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프레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자일이 용사 파티의 일원이라니…….”
‘미안하네……. 자일 군. 허나 나는 이게 맞다고 보네.’
할튼 칼리고는 자일 지그하르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네는……? 지그하르트 군이 아닌가. 자네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겐가?
-오래간만입니다. 아버님.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버님의 병을 치유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자네가 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네. 지금껏 수많은 회복술사들이 다녀갔지만 아무도 내 병을 호전시키지 못했네. 나 또한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제 아무리 자네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그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네.
-저라면 가능합니다. 허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저를 믿고 따라주셔야만 합니다. 그리 하신다면 가주께서는 과거 전성기 때 모습은 아니더라도 본래의 건강했던 그 모습을 되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 청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기대를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다.
확신에 가득 찬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접어두었던 희망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 모습은……!
-저는 과거 용사파티의 일원 중 한 명이었던 아벨 크로이라고 합니다.
할튼 칼리고의 내부에 깃든 마기를 추출해낸 그는 자신에게 있던 일들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흑마술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용사파티의 일원이었던 자신이 용사 일행에게 환멸감을 느끼어 나가게 됐다는 것.
본래 자신은 지그하르트의 혈족이었고,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 본래의 신분을 사용하여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
룬델 공작가가 오래 전부터 칼리고 백작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치졸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압박하고 있었다는 것.
가주인 할튼 칼리고의 몸이 악화된 이유와 이제는 그녀의 딸인 프레이 칼리고를 노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마신 아스모데우스를 숭배하는 흑마술사라는 사실까지도.
전부 얘기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부분도 많고, 애매한 부분들은 즉석에서 꾸며내었지만, 대부분은 진실이었다.
허나 평생을 제국민으로서 살아왔던 할튼 칼리고는 그가 마신숭배자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당연하게도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힌 교리(敎理).
그것은 세뇌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신숭배자는, 흑마술사는 모두 악(惡)이다.
더 큰 힘을 탐하기 위해 동족들의 목숨조차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괴물들.
제국을 좀먹는 암세포.
그것이 그의 머릿속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는 개념이었다.
본래라면 어떤 얘기를 듣기 전에 당장 검을 휘둘러 목을 베었어야 했지만…….
그는 일단 마저 얘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안목과 지금껏 자신의 딸아이가 ‘자일 지그하르트라’는 인간에 대해 들려준 얘기들을 떠올려보면 그가 생각하던 마신숭배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어찌됐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인간이었다.
비록 흑마술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화를 더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자일 지그하르트는 담담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최초의 초월자이며,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를 세운 살로몬과 전란의 위기에서 제국을 구했던 영웅 시온 지그하르트 또한 사실은 흑마술사였고, 역사에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그들이 흑마술사였다는 기록이 소실되었으며 자신은 그들의 명맥을 잇는 인간이라는 것.
모든 마신숭배자가 인간을 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며, 자신 또한 단 한 번도 인간을 제물로 흑마술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간 아카데미와 제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일들까지 전부 애기했다.
거기에 덧붙여 마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함으로서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자네의 얘기를 쭉 들으면서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대체 자네는 왜 우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겐가? 자네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칼리고 가문을 감쌀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아닌 ‘프레이 칼리고’를 위한 것입니다. 가주님과 백작가를 구하는 것이 결국엔 그녀를 위한 일일 테니까요.
사실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할튼 칼리고가 제 아무리 소드마스터였다지만 지금은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세뇌를 하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그의 입을 막는 것 또한 가능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얘기들을 직접 꺼낸 것은 그에게 진정한 신뢰를 얻고 싶기 때문이었다.
자일 지그하르트는 이미 프레이 칼리고를 자신의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계획을 위해 쓰다버릴 도구 따위가 아닌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흑화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믿을 수 없군…….
-믿든 안 믿든 그것은 가주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제 정체에 관해서는 프레이 양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인가?
-언젠간 알게 되겠지만 그때가 된다면 제 입으로 직접 얘기하고 싶거든요.
-그래도 자신의 가문을 구해준 은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결정을 내리시건 그 또한 가주님의 마음이겠지요. 제가 전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마친 할튼 칼리고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다. 너의 친우(親友)인 그 청년이 우리 가문을 도와준 은인이다.”
프레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자일이 아버님의 병을 낫게 해주고, 가문의 사용인들을 옮긴 장본인이란 말씀인가요? 어째서 그가…… 아니. 그보다 자일이 용사 파티의 일원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다. 그는 용사 파티의 보조 마법사였던 아벨 크로이와 동일 인물이다. 아니, 자일 지그하르트가 아벨 크로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다. 궁금하면 네가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하구나.”
충격이 상당한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프레이.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들만 해도 그녀의 머리는 폭발 직전이었다.
“자일이 용사 파티의 일원이라니…….”
그제야 그가 지니고 있던 비정상적인 힘과 행보들에 관련된 퍼즐들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입학시험에서 이블을 상대한 것도……. 강화 마법의 이해도와 응용력이 학생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도 전부…….’
할튼 칼리고 또한 완전히 생각이 정리된 게 아니었다.
자일 지그하르트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은인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인지했다.
당연하게도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구해준 것에는 커다란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은혜를 갚아나갈 생각이었다.
허나 은혜와는 별개로 그라는 인물과 엮이는 것이 얼만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위험한 인물이다.
사람을 보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할튼 칼리고의 눈에도 그 깊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주변 사건과 인물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위험한 인물이 자신의 딸아이를 위하여 이러한 일들을 벌였다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아이가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모습이 아닌 온전한 모습의 그를 마주하였으면 했다.
아비로서 지닌 이기심이었다.
그리고 아직 자일 지그하르트가 그의 신뢰를 전부 얻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네가 사내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더구나.”
“……네.”
“그만큼 그를 믿는 것이냐? 너의 비밀을 공유할 만큼? 그것이 단순히 너 하나의 비밀이 아닌 가문 전체가 엮여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 텐데.”
프레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닌, 그가 애초에 자신의 비밀을 알아본 것이라고.
허나 인과가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묻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비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답했다.
“네. 믿습니다.”
할튼 칼리고는 복잡한 얼굴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뒤쪽으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자세한 건 본인을 만나 직접 묻도록 해라. 그리고 네 눈으로 똑똑히 보아라. 그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한 후에 다시 한 번 내게 말해주거라.”
그리고는 차갑게 식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얘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가문에 얽매이며 살지 말거라. 그 아이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갉아먹지 말거라. 지금부터는 칼리고 가문의 장자가 아닌, 오롯한 너로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가.”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녀가 남장을 해야만 했던 이유.
그것은 그녀의 쌍둥이 형제인 진짜 ‘프레이 칼리고’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가문이 그렇듯, 칼리고 백작가 또한 장자승계를 원칙으로 했다.
허나 다른 가문들에 비해서 칼리고 가문의 장자승계 원칙은 집착에 가까웠다.
가문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장자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러한 가풍으로 인해 가문의 여인들은 천대 받았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전통이 깨지는 것은 가문의 일원들에게는 커다란 수치였다.
그렇기에 사고로 죽은 프레이 칼리고의 빈자리를 그의 여동생인 헤르야 칼리고가 메꿀 수밖에 없었다.
방계의 자식을 들여와 가주로 세우는 방법 또한 존재했지만, 그것은 가주인 할튼 칼리고가 용납할 수 없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에게 자신의 핏줄이 아닌 다른 핏줄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죽기 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자신의 ‘딸아이’가 ‘사내아이’로 살기를 강요했고,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본명인 ‘헤르야 칼리고’를 버리고 ‘프레이 칼리고’로서 살아갔다.
뻔한 이야기였다.
“진심…이십니까…?”
할튼 칼리고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죽음의 늪에서 발버둥 치다 보니 비로소 알겠더구나. 그깟 가문의 전통 따위 보다 중요한 것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내 욕심으로 인해 네게 몹쓸 짓을 하였다. 미안하다. 헤르야.”
그 말을 들은 프레이는 그동안 자신을 옥죄이고 있던 족쇄에서 해방된 듯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정말 진심이시군요. 허나 저는 이 이름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가문을 위해서가 아닌, 제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죽은 제 형제를 위해서 앞으로도 저는 프레이 칼리고로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꼭 그럴 필요는…….”
“이 또한 제 선택입니다. 허나 더 이상 사내아이인척 연기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칼리고의 검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 말을 들은 할튼 칼리고가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응원하마. 그로 인한 책임은 내가 다 질 터이니. 너는 네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거라.”
“예. 아버님. 그럼 쉬십시오.”
대화를 끝내고 집무실을 빠져 나온 프레이는 곧장 로만을 찾아갔다.
로만은 2층에 위치한 접객실에서 잭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프레이가 로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로만에게 다가간 프레이가 책상을 탕치며 말했다.
“당신.”
“예?”
“당신이 말하던 주인이 자일 지그하르트가 맞죠?”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로만이 이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그에게로 나를 안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