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이리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라,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하신 검귀 맥도웰 선생님 아니야? 검에 미쳐있던 살인귀가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더니 여기서 다 보네?”
맥도웰의 미간이 움찔했다.
적나라한 도발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그는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라파엘의 사자(使者)들이여. 그 아이를 내려놓는 게 어떻겠는가? 그 아이는 우리 살로몬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네. 제 아무리 청십자회(靑十字會)라 하여도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그 아이를 데려가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 않는가?”
아이리가 조소를 터트렸다.
“하? 그럼 우리가 너희들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 이교도를 잡는 일에 우리 교단이 언제부터 아카데미의 눈치를 봤다고 그러는 것이지?”
“그 아이는 이교도가 아닐세. 스승인 내가 보장하도록 하지.”
“풉! 네가 보장하겠다고?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할까? 이 새끼가 이교도가 맞다는 데에 내 모가지를 걸겠다. 어때? 너도 네 머리통을 걸 수 있나?”
맥도웰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선을 넘는 군. 그래. 내 목을 걸도록 하지.”
웃음을 터트린 아이리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말했다.
“하하하하! 진짜 네 목숨을 건다고? 이거 진짜 뭐가 있긴 있나보네? 그 검귀가 직접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보호하려 들다니 말이야. 이미 이 새끼가 마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확보했다. 증인도 여기 있거든. 그러니 지금 당장 네 모가지를 내놓아야겠어.”
맥도웰이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의 손도 어느새 허리춤에 가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대가 그대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닌가 보군.”
“증인이 있다니까 뭔 개소리야. 자꾸.”
“증인이 누구지?”
아이리가 프레이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 이 예쁜이지.”
맥도웰의 시선이 프레이에게로 향했다.
“……프레이 칼리고. 그대가 증인인가?”
당황한 프레이가 말했다.
“예…….”
“그대가 직접 보았는가? 사딘 룬델 저 아이가 마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딘 공자는 저를 향해 흑마술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맥도웰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에 자네의 목숨을 걸 수 있겠는가?”
프레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본 것에 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겁니까? 저는 피해자입니다!”
“피해자인 척 하는 가해자일지도 모르지. 사딘 룬델은 내 제자일세. 내 아이가 흑마술을 사용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네. 그 사실은 내가 보장하지. 나는 이 아이가 어떤 음모에 휩싸였다고 생각할 뿐이야. 누구보다 검에 대해 강한 열망을 품고 있는 아이일세. 또한 그가 속한 룬델 가문은 제국의 건국 이래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백성들을 수호하던 유서 깊은 가문이지. 그런 그가 마신숭배자라……? 정말 질 나쁜 농담이로군.”
아이리가 프레이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킥킥거렸다.
“나이를 쳐 먹어서 그런가. 귀까지 맛이 갔나 보네? 그치? 아주 지 할만한 하고 말이야. 어차피 답은 정해놨으면서 왜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모르겠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이 새끼는 내 새끼니까 마신숭배자든 아니든 네들이 데려가는 꼴은 못 보겠다고.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뻐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구만. 안 그래, 토미?”
토미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자매님.”
맥도웰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설령 마신숭배자라는 의혹이 있다 하여도 아카데미의 허가도 없이 우리의 학생을 강제로 구금하고, 이송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네.”
아이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녀가 살벌한 눈빛으로 맥도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씨X. 노인네 말 많네. 너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학생들을 싸고 돌았다고 지랄이야 지랄은. 높으신 집안의 자제라 그런지 날파리가 존나게 꼬이네? 응? 그렇게 허락이 필요하면 지금 네가 허락해주면 되잖아. 안 그래?”
“……말이 안 통하는 군.”
“나도 마찬가지야. 솔직히 말해서 한 번쯤은 네 새끼랑 붙어보고 싶었거든? 근데 내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엮일 일이 별로 없더라고. 근데 마침 잘 됐네.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네놈도 마신숭배자 놈들이랑 붙어먹은 거 같은데. 이 참에 한 번 싸워보자고. 네 칼에 뒤진 년놈들이 세 자릿수가 넘어간다며? 그 잘나신 검귀(劍鬼)께서 얼마나 강한지 나도 한 번 느껴보자.”
맥도웰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는 수 없군. 광신도들에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단심문관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데려가 강제로 고문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소. 억울하게 함정에 빠진 제자를 구하는 것 또한 스승의 몫이지. 오늘 일어난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아마 이사장님께서도 아시게 되겠지.”
“이사장 아슈타르? 지금 네 빽이 초월자라고 겁주는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엄마한테 이른다고 하면 내가 겁 먹을 줄 알고? 킥킥. 미안하지만 우리 아빠도 초월자인데? 나도 회주(會主)한테 이를 거야~ 토미, 우리 회주가 강할까? 아슈타르가 강할까? 나는 우리 회주한테 한 표. 그 양반 진짜 괴물이잖아.”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던 토미가 이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저도 회주님에게 한 표 던지겠습니다. 아슈타르 님을 직접 본 적은 있지만 회주 님 만큼 강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어요.”
맥도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저런 정신 나간 인간들이 라파엘교의 사냥개를 자처하니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그의 옆에 있던 흑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맥도웰 경.”
“당연한 것일세. 사딘 그 아이는 내가 아끼는 제자니까. 우리 막내가 억울한 모함에 휩싸였는데 스승으로서 어찌 가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투기를 끌어올리며 자세를 잡은 아이리가 비꼬듯 말했다.
토미 또한 미소를 유지한 채 검을 치켜들었다.
“미친 새끼들. 서로 아주 물고 빨고 잘~ 한다. 내가 미친 건 어느 정도 인정하거든? 근데 마신숭배자 놈들을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내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단 말이야~ 근데 사딘 이 새끼한테서는 마신숭배자 놈들의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 그리고 너희들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말해봐. 네들도 전부 마기 다룰 줄 알지?”
“자매님의 코가 개코란 사실은 저도 인정합니다. 형제님들도 어서 빨리 죄를 고하세요. 그러면 주신께서도 용서해주실 겁니다.”
흑기사와 맥도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또라이들이로군.”
“제정신 아닌 놈들과 길게 대화를 나눠봤자 의미 없습니다. 빠르게 끝내고 돌아가시지요. 뒷일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네.”
아이리 또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토미. 저 늙은이는 내가 맡는다. 나머지는 네가 처리해.”
“알겠습니다, 자매님.”
──그때였다.
토미가 쥐고 있던 메모리 크리스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뭐야, 연락 온 거야?”
“그런 듯 합니다.”
아이리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하아… 하필 이 타이밍에…. 에이, 쩝. 야. 너네 잠깐 휴전. 아니,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휴전이 아니라 아, 모르겠고! 일단 이거 먼저 보고 결정하자고.”
느닷없는 발언에 흑기사와 맥도웰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아이리가 짜증이 가득한 어조로 소리쳤다.
“일단 이거 보고 판단하자고! 너네도 이거 보면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게 될 거야. 나도 이거 보고 만약 이상한 게 있으면 사딘인지 뭔가 하는 새끼 너네한테 돌려줄게. 그러니까 일단 먼저 보자고. 알겠어? 너네도 괜히 피 보고 싶지 않을 거 아니야. 막말로 자신 있어? 검귀 노친네랑 흑기사 너희들이 암만 강하다 해도 우리를 쉽게 죽일 수 없을 걸? 그리고 일이 커지면 우리 측 사람들도 몰려 올 거야. 너희도 그걸 원하진 안잖아? 그러니까 우선 이걸 보고 결정하자고. 오케이?”
“…….”
갑작스레 돌변한 그녀의 태도가 너무 뻔뻔하여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허나 그녀의 말처럼 피를 보지 않고 사딘을 데려갈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가 무엇을 보자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 말도 안하는 거 보니까 동의한거지? 오케이 그럼 튼다. 토미. 재생해.”
“네. 자매님.”
토미가 품에서 꺼낸 수정구에 마나를 신성력을 불어넣자,
허공에 어떠한 장면들이 영사되기 시작했다.
위치는 어느 동굴.
그곳에는 룬델 공작가의 수많은 기사들과 제논 룬델, 그리고 자일 지그하르트 일행이 있었다.
장면과 함께 음성이 재생됐다.
-우리가 올 것이라는 사실은 가주가 알려주던가? 단탈리온의 권능을 이용해서?
-네놈……. 전부 알고 있었구나……?”
-그래. 이런 곳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설마 라파엘 교단의 영역 아래 마신의 제단을 숨겨놓았을 줄이야.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나쁘지 않았어. 그래, 누가 성스러운 교회 안에 마신숭배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겠어? 대단해. 배짱도 좋아.
-하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어차피 끝난 마당에 솔직하게 애기해주지. 네놈 말이 맞다. 영웅의 후예여. 라파엘 교단 놈들도 설마 자신들의 영역 내에 마신숭배자들을 위한 제단이 설치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을 테지. 그들의 신앙심은 광기(狂氣)와도 같으니. 그러한 생각조차 불경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점을 노리고 이곳에 제단을 꾸렸지. 우리의 신, 단탈리온 님을 위해 말이야. 근데 이렇게 허무하게 노출 될 줄이야. 영웅의 핏줄은 핏줄이라 이것인가? 대체 이곳에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지?
-감이다.
-감? 재미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 그 감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마. 허나 뭘 어쩌겠는가?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고, 너희들을 지켜줄 잘나신 라파엘 교의 성직자들마저도 전부 우리의 사람들인 것을. 지금 내가 네놈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주는 것 또한 그저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 저승길 노잣돈 대신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하하. 우리 가주께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가장 싫어하시거든. 하물며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 너희 같은 버러지들을 상대로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굳이 후환을 남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흑기사가 메모리 크리스탈을 부수기 위해 돌진하려 하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리가 재빨리 소리쳤다.
“토미!”
“예.”
토미의 검이 사딘의 목덜미에 닿아있다. 아이리가 승리했다는 얼굴로 흑기사에게 말했다.
“네가 아끼는 공자님 모가지가 썰리는 것 보고 싶지 않으면 뒤로 가서 영상이나 마저 보지 그래?”
투구 속에 흑기사는 이를 바득 갈며, 뒤쪽으로 걸음을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됐다.
제논 룬델의 호탕한 웃음소리.
-감당…? 우리 룬델 공작가가 말이냐? 푸하하하하하! 아까부터 재미난 얘기를 하는구나.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핏줄을 믿고 까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네놈이 무엇을 준비했든, 무슨 짓을 하건 간에 정해진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제단 위에 쌓여있는 수많은 시체들. 그 중에서는 이 마을의 주민들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그래. 이 마을의 주민들은 단탈리온 님을 위한 귀중한 양식들이다. 그들이 룬델 공작가의 영지에서 편히 잠을 자고, 편히 밥을 먹고,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이것들을 위한 안배지. 버러지 같은 평민들이 단탈리온님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이 마을 자체가 인신공양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아니었지. 허나 이만큼 적합한 마을이 없기에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그저 순순히 단탈리온님의 양식이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인 것이지.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이런 식으로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값진 희생인가?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영상의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탓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단 한 명.
아이리만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정적을 깨며 그녀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어라……? 마신숭배자들이 여기 다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