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125화 (125/180)

125화

층 하나를 오르는 데도 적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걸음을 한 번 내딛을 때마다 룬델 가의 기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내 병력이 되어 갈 뿐이다.

오히려 나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군.”

“……내가 처리하겠다.”

테레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내 강화마법의 영향 때문이 아닌, 본인 스스로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듯 했다.

검사로서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큰 억제제였을 테니 그로 인한 구속이 해제됐으니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억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다른 의미일 테니까.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룬델 가의 기사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진다.

백색 오러가 깃든 검이 허공을 휘저으면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진다.

푸른 오러가 깃든 검이 춤을 추면 주변 일대가 얼어붙는다.

테레사 단 한 명만으로도 전투는 굉장히 수월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내게 접근하기도 전에 테레사에게 도륙이 났고, 용케 내게 접근한 이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창 악시온에 찔려 절명했다.

죽은 이들이 사귀가 되어 다시 내 뒤편에 섰다.

수 십이었던 사귀(邪鬼)들은 어느새 수 백에 가까워졌다.

4층 복도는 피바다가 되었다. 사방에 너부러진 시체. 그리고 살점. 꼬불꼬불한 내장. 무기들.

나와 테레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베고, 베고, 베고, 또 베고, 쉴 새 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광신도처럼 미친 듯이 돌진했다.

룬델 가의 기사들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나와 비할 바는 절대 아니다.

흑기사 정도는 되어야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전력이 쏟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이미 나는 두 명의 흑기사를 거닐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더 추가돼봤자 내 전력만 늘어날 뿐.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막아서려면 흑기사를 뛰어넘는 최강의 전력, 예를 들어 소드마스터인 다곤 룬델 정도는 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4층은 정리가 끝난 것 같군. 이제 남은 건 5층 뿐 인가?”

“……그런 것 같군.”

“후회되나?”

“……모르겠다.”

“후회가 들 때마다 마신의 석상 앞에 놓인 제단. 그 위에 있던 시체들을 떠올려라. 그들 모두가 너희들이 지켰어야 할 룬델의 영지민들이다.”

“……명심하지.”

이제 남은 것은 5층 뿐.

마지막 결전을 치루기 위해 5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 그 순간.

소름끼치는 이질감과 함께 눈앞에 풍경이 바뀌었다.

“……공간왜곡(空間歪曲)?”

처음부터 설계된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주의 방이 있는 5층으로 향하는 계단 전체에 어떠한 마법적 장치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나와 테레사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다른 공간으로 전이되었다.

이변을 눈치 챈 테레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똑같이 두리번거리던 내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나?”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아버님과 자주 오던 비밀 장소다.”

“비밀장소? 여기는 연무장이 아닌가?”

사방은 석벽으로 둘러 싸여 있고, 천장은 꽤 높다.

주변 곳곳에는 병장기들과 훈련용 인형, 그리고 짐승의 시체 같은 것이 널브러져 있다.

가운데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연무장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아마 마신 단탈리온을 본떠 만든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도 저런 석상이 있었는가?”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대해 설명해라. 테레사.”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님은 종종 나와 사딘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는 하셨다. 가문의 식속들에 눈을 피해 이곳에서 직접 우리들을 지도해주셨지. 이곳에 위치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버님의 손을 꼬옥 잡고 눈을 감고 잠시 기다린 뒤에 다시금 눈을 떠보면 이곳이었으니까……. 이곳은 내게 있어 추억이 담긴 장소다. 그런데 어찌 이곳에…….”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서늘한 음성.

“내가 불렀다.”

그곳에는 제국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이자 룬델 가(家)의 가주(家主)이며, 테레사의 아버지인 다곤 룬델이 서 있었다.

그를 본 테레사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테레사.”

음울함이 느껴지는 잿빛 머리칼. 희다 못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날카로운 눈매. 공허한 눈동자.

그리고 중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안의 외모.

만약 저 자가 다곤 룬델이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20대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당신이 룬델 가의 가주인 다곤 룬델인가…….”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래. 네가 자일 지그하르트겠군. 아니, 아벨 크로이인가? 뭐가 됐든 피차 통성명은 할 필요 없겠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그대가 나를 이곳으로 초대한 것인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네놈이 흑마술사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이상 쓸데없는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 이곳이 너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장소라 생각하면 된다.”

“왜 하필 이 장소를 고른 거지? 테레사에게 듣자하니 이곳은 어릴 적 너에게 가르침을 받던 장소라고 하던데? 딸과의 추억이 깃든 곳에서 살인을 하는 고약한 취미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내 도발에도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경고다.”

“경고?”

“마지막으로 딸아이에게 하는 경고. 이곳에 초대한 것이 내가 딸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에게 오거라. 테레사.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죄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비로서 딸인 너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거절한다면?”

“……그럼 애석하게도 죽일 수밖에 없겠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과 혐오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지금 갑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검을 쥐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품 어디를 봐도 무기로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풍겨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것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위협적인 인물, 아니 격이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틈을 보고 있었지만, 그 어떤 행동을 한다한들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모두 그의 손에 온몸이 도륙 난 나의 모습 뿐 이었다.

“자. 대답해라. 테레사. 어떻게 할 테냐. 계속 그러고 있을 테냐? 그 끝에는 죽음 뿐 이니라.”

테레사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딱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룬델의 영지민들이 마신의 제물로 희생되고 있었다는 사실. 아버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그런 하찮은 것을 질문하냐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그렇다. 그게 중요한 것인가?”

“……아버님이 명령하신 겁니까?”

“그래. 내가 명령했다. 쓸모없는 버러지들을 제국을 위해, 우리 가문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치르게 해주었을 뿐인데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진심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와 눈빛.

그는 정말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된 거였군요.”

“테레사. 잘 생각해 보거라. 버러지들 목숨 한, 두 개를 희생해서 우리 가문이 가진 힘이 더욱 강력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 나라의 백성 모두를 구하는 일이 아니더냐? 그들의 희생이야 말로 제국을 지키기 위한 값진 희생이라는 것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어차피 놔두면 버러지 같이 살다 죽어갔을 놈들이다. 그런 놈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유용한 형태로 사용해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신(魔神)이라는 겁니까. 악귀에게 동족을 제물로 받치면서까지 힘을 얻으셔야 했습니까. 인간이길 포기하면서까지 힘을 추구하고 싶으셨습니까. 스스로가 선택한 검으로는 미래를 쟁취할 용기가 없으셨던 겁니까! 그래서, 그래서! 할튼 칼리고 경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그를 모함하였던 겁니까!”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다곤 룬델의 입꼬리가 쭈욱 찢어졌다. 인간이면 결코 찢어질 수 없는 곳까지.

귀 밑까지 찢어진 입 꼬리.

온통 검게 물든 눈동자.

뒤이어 울려 퍼지는 기괴한 목소리.

“그래. 내가 그랬다. 그래서 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질적인 무엇인가의 목소리.

──공간 전체가 울렸다.

“결국에는 끝까지 살아남는게 승자가 아닌가?”

그리고 피어나는 흉흉한 마기.

“……얼마나 해쳐먹은 건지 아주 지독하군.”

테레사는 절망적인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결단을 내린 것인지 마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뻗어 나왔다.

──콰아아앙!

백(白)과 청(靑)이 뒤섞인 오러가 아지랑이처럼 그녀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주변 일대에 한기가 급속도로 퍼졌다.

그녀의 머리칼마저도 오러(Aura)로 인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아버님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대신해 당신의 딸인 제가 당신을 단죄하겠습니다.”

다곤 룬델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기로 한 건가…. 안타깝구나, 딸아.”

“저는 아버지를…….”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서걱─!

“……믿었.”

검을 쥐고 있던 그녀의 오른팔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지며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다곤 룬델은 분명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

‘설마. 손짓 한 번으로 팔을 잘랐다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그가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인데 테레사의 팔이 잘려나갔다.

고통에 가득 찬 테레사가 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리고는 반대쪽 손으로 검을 쥔 채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내달렸다.

아니.

달리려고 했다.

달리려고 하였으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잘려나갔다.

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다곤 룬델이 손짓을 함과 동시에 테레사의 발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중심을 잃은 테레사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잘려나간 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

“그러게 아비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것 아니더냐.”

그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래. 이제는 우리끼리 정리해야 할 시간 아닌가?”

“그래야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서 룬델 가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림잡아도 100명 이상.

흑기사 넷.

가주 직속의 호위 기사들이 다섯.

원로회 소속 기사들이 여섯.

그리고 소드 마스터가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