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니나 다를까 숨겨진 통로를 통해 저택에 들어서기 직전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룬델의 기사들.
처음부터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수 십 명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단탈리온의 권능인가.”
뻔하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아마 가주인 다곤 룬델은 권능을 이용하여 우리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측했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것 이외에도 수많은 함정이 있을 터.
허나 이런 곳에서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됐다.
나로 인해서 청십자회의 성기사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만약 그들과 조우하게 된다면 나는 내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인 흑마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그들이 영지 밖에서 애를 먹고 있을 동안 내 힘으로 다곤 룬델의 모가지를 썰어버려야 했다.
좁은 통로는 이미 전쟁터와 다름없는 상태.
72교단의 교인들과 푸른달의 살수들, 그리고 룬델의 기사들이 한데 섞여 아우성을 지른다.
마기가 뒤섞인 저주들과 죽음을 거부한 시체들이 악의를 드러내고, 기사들은 동요하지 않고 열심히 검을 휘두른다.
순식간에 기사 두 명의 모가지를 따버린 뢴달 하르만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자일 지그하르트. 이곳은 우리가 맡겠다. 너는 어서 네 할 일을 하거라.”
그 옆에 있던 라다무스가 기사 한 명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박살내며 동조했다.
“그래. 여기서 시간을 끌 필요 없지. 이 많은 인원이 다 같이 가는 것보다 소수로 움직이는 것이 더 좋을 듯 싶네. 나와 하르만 백작만 이곳에 남을 터니 그대는 룬델의 여식과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영감님. 그리고 뢴달. 조금만 고생해라.”
라다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자네나 조심하시게. 내가 이래봬도 명줄 하나는 길어.”
뢴달 또한 보기 드문 미소를 띠었다.
“그동안 네놈을 위해 개처럼 일했으니 그에 마땅한 대가는 받아낼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산해주마.”
“가라. 어서.”
몸 안에 마나를 끌어올리자 내 전신에 보랏빛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일렁거렸다.
“초가속(超加速).”
모든 감각들이 급속도로 예민해지며 주변 사물들이 느리게 움직인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천천히 흘러가는 감각.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의 혈액들이 뜨겁게 용솟음친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뒤 테레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우. 테레사.”
그녀 또한 전신에 마나를 두른 채 나를 바라봤다.
“가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창 악시온을 손에 쥔 채 섬광 같은 몸놀림으로 전진했다.
퍼엉!
좁은 통로에서 한줄기 빛처럼 움직이는 나의 창끝.
목적은 살상이 아닌, 돌파였다.
“강화(强化).”
마나를 창끝에 압축한다.
“응축(凝縮).”
창날에 깃든 마나가 더욱 더 날카로운 형태를 띠며 근처에 닿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킨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했고 테레사 또한 내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렇게 순식간에 통로를 주파한 우리는 저택 내부로 진입했다.
숨겨진 통로라 그런지, 우리가 도착한 곳은 1층이 아닌 2층이었다.
“여기는…….”
“저택 2층이다.”
“가주는 어디에 있지?”
“아버님의 방은…… 저택 가장 꼭대기에 있다.”
“몇 층이지?”
“5층이다.”
높기도 하군.
저택 꼭대기에 가주 다곤 룬델이 있다는 얘기였다.
이미 그도 내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내 앞을 가로 막는 흑기사 두 명과 그 뒤편에 수십 명의 기사들이 서 있었으니까.
공작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기사들의 숫자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흑기사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테레사 님……. 이제 그만하시라는 가주님의 명입니다. 더 이상은…….”
테레사 물었다.
“무엇을 그만하라고 하시던가요?”
흑기사가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가주님을 찾아가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면 지금까지 있던 일들은 전부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오시지요. 이런 일을 해봤자 불리해지는 건 테레사 님 뿐입니다.”
“당신들도 전부 알고 계셨던 겁니까……? 룬델 공작가가 마신을 숭배하고, 마신의 힘을 얻기 위해 죄 없는 백성들을 제물로 받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흑기사가 침묵했다.
“……,”
그것은 곧 진실을 의미했다.
“봐. 내 말이 맞지? 아마 이 저택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은 너 하나 뿐 아니었을까. 테레사?”
그녀의 얼굴이 분노와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흑기사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것이 룬델 가를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새끼들이 하는 말 더 들을 것도 없어. 테레사. 그냥 광신도랑 다를 바 없는 놈들이니까. 너도 네 눈으로 직접 봤잖아. 그 조용한 마을에 주민들을 하나, 둘씩 납치해서 마신을 위한 제단에 공양으로 희생시키는 꼬라지를. 그 시체를 옮기는 룬델의 기사들을. 그리고 그들과 동조해서 그 모든 것들을 눈감고 있는 라파엘의 성직자들을. 네 눈으로 보고 느낀 것만 믿어. 테레사.”
뒤편에 있던 흑기사가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그 입 닥쳐라! 빌어먹을 이교도 놈아! 그 사특한 조동아리로 테레사님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냐!”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느껴지네. 이 저택 아래에도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이 정도 마기면 아까 보았던 제단보다도 훨씬 더 크겠는데? 테레사. 다곤 룬델이 있을 곳은 위가 아니라 아마 아래 같네. 그쪽에서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러니 어서 이 쓰레기들부터 치우자고.”
흑기사 한 명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 하찮은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오러가 깃든 검날이 내 목덜미를 향해 다가온다.
초가속을 사용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리지 않다.
오히려 다른 어떤 검들보다도 빠르게 다가온다.
‘역시 흑기사는 흑기사인가.’
허나 그 뿐.
그 이상의 위협은 되지 않는다.
이곳까지 온 이상 더 이상 힘을 아낄 마음 따위는 없었다.
“사멸(死滅)의 낫.”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사신들.
얼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사신이 손에 든 낫을 일제히 휘두르자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악!!!”
“뭐, 뭐야!”
“내 팔, 내 팔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흑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검이 내게 닿는 것보다 사신의 낫이 검을 쥐고 있던 그의 손목을 자르는 게 더욱 빨랐다.
마기로 이루어진 영체인 그들은 오로지 내 사고에 응해 반응한다.
내 마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 또한 높아지고.
내 정신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능력 또한 강해진다.
마신서의 사본을 통해 얻게 된 고도의 흑마술.
지옥의 규율을 담당하는 사신들을 일시적으로 물질계의 현현시키는 마술이었다.
──서걱! 서걱!
툭. 툭. 툭.
복도 바닥을 가득 메우는 수십 개의 팔 다리.
내가 마기를 거두자 사신들은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사라졌다.
그래도 꼴에 흑기사라고 다른 기사들을 제외한 두 명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른 흑기사는 손목이 잘려나갔고, 나머지 흑기사는 옆구리 쪽을 베었다.
그러나 ‘사멸의 낫’이라는 이름답게 저 낫은 단순히 베는 용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낫에 베이는 이들은 반드시 죽는다.
사람마다 죽는 시간은 다르지만 베이는 것만으로 죽음을 확정 받는 것이다.
살아남는 방법은 자신을 벤 사신을 직접 소멸시키거나 운명을 비틀 수 있을 정도의 권능 혹은 그에 걸맞은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마침 팔다리가 베어나간 룬델 가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곧장 흑마술을 사용했다.
“사귀재생(邪鬼再生).”
죽어나간 그들이 이성 없는 사귀가 되어 부활했다.
전투력은 생전에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크르르르르르!”
“키에에에에엑!”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그들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흑기사들에게 돌진했다.
흑기사들은 검을 뽑아 화려한 검술 솜씨로 사귀들을 베어냈지만, 그들은 인간과 다르게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목이 베어져도 끈질기게 덮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레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벨……. 이제 그만 보내주시오.”
“그럴까? 아니지. 테레사 너의 손으로 보내줘.”
테레사가 당황하며 말했다.
“제, 제가 말입니까?”
“어. 네가 보내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어? 그래도 한 때 너를 따르고, 너의 가문을 따르던 이들이잖아. 그러니 외부인인 나보다 네가 끝내주는 것이 좋겠지.”
그녀가 망설이자.
“저는…….”
이번에는 마기를 담아 강력하게 말했다.
“해. 테레사.”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지며 멍한 얼굴이 되었다.
검을 뽑아든 테레사.
검날에 깃든 오러.
“복합강화(複合强化).”
거기에 강화 마법을 부여했다.
테레사가 사귀들에게 둘러싸인 흑기사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전보다 훨씬 더 지친 얼굴이었다. 아마 사멸의 낫에 당한 영혼의 영구적 손상 때문일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확정된 일. 그럴 거면 테레사의 손에 죽는 것이 그들도 좋지 않을까.
“미안합니다.”
테레사의 검이 한줄기 빛처럼 쇄도했다.
본래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살생을 할 수 없는 유약한 성정 탓에 지금껏 본인이 가진 힘을 100프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것인지 지금에 그녀는 용사 파티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촤악!
두 흑기사의 목에 실선이 생기더니 뒤이어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잘했어. 테레사.”
테레사가 자신의 검에 묻은 핏물과 잘려 나간 머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본인의 혈육도 베었는데 이 까짓 가문의 기사들 좀 베었다고 벌써 지치면 안 된다.
그녀는 내가 준비해둔 피날레를 장식해야 하니까.
나는 흑기사의 시체로 향한 뒤 손가락 끝을 베어 붉은 핏물을 떨어트렸다.
“사자소생(死者蘇生).”
내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의 원천 그 자체가 사라짐을 느끼며 방금 숨을 거두었던 흑기사 두 명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허나 생전에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지닌 마기에 영향 때문일까.
그들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마기가 그들이 입고 있던 흑색 갑옷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하로 갈 필요는 없겠군. 방금 막 마기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가보면 알겠지.”
나와 테레사는 다음 층으로 향했고, 그 뒤를 수 십 명의 사귀(邪鬼)와 새롭게 태어난 흑기사들이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