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 말을 들은 프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본인의 나약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
최근 그녀 주위에 일어난 이들은 그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미래에는 적수가 없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일 뿐.
현재의 그녀는 그저 뛰어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학생일 뿐이었다.
“…….”
허나 그럼에도 이 답답함을 풀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든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 자일 지그하르트는 룬델 가(家)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룬델 공작 가문은 찢어 죽일 원수.
그들의 몰락을 위해서라면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그것이 자일지그하르트와 자신 모두를 위하는 길이었으니까.
거기서 더 욕심을 내자면 최소한 그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광경이라도 보고 싶었다.
자일 지그하르트도 돕고, 그토록 증오하는 원수의 복수도 함께 하고 싶다.
허나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그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순전히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기에.
평생 이타적으로 남을 배려하며 살아온 그녀였기에.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프레이 칼리고’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제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다짐했다.
조금 이기적이더라도.
조금 솔직하더라도.
더 이상 포기하지 않기로.
“잘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야만 합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이것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제 두 눈으로 그들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직접 봐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본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것이다.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더 이상 남 눈치를 보며, 가족 눈치를 보며, 가문 눈치를 보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든, 사실 마신을 숭배하는 흑마술사였든, 그 외에도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있든, 전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뒤 판단할 것이다.
지금은 그를 의심하기보다 그를 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전부 거짓이었을지라도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전부 진실이었으니까.
프레이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최대한 발목 잡을 일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로만은 곤란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주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그녀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그녀를 지킬 수 없다. 그곳에는 괴물들이 즐비하다. 나 스스로도 애매한 곳에 아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그녀를 데려가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생각은 이렇게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간절함을 로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 간절함이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그 자신 또한 간절함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기레스 하르만에게 학대당하던 데이지를 보았을 때 그 또한 자신의 주인인 자일 지그하르트에게 간절함을 담아 부탁을 했다.
그 부탁의 성질은 다를지언정 지금 그녀의 부탁에 깃든 간절함은 그 당시의 자신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부탁합니다. 당신이라면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실 수 있겠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제가 감수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선택한 일이고, 그로 인한 책임도 전부 제가 질 것입니다. 그저 제가 그토록 바라고 보고 싶었던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그로 인한 대가로 치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치를 테니… 한 번만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갈등하는 로만.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순간.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 사내를 본 프레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갑작스런 현상에 당황한 로만이 순식간에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건 제가 해결해드리도록 하죠. 오래만이네요, 프레이.”
“교, 교수님?”
공간을 비집고 걸어 나온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요한 크루이트.
1학년 S 클래스를 담당하는 교수였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 예. 저희 클래스의 담당 교수님입니다.”
짧은 순간, 로만은 본능적으로 공격할 자세를 취했지만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전에도 살수로 활동한 그는 죽어서도 많은 전투를 경험하며 꾸준히 성장하였기에 사람을 보는 안목 또한 전과 달랐다.
‘힘이 가늠이 안 된다.’
그런 그가 인정을 한 것이다.
그는 상대와의 격차를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공간 계열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 중에서도 자유자재로 공간 이동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한 나라에 한, 두 명 정도.
애초에 수많은 원천속성들 중에서도 ‘공간’이라는 속성을 타고나는 이는 100만 명 중 한 명 꼴이었다. 이 또한 넉넉히 잡은 수치였고.
‘공간전이 스크롤을 만든 마탑주 정도가 아닌 이상 이 정도는…….’
대외적으로 공간 마법을 사용하기로 유명한 것은 공간전이 스크롤을 양산화 시킨 장본인인 마탑주 정도였다.
로만과 요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
“이질적인 존재가 있군요.”
로만은 그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프레이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교, 교수님이 어떻게 여기에 오신 겁니까?”
요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평소 원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프레이는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오기는요. 마법을 써서 왔지요. 프레이 학생은 제가 공간 마법을 다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축제 때 그가 공간 마법을 사용했던 기억이 있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공간 마법을 사용해서 왔든, 공간전이 스크롤을 사용해서 왔든, 걸어서 왔든, 뛰어서 왔든, 기어서 왔든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어째서.
이곳에 온 거냐는 말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요한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아니 예상이고 뭐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범위였다.
“그런 게 아니라 교수님이 이곳에는 왜 오신 겁니까?”
“저도 귀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안팎으로 그렇게 소란스럽게 굴면 제가 모를 리가 없지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프레이 학생. 제가 조금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처리할 일이 조금 있어서 시간이 더 걸렸네요.”
“처리할 일이요……?”
“이사장님이랑 거래를 좀 했습니다. 뭐, 그런 게 있어요. 어쨌든 제가 담당 교수로서 더 빨리 처리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프레이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의 담당교수인 것은 맞지만 그간 지켜본 바로서는 그의 이러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건지 궁금하십니까? 별 거 아닙니다. 마력의 잔흔을 따라 계속해서 추격하다 보니 결국 여기로 이어지더군요.”
“…혹시 저희 가문의 저택에도 들리신 겁니까?”
요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제게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프레이는 저택에서 있던 일들과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얘기를 경청하던 요한.
얘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불규칙적으로 진동했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방 내부의 공기가 격하게 요동칠 정도였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일그러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맥도웰 학부장…… 그 빌어먹을 늙은이가 기어코 프레이 학생에게 검을 겨누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으드득.
그가 끼고 있던 반지 한 개의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력이 그의 감정에 반응하여 격하게 요동치는 까닭에 마나를 억제하는 아티팩트가 한계에 다다른 것.
요한 본인 또한 이 사실을 인지했기에 스스로 화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워낙 방대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요한은 과거에 있던 일들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감히 내 제자에게 그 따위 짓을……. 역시 그때 죽여 버려야 했습니다.”
사딘 룬델을 제자로 삼았던 것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던 그였다.
프레이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는 교사로서 결코 하면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처음부터 자신의 제자를 위해 프레이를 희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고.
학생을 살해하려고 했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그의 제자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느꼈던 이질감.
그것의 정체를 드디어 깨달았다.
‘……역시 그 살인귀는 처음부터 상종할 수 없는 놈이었어.’
요한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새겼다.
마음 속 한 구석에 있는 자신의 살생부에 그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룬델 공작가(家)…….’
그들 또한 선을 넘었다.
본래라면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선을 넘어도 아주 넘었다.
그리고 프레이 칼리고는 그의 학생이다.
지금껏 제자를 받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담당한 S 클래스에 학생이란 말이다.
본래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요한 크루이트는 클래스를 담당하는 교수가 됨으로서 더욱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물로 변해버렸다.
“프레이 군. 내가 왜 이곳에 온 건지 궁금하십니까? 교수인 제가 당신을 도우려는 이유가 궁금하신 가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교수님은 전혀 그러실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합니다. 그대는 저의 제자이고, 저는 그대의 선생이니까요. 스승이 제자를 돕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요? 원래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을 넘었습니다. 본래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자는 주의지만…… 그게 제 제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다르죠. 그렇기에 제가 이사장을 만나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기에 프레이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얼굴로 그저 바라볼 뿐 이었다.
“그러니 제가 돕겠습니다. 마침 손님들이 왔군요.”
저택의 설치된 마법진.
요한의 공간마법으로 인해 그 마법진의 균열이 생겼음을 눈치 챈 하르만 저택의 일원들이 하나, 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프레이?”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그 말을 들은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갈까요?”
딱.
요한이 손가락을 튕기자 프레이와 로만, 그리고 요한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뒤늦게 도착한 하르만 백작가의 사병들은 텅 비어있는 방 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