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빠르다!’
검을 뻗는 그 순간에도 프레이는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지하고 있었다.
과거에 그녀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베였겠지만 최근 들어 급격한 성장을 한 덕분에 일련의 순간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
허나 그것 뿐 이었다.
인지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한들, 과거 검귀라 불리던 맥도웰과 그녀의 실력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챙!
불꽃이 튀기며 금속음과 함께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예리한 검날.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만이었다.
찰나에 순간, 어둠속에서 튀어나온 로만이 맥도웰의 검날을 쳐냈다.
맥도웰이 당황과 분노가 공존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식사를 방해받은 짐승 같은 얼굴이었다.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불청객인가.”
프레이 또한 놀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그 뒤에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프레이 또한 그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인지, 무슨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신의 무력한 현실이 답답할 뿐.
“청십자회 소속 성기사들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습니다.”
그들로 인해 왜 접근이 힘들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한가하게 그런 질문을 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들 중 가장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던졌다.
“아……. 네. 조심하십시오. 저 자는 살로몬 아카데미의 기사학부를 책임지는 학부장입니다. 일반적인 기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괜찮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나아간 로만의 단검이 맥도웰의 허리춤으로 쇄도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궤적을 따라 잔상이 새겨졌다.
챙! 챙!
맥도웰 또한 폭풍처럼 쏟아지는 로만의 일격을 전부 받아내었다.
로만은 쌍검.
맥도웰은 장검.
리치 차이가 명백했기에 로만은 최대한 가까이 붙기 위해 애를 썼고,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맥도웰 또한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다.
경지에 오른 두 사내의 검술은 프레이의 눈으로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단 한 번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장면들이 그려진다.
허초와 살초가 뒤섞인 높은 수준의 생사결(生死決).
바로 눈앞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프레이 또한 실시간으로 성장 중이었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오러가 깃든 검날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1초.
아니 0.5초.
그 짧은 순간 동안 맥도웰의 가슴, 옆구리, 허벅지를 노렸고.
‘명성이 거짓은 아니군. 이 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힘을 아끼고 있다.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하려 하는 것이겠지.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 내 목적은 제거가 아닌 보호. 틈을 봐서 그녀와 함께 탈출해야 한다.’
맥도웰은 그 모든 공격들을 쉽게 받아쳤다.
“이 검술은…… 푸른달의 살수인가?”
“…….”
“허나 내가 알던 푸른달의 살수들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군. 정체가 무엇이지?”
“…….”
“과묵한 친구군.”
표정이 돌변한 맥도웰의 전신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흉흉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변을 감지한 로만이 그가 무투기를 사용하지 못하기 위해 끈질기게 덤벼들었지만, 그동안 살아오며 수 백, 수 천 번의 무투기를 사용한 그에게 있어 로만의 발버둥 따위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검을 휘두르는 것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
무투기를 발동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마나를 두르고, 마나를 방출하는 것 따위에 집중력을 할애할 만큼 경험이 적은 기사가 아니다.
비록 초월자들에 비하면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서는 최강의 반열에 들어서는 기사.
그것이 과거 대륙 전체에 악명이 자자했던 검귀(劍鬼), 맥도웰이었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내 식사를 방해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겠지.”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는 묵색(墨色) 오러.
그 여파로 인해 공간 전체가 거칠게 요동친다.
이내 그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하나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격에 다른 오러 마스터들은 모두 고유한 오러(Aura)의 색깔과 형태 그리고 그에 걸 맞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다.
그들의 무의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극한의 오러.
그것을 우리는 발현(發現)이라고 부른다.
맥도웰의 발현은 전신을 뒤덮는 갑옷이었다. 묵색의 오러로 이루어진, 파괴적이고 거친 형태의 갑옷.
맥도웰 식(式) 검술 제 2형(形).
“귀참살(鬼慘殺).”
맥도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기(鬼氣)를 보며 로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피할 수 없다.’
정확히는 자신 혼자라면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허나 자신이 피하게 된다면 뒤에 있는 프레이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받아치는 것 뿐.
그가 쥐고 있는 두 개의 단검에 푸른 오러가 집중되더니 이내 허공으로 퍼지며 원 형태의 모습을 갖추었다.
로만의 입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음성과 함께 그의 검이 허공 위를 수놓기 시작했다.
“──달 가르기.”
두 개의 무투기가 격돌하며, 방 전체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은 로만의 오른손이었다.
그것을 본 맥도웰이 표정을 구겼다.
“놓쳤군…….”
곧이어 오른손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맥도웰은 일그러진 얼굴로 텅 빈 공간을 응시할 뿐이었다.
“프레이 칼리고……. 자일 지그하르트…….”
* * *
같은 시각.
공간전이(空間轉移) 스크롤을 사용해 하르만 저택으로 이동한 프레이와 로만.
‘팔 하나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지금의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어. 정면에서는 승산이 없다. 불시에 기습을 한다 한들 2할 정도가 고작이겠군……. 실로 괴물 같은 작자다. 살로몬 아카데미에는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린단 말인가?’
로만의 잘린 팔을 바라본 프레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하다 이내 경계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잘린 팔은 회복약으로는 재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회복술사를…….”
깔끔한 절단면을 남긴 채 잘려나간 그의 손목에서 붉은 핏물이 아닌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잠깐. 이건 마기……?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황급히 손을 뒤로 감춘 로만이 골치 아프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저 그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다급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프레이는 여전히 적의를 감추지 않은 채 검을 뽑아들며 얘기했다.
“저를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허나 그 도움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그대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분명 마기…‥. 당신, 살아있는 자가 아니군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를 이곳에 데려온 겁니까?”
“……진정하시지요. 저는 나쁜 의도를 지니고…….”
마침 타이밍에 맞게 누군가 프레이를 불렀다.
“프레이님!”
뒤를 돌아본 프레이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잭슨……? 정말 잭슨이에요……?”
잭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접니다.”
울먹거리며 뛰어간 프레이가 그를 와락 안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챙겨준 잭슨은 그녀에게 있어 삼촌과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잭슨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우선 그 검부터 내려놓고 말씀하시지요. 저 자는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의 은인과도 같은 분이지요.”
“은인(恩人)이요? 저자는 마기를 다루는…….”
잭슨은 어릴 적 그녀를 혼낼 때처럼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프레이. 저 자의 주인은 가주님 뿐 만 아니라 저희 칼리고 백작가 전체를 구해주신 은인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그 검을 내려놓고, 가주님을 뵈러 가시지요.”
그녀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인 잭슨이 그렇게 말하니 프레이 또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순순히 검을 집어넣었다.
이해가지 않는 점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보다 아버지의 생사가 더욱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이 됐든 저 자가 자신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프레이와 로만은 잭슨을 따라 할튼 칼리고가 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거닐며 프레이는 자신의 저택에서 머물던 사용인들을 만났고, 그들과 얘기를 하며 이곳이 하르만 백작의 저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르만 백작가가 어째서 우리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한정적인 정보를 지닌 프레이로서는 그간의 일들을 쉽사리 연결 지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가 제 아무리 영웅의 혈족이라고는 하나 백작 가문과 교단의 추기경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더욱 복잡해져만 가는 그녀의 머릿속.
“이곳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하르만 백작가의 가주인 뢴달 하르만의 집무실이었다.
어차피 그 또한 저택을 비운 상태였기에 나름대로 배려심을 발휘해 자신의 방을 내어준 것이다.
프레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잭슨. 이곳은 가주의 집무실이 아닙니까…?”
“하르만 백작께서 저희 가주님을 위해 특별히 배려해주셨습니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한 가문의 수장이 다른 가문의 수장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이걸 안 프레이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칼리고 백작가와 하르만 백작가가 아예 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성질이 안 맞는다고 해야 할까.
칼리고 백작가는 오랜 세월 제국을 수호하던 이들답게 정도(正道)를 추구하는 가문이고, 하르만 백작가는 대대로 암살을 생업으로 삼을 만큼 사도(邪道)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양지(陽地)와 음지(陰地).
칼리고의 입장에서 그들은 올바르지 않는 행위로 부와 명성을 축적해나가는 악에 가까운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푼다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프레이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맡에 있던 할튼 칼리고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프레이.”
“아버지!”
한걸음데 달려간 프레이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의 품에 안긴 프레이는 마치 어린 아이처럼 연신 얼굴을 파묻었다.
“아버지…. 아버지….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물기 어린 목소리.
할튼 칼리고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 걱정 끼쳐서 미안하구나…….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가.”
“정말…… 걱정했어요…‥ 혹시나 아버지께서 잘못 되신 게 아닌가 하고…….”
“그래, 그래. 이제는 괜찮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할튼 칼리고와는 다르게 현재의 그는 무척이나 평온한 안색이었다.
과거에 그를 봤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오해 할 정도로 생기가 도는 얼굴.
프레이 또한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했는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 안색이…… 설마, 병세가 호전되신 겁니까?”
할튼 칼리고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은인(恩人)이 내게 건네준 영약들 덕분에 이제는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그 은인이 대체 누구십니까? 아버지의 병을 치료해주시고, 저희 가문을 도와주신 그 은인이라는 분이 혹시 이 저택의 주인이신 뢴달 하르만 백작이십니까?”
할튼 칼리고가 고개를 저었다.
“은인께서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였지만…… 차마 네게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게도 이 저택의 주인인 뢴달 하르만이 은인이라고 생각했건만,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누가…….
설마…….
“자일 지그하르트…. 아니, 용사 파티의 전 보조 마법사인 아벨 크로이. 그가 바로 내 병을 치료하고, 우리 가문을 도와주신 은인이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