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내 시선이 다곤 룬델에게 향한다. 두 가지의 음성이 겹쳐져 나온다.
“뭘 멀뚱멀뚱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이냐, 단탈리온?”
【뭘 멀뚱멀뚱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이냐, 단탈리온?】
단탈리온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한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 그가 강림했을 때 느꼈던 압도적 무력감은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사라진지 오래.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고양감이 차오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아스모데우스라(Asmodeus)는 마신이 지닌 힘의 10 퍼센트.
딱 그것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능을 사용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
인간의 이지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마신 바알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아스모데우스와 계약을 맺고 그녀의 마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존재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은 붕괴되고, 인간으로서의 기능은 전부 상실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의기양양하던 다곤 룬델, 아니 단탈리온은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나를 응시하기만 할 뿐.
‘신의 격(格)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방금 전까지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는데…….
화신체가 되어 아스모데우스의 극히 일부분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내 눈앞에 존재가 하찮게 느껴진다.
“대답 안하느냐?”
【대답 안하느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저절로 올라간다.
사방에 흩뿌려진 마기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으득!
단탈리온을 둘러싼 마기들이 무형의 힘에 반응하여 그의 몸 전체를 옥죄인다.
그의 몸을 휘감은 검은 연기가 뱀처럼 움직인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단탈리온이 눈꺼풀을 치켜 올리자 눈동자에 깃든 성흔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마기들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느껴진다.
아스모데우스의 감정이.
이것은 분노?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찮은 미물이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감정.
굳이 내 관점에서 비유하자면 개미가 발가락을 물었을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71계위의 마신이라도 그녀에게는 이 정도 존재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 나로서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하? 게티아(Goetia)였으면 눈도 제대로 못 맞췄을 놈이 지금 완전한 화신체를 얻었다고 이 따위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하? 게티아(Goetia)였으면 눈도 제대로 못 맞췄을 놈이 지금 완전한 화신체를 얻었다고 이 따위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단탈리온이 짓이기듯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흑염(黑炎). 마기가 검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아스모데우스(Asmodeus)──! 그대가 제 아무리 7죄악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지옥이 아니다. 그 어린 인간 놈이 앞으로 그대의 힘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보아하니 본래 힘의 10분의 1조차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지금의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나는 그대와 다르게 완벽한 화신체를 얻었다! 인간으로서도 초월자의 격에 다다른 몸이지. 거기에 비해 그 인간의 육체는 당장이라도 부서지기 직전이 아닌가!】
나는 같잖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제 분수를 모르는 놈이군.”
【여전히 제 분수를 모르는 놈이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단탈리온의 전신에서 피어난 마기가 사방을 뒤덮는다.
공간 곳곳에 거대한 문이 열리며, 단탈리온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낸다.
온갖 종류의 악마들.
지옥에서도 귀족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고위급 악마들이다.
수 천 마리에 달하는 군단이 현현한다.
“크르르르르르!”
“우아아아어어억!!”
한낱 인간으로서는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광경.
공중에 떠오른 단탈리온이 호탕하게 웃는다.
【이참에 그대를 꺾고서 나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최하위 마신이 아닌 최상위 마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보아라! 아스모데우스여! 이곳은 지옥이 아니라 인간계다! 네가 감히…….】
뿌득!
단탈리온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서 퍼져나간 응축된 마기.
검은 구체가 잔잔한 호수 위에 파문을 일으킨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펄럭.
두 쌍의 날개가 펼쳐지며, 타천을 상징하는 검은 고리가 흑색 빛을 뿜어낸다.
“무의 경계(境界). 제 1형(形).”
【무의 경계(境界). 제 1형(形).】
구체에서 뻗어나간 잔물결이 몸집을 키우며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운다.
“타천(墮天).”
【타천(墮天).】
──퍼엉!
잔물결에 닿은 악마들이 소멸한다.
이곳을 가득 메웠던 수 천 마리의 악마들이 일제히 사라진다.
지옥을 돌아가는 것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소멸(消滅).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인 무의 경계.
모든 마기를 무(無)로 되돌리는 능력을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여 만들어낸 이능(異能).
나에게는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대가를 필요로 하는 권능을 그녀는 평범한 공격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게 필살기라면, 그녀에게 이것은 평타와 다름이 없는 것.
순식간에 군세를 일어버린 단탈리온이 허망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대, 대체 이게 무슨……. 분명 본래의 힘에 10분의 1도 지니고 있지 못할 터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내가 다시 한 번 마기를 일으키자 단탈리온의 주위로 펼쳐진 마기가 육각형의 공간을 만들어내 그를 가두었다.
“그래. 네놈 말대로 내 계약자의 육체로는 내 진체가 지니고 있는 힘의 10분의 1도 채 발휘하지 못하지. 허나 그것만으로도 네놈 따위는 충분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나? 기껏해야 1000년 남짓 살아온 애송이가 내가 전력을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댄 것이냐? 설마 게티아에서 보여주었던 장난질들이 내 전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냐?”
【그래. 네놈 말대로 내 계약자의 육체로는 내 진체가 지니고 있는 힘의 10분의 1도 채 발휘하지 못하지. 허나 그것만으로도 네놈 따위는 충분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나? 기껏해야 1000년 남짓 살아온 애송이가 내 전력을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댄 것이냐? 설마 게티아에서 보여주었던 장난질들이 내 전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단탈리온의 육체는 동결된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보자. 단탈리온.”
【지옥에서 보자. 단탈리온.】
푹!
흉흉한 마기를 머금고 있는 검게 물든 손끝이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리고는 심장 형태로 응축된 마기를 빼내어 입안으로 집어삼켰다.
으득. 으드드득.
꿀꺽.
몸 안에 단탈리온의 마기가 깃든다.
나는 이어서 취해야 할 행동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신서(魔神書)의 사본.
촤르르르륵!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빈 공간에 새로운 마신의 이름이 새겨진다.
Daemon, Deus Sapientiae et Florens Dantalion.
예지(叡智)와 개화(開花)의 마신, 단탈리온.
지금까지 권능을 얻어온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마신과의 계약을 통해서 권능을 얻은 것이 아닌, 오로지 힘으로 짓눌려 마신을 종속시킨 것이다.
합의가 아닌 강제.
이로서 나는 단탈리온의 권능인 예지와 개화 또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아스모데우스와 마신서의 사본인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단탈리온의 마기를 흡수했기에 강림(降臨)은 해제되었다.
신격(神格)인 단탈리온은 다시 게티아로 돌아갔고, 화신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다곤 룬델은 본래의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의 몸을 가득 매우고 있던 마기와 권능도 전부 소멸되어 버린 것.
그는 이제 단탈리온의 계약자가 아닌, 평범한 기사가 되었다.
마기를 다룰 수 없는, 순수 자신의 육체 능력만으로 싸워야 하는 기사.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력이 평범하지는 않았다.
마기가 사라졌다고 한들, 그는 룬델 공작가를 대표하는 기사였고 여전히 초월자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으니까.
그가 쌓아왔던 경험과 노력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까지 인 것 같군. 슬슬 네놈의 육체도 한계에 다다랐다. 계약자여. 아마 강림(降臨)의 여파는 너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네놈이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것이야. 내 도움은 여기까지다. 그럼 어디 한 번 보여 보거라. 이 시련을 극복하고, 새롭게 나아갈 것인지 혹은 내 예상대로 파멸로 치닫을 것인지를…….】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전신에 깃든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등에 솟아올랐던 날개가 사라지며, 나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
전신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기고, 정신마저도 피폐하다.
끔찍한 폭언과 저주들이 내 뇌를 헤집는다.
마성(魔性).
뇌가 썩어가는 것 같다.
탁해진 시야가 이제는 점차 붉게 변하고, 내가 보는 모든 풍경들이 새롭게 변모한다.
팔과 다리, 인간의 시체, 기둥과 벽, 무기들이 전부 분홍빛 내장들처럼 바뀐다.
꿈틀. 꿈틀.
…이블(evil)이 보는 풍경은 이런 것일까.
안간힘을 다해 저항한다.
“아직@##^야. 아&$%@!은 할 수 있$^어. 이@3%$로 먹히…면 안 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나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린 내면의 악마에게 맞선다.
아직은…….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기괴하게 뒤틀렸던 풍경이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아… 하아….”
아직 끝이 아니다.
화신으로서의 단탈리온은 소멸했을지 몰라도 룬델 가의 주인인 다곤 룬델은 저기 저렇게 살아있다.
기껏 찢어발겨놨던 신체의 절반도 다시 재생된 상태.
저쪽도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보다는 상대적으로 멀쩡해보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격통.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저주.
끊임없이 되뇌이지 않으면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상태.
그럼에도 끝을 봐야했다.
“자일…….”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머릿속에 들리는 환청 중 하나일 것이다. 환청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현실 속 가족의 목소리부터.
어린 시절 나의 목소리.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애정을 주었던 인간들까지.
저마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지금 들리는 프레이의 목소리 또한 분명 환청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지금 이 순간, 이곳에 그녀가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허나 언제나 상냥하던 그녀가 나를 향해 폭언을 내뱉는 것만큼 끔찍한 경험도 없다.
“쿨럭……. 그래도 마지막은 상냥하게 얘기해주었으면 하는데…… 하필….”
다른 목소리들보다 프레이의 목소리로 내게 폭언을 내뱉는 것이 가장 버티기 힘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전부 부정되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왕이면 다른 목소리로…….
“자일.”
그 순간, 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설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프레이 칼리고가 슬픈 얼굴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