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제논 룬델이 나와 일행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뢴달 하르만 백작과 푸른달. 서쪽 숲에 눈먼 현자 라다무스. 그리고 지그하르트의 후손까지. 익숙한 얼굴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군. 전부 네놈이 꾸민 짓인가, 자일 지그하르트?”
“그래. 이런 곳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설마 라파엘 교단의 영역 아래 마신의 제단을 숨겨놓았을 줄이야.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나쁘지 않았어. 그래, 누가 성스러운 교회 안에 마신숭배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겠어? 대단해. 배짱도 좋아.”
일반적으로 교회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영역이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교회 내부에 이러한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
그들 또한 이런 점을 노리고 구태여 교회 안쪽에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일 테지.
“하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어차피 끝난 마당에 솔직하게 애기해주지. 네놈 말이 맞다. 영웅의 후예여. 라파엘 교단 놈들도 설마 자신들의 영역 내에 마신숭배자들을 위한 제단이 설치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을 테지. 그들의 신앙심은 광기(狂氣)와도 같으니. 그러한 생각조차 불경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점을 노리고 이곳에 제단을 꾸렸지. 우리의 신, 단탈리온 님을 위해 말이야. 근데 이렇게 허무하게 노출 될 줄이야. 영웅의 핏줄은 핏줄이라 이것인가? 대체 이곳에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지?”
나는 품에 있는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나의 눈동자에 마나가 깃들며 자주색 불꽃이 일렁였다.
“감이다.”
“감? 재미난 소리를 하는 구나. 그래. 그 감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마. 허나 뭘 어쩌겠는가?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고, 너희들을 지켜줄 잘나신 라파엘 교의 성직자들마저도 전부 우리의 사람들인 것을. 지금 내가 네놈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주는 것 또한 그저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 저승길 노잣돈 대신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그가 상당한 경지에 오른 기사인 것은 맞지만, 그의 자신감은 본인의 무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둘러싼 수 십 명의 기사들.
하나, 하나가 최소 6서클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제국 최고의 검가(劍家)라고 불리는 룬델 공작가의 정예 병력들.
그 중에서는 흑색 갑옷을 차려 입은 이들도 있었는데,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흑기사들이었다.
명실상부 룬델 공작가의 최고 전력이라 볼 수 있는 8명의 기사.
그중 2명이 이곳에 있었다.
모든 게 완성된 각본처럼 우리가 이곳에 올 걸 대비하여 미리 병력들을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단탈리온의 권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작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그 위대하신 흑기사들까지 대동한 것인가?”
“하하. 우리 가주께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장 싫어하시거든. 하물며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너희 같은 버러지들을 상대로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굳이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래. 그 말이 맞지. 괜히 애매하게 굴었다가는 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내 말을 들은 제논 룬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감당…? 우리 룬델 공작가가 말이냐? 푸하하하하하! 아까부터 재미난 얘기를 하는 구나.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핏줄을 믿고 까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네놈이 무엇을 준비했든,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정해진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연 그럴까? 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은 그에게 물어볼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 쌓여있는 수많은 시체들. 그 중에서는 이 마을의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그래. 이 마을의 주민들은 단탈리온 님을 위한 귀중한 양식들이다. 그들이 룬델 공작가의 영지에서 편히 잠을 자고, 편히 밥을 먹고,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이것들을 위한 안배지. 버러지 같은 평민들이 단탈리온님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테레사는 완전히 죽어버린 눈동자로 주변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제단 위에 시체들.
제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가족들일 것이다.
어림잡아도 수 백이 넘는 인간들이 단탈리온의 제물이 되었다.
고작 마신을 숭배하고, 힘을 얻겠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 마을 자체가 인신공양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아니었지. 허나 이만큼 적합한 마을이 없기에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그저 순순히 단탈리온님의 양식이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인 것이지.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이런 식으로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값진 희생인가?”
테레사가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야.”
“언제부터지? 마신을 숭배하게 된 게?”
계속된 내 질문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제논 룬델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어차피 죽을 놈들이라 생각해서 호의를 베풀었건만 무언가 꾸미는 게 있는 것 같구나?”
나는 수정구에 마나를 거두며 피식 웃었다.
“이야. 그걸 이제야 눈치 채? 대단하다. 그러니까 형한테 밀려서 가주가 못 되지. 나 같아도 너 같은 놈한테 가주 자리 안 주겠다. 그렇게 눈치가 없는데 누가 너를 좋아하겠냐? 안 그래?”
제논 룬델의 얼굴은 평온한 듯 보였으나 그의 입가가 미묘하게 꿈틀 거렸다.
“……버러지 같은 것이 명을 재촉하는군. 유희는 끝이다.”
그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며, 전신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화르르르륵!
“룬델의 검이여──! 저 버러지들을 척살하라!”
처억!
일제히 검을 뽑아드는 기사들. 그중 몇몇에게는 미약하지만, 마기가 느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뢴달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자일 지그하르트. 설마 이렇게 끝은 아니겠지? 이번에도 뭔가 준비한 게 있으니 그렇게 자신 있는 표정을 보여주는 걸 테지?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막무가내로 온 건 아닐 테지? 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며 우리보고 이놈들을 상대하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
간절함이 느껴지는 어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어? 너 설마…… 아무 준비도 안 한 거냐?”
“응.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
“뭐. 어쩌겠어. 죽기 싫으면 싸워야지.”
“저 많은 룬델의 기사들과 싸우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그러냐?”
“그럼 죽어. 죽으면 내가 언데드로 만들어서 평생 부려먹어 줄 테니까.”
“……이 악마 같은 새끼.”
“칭찬 고맙고.”
일렬로 줄지어선 기사들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은 마치 서로가 한 몸인 듯 했다.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함께 해왔는지 엿볼 수 있었다.
뒤편에 있던 라다무스가 살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여기까지는 자네의 예상대로 됐구먼. 그럼 이제 어쩔 셈인가?”
“제논 룬델이 열심히 지껄여준 덕분에 쓸만한 증거는 전부 확보했고, 전송도 잘 이루어졌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지금부터 청소를 해야죠.”
“마땅한 방법이 있는가?”
“미래는 저들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들은 단탈리온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리 병력들을 준비해놓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뿐 만이 아니다.
눈먼 숲의 현자. 라다무스.
그 또한 단탈리온의 저주, 다르게 말하면 마신의 가호를 받은 인물이다.
그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서로가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정보의 우위.
나는 그들이 단탈리온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 것을 예지하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할 것이라는 것도 예측했다.
예측의 예측.
나는 들뜬 미소를 지으며 몸에 깃든 마기를 눈 쪽으로 집중시켰다.
자색 눈동자에 마기가 깃들며 점차 검보랏빛으로 변모했다.
뒤이어 동공이 세로 형태로 바뀌며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호메로스의 눈동자.”
지옥에 거주하는 수많은 악마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괴짜라고 불리는 악마 대공(大公) ‘호메로스’,
그의 눈동자를 본떠 만든 흑마술.
능력은 간단하다.
내가 보는 시야를 남들에게 공유하는 것.
그 와중에도 푸른달의 살수들은 힘겹게 기사들을 막아서고 있었으나 전황은 금세 불리해졌다.
제논 룬델은 자신이 끼어들 가치도 없다는 듯 멀리서 이 광경을 관망할 뿐이었다.
기사 한 명의 목을 날려버린 뢴달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일 지그하르트! 가만히 서서 뭐하는 것인가! 뭐라도 해보란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입에서 마기가 깃든 언어가 현현했다.
“좌표지정(座標指定).”
──촤르르르륵!
내 몸에서 뻗어 나간 마기가 순식간에 동굴 전체를 뒤덮었다.
이변을 감지한 기사들이 당황한 틈을 놓치지 않고 푸른달의 살수들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서걱! 서걱!
사방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리며, 선혈이 낭자했다.
깜짝 놀란 제논 룬델이 다급히 소리쳤다.
“…네, 네놈이 어째서 마기를 다루는 것이냐!”
나는 그 말을 무시한 채 묵묵히 흑마술을 발동했다.
“전이(轉移).”
동굴 바닥 곳곳에 피로 물든 육망성(六芒星)이 새겨졌다.
뒤이어 주변 일대의 공기가 거세게 요동쳤다.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지며, 내 몸에서 뻗어져 나간 마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이윽고 흑마술이 완성됨과 동시에 바닥에 새겨진 육망성들이 일제히 빛을 뿜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 뭣들 하느냐! 당장 막아! 막으란 말이다!”
뒤늦게 위기를 느낀 제논 룬델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흑마술은 발동된 이후였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으로부터 검은 로브를 걸친 수 백 명에 흑마술사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는 내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동굴 전체가 떠내려갈 정도로.
“72교단의 주인이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72교단의 주인이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72교단의 주인이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가장 선두에 선 교인을 바라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교주님. 그동안 어디서 뭘 꾸미고 있나 했더니 이렇게 근사한 이벤트를 준비해주셨네요?”
나는 이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사장. 명령이다.”
“뭐든 말씀 하십시오. 교주님.”
저 멀리서 경악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논 룬델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쓰레기들을 전부 치워라.”
“명을 받듭니다.”
뒤이어 교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명을 받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