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킥킥. 어디 그 잘난 주둥이 한 번 열어보시지 그래? 이래도 아니라고 우길 거야? 저기 저 영상 속 인물. 느그 가주 동생 아니야? 내가 잘못 봤나? 응?”
“…….”
룬델 기사단과 맥도웰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흑기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신속히 판단을 내려야한다. 이 자들을 제압하고, 도련님을 데려가기에는…….’
그때, 깜짝 놀란 토미가 아이리에게 말했다.
“자매님! 지금 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토마스 추기경님 직속 청십자회 전원 룬델 공작가로 향하라는 명령입니다. 작전 내용은 룬델 공작가 내 모든 이교도(異敎徒) 섬멸 되겠습니다. 주요 인물들은 최대한 산 채로 잡아 오랍니다.”
“산채로 잡아 오라고? 염병할.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내리셨구만. 그 괴물 같은 놈들을 어떻게 산 채로 데려와? 우리 목숨도 간당간당한데.”
“에이. 자매님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위험한 건 자매님이 아니라 저 포함 다른 형제님들이죠.”
“뭐래, 제일 괴물 같은 게.”
그들의 말을 들은 흑기사의 투구 속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룬델 기사단 전원! 지금 당장 가문으로 복귀한다!”
그 틈을 놓칠 아이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신체를 아득히 뛰어넘은 반사신경을 발휘한 그녀가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공간전이 스크롤을 찢는 것이 더욱 빨랐다.
부욱!
스크롤이 찢어지며, 흑기사를 포함한 룬델 기사단 전원이 모습을 감췄다.
눈앞에서 표적을 놓친 아이리가 짜증나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쩝. 패가 까발려지니까 도련님이고 뭐고 없구만. 그냥 버리고 갈 줄이야.”
“도련님을 데려간다 한들 본진이 박살나면 아무 소용없으니까요. 저 같아도 저런 선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아이리의 시선이 홀로 남은 맥도웰에게로 향했다.
“어이 노친네. 아까 뭐라고 했지? 토미 등에 있는 저 새끼가 마신숭배자가 아니라는 데에 당신 모가지를 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내가 잘못 들었던가?”
이미 시동이 걸린 아이리였다.
흑기사와 기사단을 놓쳤으니 눈앞에 있는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으드득, 으드득 소리와 함께 몸을 푼 아이리가 맥도웰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대답 좀 해보지 그래?”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맥도웰은 뽑아든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며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해를 한 것 같구만. 그 아이가 정녕 마신숭배자였을 줄이야…… 나는 정말 몰랐다네.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예상치 못한 태도에 아이리가 당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당연히 덤벼들 거라고 예상했던 그녀였다.
허나 상대가 먼저 잘못을 시인하고, 저자세로 나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하! 이제 와서 잘못을 인정한다고? 본인이 내뱉은 말은 지키셔야지 검귀 양반. 목숨을 걸겠다고 했잖아?”
맥도웰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더니 수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사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인 건 알고 있네만 나는 솔직한 사람일세. 내 잘못을 인정하지. 내가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 같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어 이 늙은이의 실수를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아이리가 씩씩 거리며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 방금까지 살기를 뿌리던 양반이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 같으니까 사과를 한다고? 영감 눈에는 우리가 병신으로 보이지? 응? 그냥 그렇게 사과하면 아, 그러시구나~ 하고 용서해줄 줄 알았어? 지금 당장 검 뽑아. 안 그러면 당신 머리통이 바닥을 구를 거야.”
“……할 말이 없네. 진심으로 미안하네. 내가 어리석었어. 그 아이는 내 막내 제자일세. 말년에 얻은 제자인 만큼 내게는 자식 같은 존재라네.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녀석이 마신숭배자일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네.”
“가식 떨지 마! 이 개X끼야! 내가 네놈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어디서 같잖은 연기를 하고 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봐. 검귀. 너도 마신숭배자잖아? 그치?”
멱살을 잡힌 맥도웰이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증거 있는가?”
“뭐?”
“내가 마신숭배자라는 증거가 있냔 말일세. 내가 그 아이를 옹호한 건 사실이네만 그것이 내가 마신숭배자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마신숭배자가 아니라네. 주신 라파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맥도웰의 멱살을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쓰레기 같은 놈이.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고귀한 이름을 담지 마라.”
이쯤되면 어떠한 반응이라도 보일 만 하건만 맥도웰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정말 나와 한 번 해보겠다는 건가?”
“그래. 이 새끼야. 네놈의 그 당당한 낯짝이 마음에 안 들거든. 구린내 풀풀 풍기는 주제에 겉으로는 온화한 척, 고귀한 척 아양 떠는 그 모습이 존X게 역겹단 말이야. 이 씨X새끼야.”
“정녕 그게 그대의 바람이라면 들어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만…… 시간이 없는 것은 내 쪽이 아니라 그대들 인 것 같은데?”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뒤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토미가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그렇습니다. 자매님. 저도 자매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자가 마신숭배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할애할 시간조차 없지요.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형제님들 또한 출발하셨을 겁니다. 형제님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자매님도 아시다시피 룬델 공작가는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저희가 합류해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맥도웰이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늙은이의 머리통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냈다.
멱살을 놓아준 아이리가 적나라한 살기를 풍기며 경고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근 시일 내에 반드시 네놈을 찾아가 네놈이 숨기고 있는 것들을 낱낱이 파헤쳐주마. 검귀.”
맥도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있겠네. 신의 사자여.”
휙 돌아선 아이리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가자! 토미! 저 개X끼 얼굴 더 보고 있다가는 화병으로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으니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매님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일은…….”
“어우, 그놈의 입 좀 닥쳐!”
“하하, 알겠습니다. 자매님. 그럼 바닥에 있는 형제님과 프레이 형제님은 어떻게 할까요?”
바닥에 내팽개쳐진 사딘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가 말했다.
“일단 이 새끼는 챙기고, 얘는 보내자. 소드 마스터의 자식이라고는 해도 아직 학생이야.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데려갈 수는 없지.”
솔직히 말하면 프레이 또한 그곳에 가고 싶었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왜 거기 있는 것인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또 그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전부 본인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허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의 생사여부(生死與否)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프레이.”
“네.”
“너도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지금 우리 사정이 여의치가 않거든?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가고, 나중에 참고인 조사 할 때 부르면 그때 와서 조사 받아.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아이리가 아직까지 제자리에 서 있는 맥도웰을 힐끔 본 뒤 프레이에게 말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도중까지만 우리랑 같이 갈래?”
“괜찮습니다. 저도 지금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나름 그녀 딴에는 호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프레이가 직접 거절하였으니 두 번은 없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고.”
“네.”
프레이는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전신에 마나를 두른 채 가공할 속도로 발을 내딛었다.
숲 안쪽을 가로질러 자신의 저택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프레이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맥도웰은 프레이가 사라진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검귀.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빨리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어. 네놈이 가야 내가 움직일 거거든.”
“분명 시간이 촉박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건 네가 알바 아니고.”
그렇게 약 5분여간 기 싸움을 하던 둘.
결국 포기하고 발걸음을 옮긴 것은 맥도웰이었다.
저 멀리 사라지는 맥도웰을 바라보던 아이리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퉤. 병X 같은 새끼. 객기 부리기는. 가자, 토미.”
“역시 자매님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된다니까요.”
“조용히 해라.”
“네!”
* * *
제논 룬델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의 형이자, 룬델 공작 가(家)의 가주인 다곤 룬델은 단탈리온의 계약자다.
그것도 마신의 선택을 받은 직접 계약자. 일반적인 신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인간을 좋아하는 단탈리온의 특성 상 그의 취향에 맞는 제물들을 받치기만 하면 계속해서 힘을 내려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래의 편린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날 수 있었다.
지금껏 그 미래가 틀린 적은 없었고, 오늘도 그랬어야 할 터였다.
분명, 저들이 이곳에 오는 것까지는 예측했다.
그렇기에 역으로 함정을 파 병력을 미리 대기 시켜놓았다.
거기까지는 완벽했다.
최근 들어 감히 룬델 가의 정보를 캐려는 무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번 미끼를 통해 싸그리 박멸시킬 생각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조카와 영웅의 일족인 지그하르트, 그리고 제국의 밤이라 불리는 하르만 백작가문이 엮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 형이 본 미래대로라면 저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그 시체를 단탈리온 님의 제물로 받치게 될 터였는데…….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광경은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대체 저 놈이 어떻게 흑마술을 사용하는 거란 말이냐!’
영웅의 후예라 불리는 지그하르트의 꼬마가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심지어 그 마기는 지금껏 그가 봐왔던 어떠한 인물들보다도 짙고, 강렬했다.
거기에 그가 불러낸 수많은 흑마술사들은 어떠한가.
숫자도 숫자지만 개개인이 모두 뛰어난 흑마술사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좀비처럼 달려드는 모습은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들 중에서도 고위 흑마술사로 보이는 인물들은 흑마술을 다루는 능력이 궤를 달리했다.
마기로 만든 거대한 뱀이 전장을 휩쓸고, 온갖 저주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기사들이 휘두른 검날에 옆에 있던 동료의 머리통이 날아가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구심점이 바로 저 청년이었다.
검을 뽑아든 제논 룬델이 악귀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일 지그하르트…….”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대한 오러(Aura).
냉기가 깃든 오러가 점차 강해짐에 따라 주변 일대에 새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저놈 때문이다. 저놈 하나만 없어진다면 모든 게 해결 될 것이야.’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든 제논 룬델.
한 번의 도약으로 어찌나 높이 뛰는 것인지 마치 하늘을 날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의 검에 깃든 오러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그가 무투기(武鬪技)를 펼치기 시작했다.
룬델 검술.
제 1식(式).
“──서리벼락.”
자일 지그하르트를 향해 세상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한기를 머금은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