는 곳인가?”
“어릴 적에 몇 번 왔던 기억이 있다. 허나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어떤 느낌이었지?”
“그 당시에는 조금 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아이들도 많았고. 허나 지금 이것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한적한 거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창틈 사이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진다.
‘적의(敵意)……. 제대로 찾아온 거 같군.’
때마침 거리를 지나가는 노파가 시야에 들어왔다. 세월의 무게로 인해 굽어진 허리를 두드리며 지팡이를 벗 삼아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나는 노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기. 할머니.”
“…….”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할머니!”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이 근방에 교회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언덕 위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이었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뒤를 돌아 걸어가려고 하자, 노파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할머니?”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다시금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혹시 말을 못 하시는 건가?’
“저 가봐야 되는데…… 이 손 좀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내 손을 쥐고 있는 노파의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제가 저 곳에 안 갔으면 하는 건가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죠?”
“…….”
“저곳이 교회가 아닌가요?”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 곳이 위험한 곳인가요?”
노파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역시 그렇군요. 허나 괜찮습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작정 가는 게 아니라서요.”
노파가 이번에는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나머지 일행들 또한 별 말 없이 내 뒤를 쫓아왔다.
약 5분 정도를 걸었을까.
낡은 대문 앞에 노파가 멈춰 섰다.
아무래도 이곳이 노파의 집인 듯 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내게 손짓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고, 일행들은 밖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내부는 비교적 평범했다.
침대와 식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인형들이 놓아져 있었다.
‘아이가 있나?’
옆을 바라보니 액자에 걸려있는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소년과 노파의 모습이었다.
노파가 차를 내왔다. 식탁에 차를 내려놓은 노파가 내게 손짓했다.
와서 앉으라는 뜻인 듯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입 들이켰다.
레몬향 같은 게 느껴졌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쪽지와 연필을 꺼냈다.
사각. 사각.
그녀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노파가 내게 쪽지를 건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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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무가내로 불려들어 미안합니다. 나는 마리엘이라 합니다.
내게는 사랑하는 손자가 있습니다. 손자의 이름은 룩산. 아주 영특하고 바른 아이입니다.
손자는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산에 약초를 캐러 다녔습니다.
허나 며칠 전부터 내 손자가 보이지가 않습니다.
마을 전부를 뒤져보았지만, 손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주민들도 손자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남은 것은 저기 언덕에 있는 교회 뿐 입니다. 전능하신 라파엘의 교인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저곳은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 마을에는 원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아주 많았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곳이 마을에 들어선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어머니 등등. 어느새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높으신 분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나는 내 손자를 찾아야 합니다. 염치가 없지만 혹시 교회에 가게 되면 우리 룩산이 있는지 한 번만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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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금 두서가 없는 글이었지만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덕분에 마을 분위기가 왜 이런 건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사라진 손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은 안타깝지만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
내 예상이 맞다면 노파의 손자는 이미…….
“손자 분…….”
차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노파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은화 2개가 쥐어져 있었다.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결국 나는 아이를 찾겠다고 해버렸다.
노파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그녀가 쥐어준 은화를 돌려주었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어차피 거기에 가야 될 사람이니까요.”
노파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다시 손에 쥐어주려 하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괜찮습니다. 손자 분 찾으면 이곳으로 올 테니 괜히 밖에 나오지 마시고 집에서 쉬고 계세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급하게 노파의 집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뢴달이 말했다.
“드디어 나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표정이 안 좋군.”
“별 거 아니야. 가자.”
“교회는 왜 가는 거지?”
“와보면 알아.”
우리는 언덕을 올라 노파가 알려준 건물로 향했다.
앞에 도착하자 선하게 생긴 교인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반갑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기도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 아쉽게도 오늘은 운영을 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할 예정입니다만.”
교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그러셨군요?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제가 오해를 했네요.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는 그를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지만 직접 안으로 들어오니 웬만한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넓이였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헌금함 앞에 도착했다. 그 뒤편에는 거대한 석상이 놓아져 있었다.
나는 품에서 은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며 주변을 살폈다.
‘최소 30명…….’
이 방 안에만 못 해도 30명이 넘는 인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계속해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게 주머니를 건네받은 교인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라파엘님께서도 형제님의 신앙심에 감동할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일행들 또한 나와 같은 동작을 취했고, 그것을 본 교인은 주머니를 들고 뒤쪽으로 사라졌다.
기도를 하는 척 하며 작게 속삭였다.
“영감님. 보이십니까?”
“그래. 저 앞쪽에서 이질적인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구만. 보아하니 공간 마법으로 주변 일대를 비틀어놓은 듯 하네.”
라다무스가 말한 앞쪽은 석상이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듯 했다.
“준비하시죠.”
“알겠네.”
나는 마기를 응축시켜 오른손에 창을 생성했다.
그리고는 눈앞에 석상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콰앙!
석상이 부서지며, 방 전체가 흔들렸다.
그러나 내 눈에는 막다른 벽만 보일 뿐. 다른 어떤 장소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일세.”
이번에는 마기를 응축시킨 창에 강화 마법을 부여했다.
“강화(强化).”
최근 들어 마기와 마법의 동시 운용을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다시 한 번 막다른 벽을 향해 창을 던졌다.
굉음과 함께 공간의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동굴 입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여기였군.”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님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어느새 30명이 넘는 교인들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게 돈 주머니를 받아간 교인이 흉흉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대답… 안 하십니까?”
대답이고 뭐고, 이미 손에 든 무기부터 노골적으로 뿜어내는 살기까지 어딜 봐도 우릴 죽일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저 안쪽에는 뭐가 있지?”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대답하기 싫나 보군. 하긴, 그걸 말하면 너희들 스스로 인신공양을 하고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입을 다물 수밖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걸 어떻…….”
서걱!
“……게.”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사내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30명의 교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층 강해진 뢴달과 그의 정예 살수들이 순식간에 죽여 버린 것이다.
“잘했다. 뢴달.”
“다음부터는 미리 좀 얘기해주면 안 되나?”
“알아서 눈치껏 잘하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석상 뒤편의 공간으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코를 찌르는 악취.
시체 썩은 내였다.
안쪽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옮겨.”
“하아… 우리가 이런 짓까지 해야 돼?”
“잔말 말고 빨리 해. 선배들 말 못 들었어? 여기서 딱 한 달만 뺑이 치면 인생 핀다잖아.”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옮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의 갑옷에는 검이 왕관을 꿰뚫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룬델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자, 봐라. 테레사. 너희 가문의 추악한 진실을.”
그 광경을 본 테레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문의 문양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체들을 옮기는 수많은 기사들 뒤편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숙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