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마신과 계약을 했든, 인간을 제물로 받쳤든,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했든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검의 극의(極意)에 도달한자.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저 자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가이다.
‘손짓 한 번으로 테레사의 팔 다리를 벨 정도…….’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의 육체.
모든 부분이 곧 검이라고 봐야 한다.
그가 방금 한 행동은 단순히 허공에 손짓을 한 것이 아닌, 벤 것이다.
베고자 마음을 먹었고, 그렇기에 손을 휘둘렀다.
공간을 벤 것일까.
아니면 검풍(劍風)만으로 베어버린 것일까.
만약 전자라면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인 셈이다.
나는 마기를 퍼뜨려 내 주변 일대에 촘촘한 막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공간 계열 마법은 사용할 수 없기에 마기를 활용하여 대체한 것이다.
일종의 결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겹겹이 중첩하여 만든 결계는 내 마기와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힘을 낼 것이다.
또한 내 몸 전체에도 마기를 둘렀다.
검은 막 같은 것이 몸 전체를 뒤덮었는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급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흑마술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수 십, 수 백 가지의 응용식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는 살몬이 내게 건네준 정수의 영향도 있겠지만 아벨 크로이가 지니고 있던 재능에 영향도 있을 것이다.
마법으로는 구현할 수 없던 것들이 마기를 이용하면 어떻게 구현해내야 할지 저절로 그려진다.
마치 내 의지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모습을 드러내라.”
내 목소리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귀들.
수 백여 마리의 사귀, 그리고 사역마가 된 흑기사와 푸른달의 살수들이 나를 중심으로 진형을 갖추었다.
이것이 단 한 명의 흑마술사가 만든 전력이다.
나라는 흑마술사 하나 만으로 이 정도의 병력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규모 전투에서 흑마술사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온갖 저주와 파괴력이 높은 흑마술까지 동원돼 전장을 휩쓴다고 생각하면 미쳐 버릴 수밖에.
“일리야.”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나의 가장 오래된 사역마인 일리야를 소환했다.
다그닥. 다그닥.
안개 사이를 뚫고서 유령마가 질주한다.
여인의 서글픈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신의 머리를 쥐고 있는 목 없는 기수가 검을 뽑아든 채 나를 바라본다.
“ní fhaca mé le fada thú. Tiarna. Chuir tú mé chuig láthair catha nua, an uair seo.”
그녀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아닌 채로 이렇게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부려먹고 있으니. 사실 여러모로 내게는 정말 많은 도움이 된 사역마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러한 모습이 되면서까지 바라고자 했던 것을 나는 어떻게든 이루어줄 셈이다.
그러려면 우선 그녀에 대한 단서와 그녀에 진명을 찾아야겠지만.
“받아.”
나는 그녀에게 품에 있던 묵주 팔찌 하나를 건네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성제국(神聖帝國)의 잔재였다.
추기경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혹시나 싶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냐고 물었고, 마침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 중 신성제국 시절에 물건으로 추정되는 팔찌가 있어 냉큼 빌려왔다.
지금껏 어떤 표정 변화도 없던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is é seo an bracelet impiriúil…….”
팔찌를 받은 그녀가 자신의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그러자 그녀의 전신에서 강력한 백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시절의 물건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힘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그녀가 타고 있던 유령마부터 그녀의 갑옷, 그녀의 검,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까지 전부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이는 그녀가 라파엘의 사도라고 해도 믿을 것이 분명했다.
외형은 분명 마물이었지만,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이 거룩한 신성함은 결코 마물에게서 느낄 수 없는 것이기에.
“Iarsmaí an Impireacht Naofa. Is dóigh liom go bhfuair mé rud eile a raibh dearmad déanta agam air. Creidim gur féidir leat é a dhéanamh. Leanfaidh mé thú ar feadh an chuid eile de mo shaol má chomhlíonann tú mo spriocanna chomh maith leis an gcuid eile de mo chuid iarsmaí.”
이제는 아스모데우스가 해석해주지 않아도 그녀가 무어라 얘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의 제국에 있던 물건을 찾아주어 고맙다.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 않았지만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준다면 평생 나를 따르겠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에게 테레사를 치료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염동력의 이치를 토대로 마력 대신 마기를 사용하여 테레사의 몸과 잘린 팔과 다리를 내 앞으로 끌어왔다.
순백색의 빛을 뿜어내는 일리야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잘려있던 팔과 다리가 결합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상처가 아물어갔다.
정신을 놓지 않은 테레사가 신이라도 영접한 듯 황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내 사역마다.”
“가문의 초상화에서 본 적이 있어…….”
“그게 무슨 말이지? 룬델 가문의 초상화에 일리야가 있다고?”
순식간에 몸이 회복된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방에 걸려 있던 초상화. 그곳에 그녀의 모습이 걸려 있었어.”
“혹시 그녀의 이름도 적혀 있던가?”
기억을 되짚은 테레사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신성제국의 첫 번째 기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라딘의 이름을 하사 받았던 가장 아름다운 검. 그 이름은…….”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일리야 하이스트로.”
어째서 룬델 가(家)의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그녀의 진명(眞名)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은 즉 그녀와 진짜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곧장 사역마 계약에 관련된 흑마술을 구상하며 마기를 끌어올렸다. 보랏빛 눈동자에 마성(魔性)이 깃들었다.
“신성제국의 첫 번째 기사이자, 가장 아름다운 검. 팔라딘 일리야 하이스트로.”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유령마가 딛고 있던 지면에 육망성이 새겨졌다.
유령마에서 내린 일리야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건넸다.
그 행동에 의미를 이해한 내가 그녀에게서 받아든 검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두었다.
“나와 계약을 하겠는가.”
“Beidh mé i do ridire.”
그대의 검이 되겠다.
기사의 맹세.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맹세였다.
나는 검으로 손가락을 그어 핏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새겨진 육망성이 빛을 뿜어내며 일리야가 나에게 종속되었음을 느꼈다.
흑(黑)과 백(白)이 공존하는 그녀의 모습.
새하얗게 물들었던 머리칼의 절반이 칠흑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상반된 성질인 마기와 신성력이 동시에 느껴졌다.
또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게 진명을 알게 된 일리야의 힘이란 건가……. 100프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팔라딘이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대체 얼마나 괴물이었던 거지?’
진명을 알게 되어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으나 아직 완벽한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혼이 가진 격(格)이란 게 존재하기에 마물이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필연적으로 격이 훼손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
허나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전부 얻게 된다면 훼손된 격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터이고, 그렇다면 전성기에 힘을 충분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든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다곤 룬델은 이 모든 과정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었을 텐데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관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을 대비하여 결계 쪽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오……. 신성력을 다루는 듀라한이라니……. 거기에 이만한 양의 사귀들과 흑마술을 다루는 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더냐. 혹시 게티아 놈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냐?”
역시 저 자도 흑마술사들의 연합인 게티아에 대해 알고 있다.
“……당신이야 말로 그쪽과 한통속인거 아닌가?”
“한통속이라…….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지. 네놈이 생각하는 것만큼 돈독한 관계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그놈들을 이용해먹고 있는 것일 뿐.”
그때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마신 단탈리온을 소개해준 것도 설마 그놈들인가?”
나를 보던 다곤 룬델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거기까지 알고 있던 것인가?”
한 번 찔러본 것이었지만 그게 정말 사실인 듯 했다.
그들이 어떻게 단탈리온과 접점이 생겼나 했더니 결국 이 또한 게티아와 관련된 일인 것이다.
게티아 쪽 인물이 그들에게 마신에 대해 소개시켜주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했다.
“……그렇게 마신을 증오하는 놈들이 그깟 사탕발림에 넘어가 마신 숭배를 위해 인간들을 제물로 받치게 된 것인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군. 권력도 재력도 전부 다 가진 너희가 대체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단탈리온을 숭배하는 것이지?”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 천천히 말을 내뱉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끝날 때쯤 됐을 때에는 거의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최강이여야 하니까. 룬델 공작가야 말로 최고의 가문이 되어야 하니까. 힘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라파엘이고, 사르키엘이고, 아티엘이고 믿으면 뭐가 달라지나? 우리에게 힘을 주나? 아니면 가호를 내려주나? 그것도 지들 마음이지 않은가! 나는 힘을 원한다 힘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어차피 라파엘 교단 녀석들도 지들 입맛에 맞게 역사를 개변하고 선동하지 않았던가? 마신의 힘을 다루는 너는 익히 알고 있을 텐데? 마신을 숭배하는 것을 죄악으로 몰아갔던 것 역시 전부 라파엘 교단 녀석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그래. 그 말이 맞지. 허나 모든 마신숭배자가 너처럼 인간을 제물로 받치지는 않는다. 네 말처럼 마신을 믿는 게 죄악은 아닐지 모르지. 허나 마신에게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받치는 건 죄악이 맞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대화는 끝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룬델 쪽 병력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두두두두.
그들이 발을 움직이자 지축이 흔들리며 거대한 발소리가 공간을 가득 매웠다.
룬델 가(家) 소속의 직속 기사 백 여명.
흑기사 넷.
원로회 소속기사 여섯.
내 시야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병력들이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수많은 살의(殺意)가 나를 향한다.
나 하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모습이.
꼭 불나방 같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자신들이 죽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불나방.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외쳤다.
“먹어치워라. 레비아탄(Leviathan).”
내 몸에 새겨진 성흔이 발광하며.
그들이 딛고 있던 지면에서 산을 연상케하는 크기의 흑색 고래가 뛰어오르더니 이내 그들을 집어삼켰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