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헛것을 보는 걸까.
하지만 내 피부에 닿는 이 감촉은 진짜다.
아니.
이 또한 마성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다시금 그녀의 투박한 손끝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지 않다. 오랜 시간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프레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얼굴이다.
“정말… 프레이입니까?”
기대감이 든다.
내 눈앞에 서 있는 그녀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나에게만 보이는 환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기대감이.
그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다.
안 그래도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몸이었기에 통증은 배로 느껴진다.
밀려오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가 말한다.
“자일……. 여기서 혼자 뭐하는 겁니까. 왜 이런 꼴이 될 때까지 싸우는 겁니까. 어째서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겁니까. 대체 왜…….”
슬픔이 담긴 목소리.
내 눈앞에 있는 여성은 환상 따위가 아닌 진짜 프레이였다.
그 뒤편을 바라보니 로만이 서있었다.
“주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의 나는 진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육체도 육체지만 정신이 이미 너무 피폐해진 상태.
나는 다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띠었다.
“진짜…… 프레이군요.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돌아가…….”
그녀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화가 난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도 제 걱…정을 하는 겁…니까…?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꽤 많은 시간을 보내며 당신과 가까워졌다 생각했지만 그 마저도 전부 연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제게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설령 거짓이었다 해도 마음만큼은 진실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아는 자일 지그하르트는 대체 누구일까요.”
“……알게 되셨군요. 제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아벨 크로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할튼 칼리고가 얘기를 한 것인가.
혹시 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럼 그녀는 내가 흑마술사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평생 제국민으로 살아온 그녀의 입장에서 나는 그저 이단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 온 것조차 배신감에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일지도 몰랐다.
“프레이 저는…….”
“됐습니다. 자세한 애기는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십시오.”
그녀가 나를 지나치며 검을 바로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향하지 않는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제국 최고의 권력가.
그리고 소드 마스터.
다곤 룬델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이의 전신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른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살기다.
아.
회귀 전을 포함하면 아니다. 아버지의 시체와 유서를 읽었을 때 보여주었던 그녀의 살기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허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평소 내가 알던 프레이가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진득한 살기가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다곤 룬델…….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아직도 뻔뻔하게 그 낯짝을 들고 서 있는 구나! 대체 왜 그랬지? 내 아버지께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런 짓을 벌인 것이지? 평생 검만 휘두르며 제국과 백성을 지키는 것을 삶의 의의로 두신 분이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는 것이냐!”
다곤 룬델이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허나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정신이 나가버린 사람처럼 홀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단탈리온……!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미래를 예지하는 마신이 이까짓 일 하나 예상하지 못한 것이냐! 단탈리온! 대답해라, 단탈리온!”
그 모습을 보던 프레이가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대답해라. 룬델 가의 가주! 다곤 룬델이여! 대체 내 아버지께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우리 가문이 권세를 얻는 것을 시기한 것이냐? 백작 가문 주제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고 그런 짓을 벌인 것이냐? 대체!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대답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전부… 저 놈 때문이다. 자일 지그하르트……. 저 애송이가 모든 걸 망쳤다. 저 애송이만 아니었다면…… 제국을, 이 세상을 내가 집어삼킬 수 있었을 것이야. 전부 저 애송이 때문에!!!”
퍼어어어엉──!
커다란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다곤 룬델의 마력이 폭주한 것이다.
그의 신체 또한 이미 망가진 상태. 제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지금까지 누적된 피해를 고려했을 때 아마 살아남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허나 그는 그런 내 예상을 부정이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썩어도 준치.
마기를 잃었어도 소드마스터라는 건가.
그는 죽을 각오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순간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춘다는 뜻으로.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질러 화려하게 타오르듯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전력을 내는 것을 말한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그가 동귀어진을 할 각오를 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몸 상태는 이미 말 할 것도 없었고, 로만과 프레이가 합공한다고 한들 소드 마스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10초라도 버틸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
생각해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초조해질수록 머릿속 음성들이 더욱 커진다.
그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과 동시에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그려졌다.
그것은…….
다곤 룬델의 검에 의해 프레이의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광경이었다.
뒤늦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예지(豫知).
단탈리온의 권능을 얻게 되어 발현된 미래의 편린인 것이다.
치지지직.
노이즈가 낀 것처럼 머릿속 광경이 일그러지고 이내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었다.
내 앞을 막아선 프레이와 로만.
그리고 잠시 후 나를 포함한 모두가 고깃조각이 되는 광경.
더더욱 구체화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죽음이.
기껏 예지 능력을 얻게 되어 보는 광경이 모두의 죽음이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로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와 연결된 로만은 내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다곤 룬델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든 로만이 오러를 머금은 두 개의 검날을 휘둘렀다.
몇 초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암살에 특화된 살수답게 로만의 검날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지만, 그보다 다곤 룬델의 반응이 더욱 빨랐다.
로만의 검날이 그의 영역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몸이 20등분으로 조각났다.
시체조차 남지 않은 로만은 검은 연기를 피우며 사라졌다.
이번에는 나조차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저벅. 저벅.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며 한 걸음씩 내딛는 다곤 룬델.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마력이 흡사 마기를 보는 것처럼 탁하게 물들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쓰레기들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구나…… 감히 나 다곤 룬델이 이까짓 쓰레기들 때문에 숙원을 못 이루다니……. 찢어 발겨 주마. 시체도 찾을 수 없게 갈기갈기 썰어 살점 하나하나를 씹어 삼켜주마….”
프레이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모든 싸움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선공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나서지를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 예지와는 다르지만 비슷한 것을 그녀 또한 느끼고 있을 터.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예지를 갖고 있다.
바로 생존본능.
그녀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서면 죽는다고.
허나 지금 나서지 않아도 죽는다고.
확정된 죽음.
죽음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내 모든 걸 쏟아붓는다고 한들 그녀의 실력으로 다곤 룬델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0.1%의 확률도 없다고 확신한다.
격이 다르다.
헤비급 격투기 선수가 고릴라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오러도 완벽하게 다루지 못하는 그녀가 초월자를 바라보는 소드 마스터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말이다.
몸이 반이 찢긴 상태에 다곤 룬델이었다 해도 결과는 똑같다.
그만큼 둘 사이의 격차는 확연하다.
1서클에서 7서클이 되는 것보다 7서클에서 8서클이 되는 시간이 더욱 오래 걸린다는 것만 봐도 당연한 것이다.
한 평생 수련을 해도 7서클에서 8서클이 되지 못하는 이들 또한 지천에 널려있다.
그런 그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같은 수준에 올라야겠지.”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탈리온의 권능들.
방금 나는 미래를 보았다.
단탈리온의 권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권능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개화(開花)’의 권능.
대상자의 잠재력을 극도로 끓어 올려 강력한 힘을 선사해주는 권능.
다곤 룬델이 활짝 핀 꽃이라면 프레이는 아직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다.
아니.
다 자라지 못한 묘목(苗木)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자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커다란 거목(巨木)이 될 것이라는 것을.
“……프레이. 당신도 느끼고 있겠죠. 이대로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꼼짝없이 저 자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네.”
“제게 저 자를 쓰러트릴 방법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기꺼이.”
“좋습니다.”
허락은 구했다.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권능 한 번 더 사용한다고 한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
이번에도 권능을 사용한다면 높은 확률로 정신이 망가지겠지.
허나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르스 폰티움(Ars Pontium).”
눈앞에 나타난 마신서의 사본이 저절로 페이지를 넘긴다.
촤르르르륵.
이윽고 단탈리온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에서 멈춘다.
“Daemon, Deus Sapientiae et Florens Dantalion.”
단순히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미래의 그녀가 지닌 재능 그 자체를 현신시키는 것.
한순간이나마 미래의 그녀에게 힘을 빌려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상 이치를 거스르는 힘.
그 대가는──
시전자의 생명력.
내게 남은 수명의 절반을 소모한다.
“개화(開花).”
마신서의 사본이 흑색 빛을 뿜어낸다.
검은 연기 따위가 아니다.
별이 걸린 밤하늘처럼 은은한 검은 빛.
은하수의 물결처럼 신비로운 기운이 프레이의 전신에 스며든다.
이윽고 피어나는 황금색 기둥.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금색 물결이 끝없이 치솟아 하늘 위로 향한다.
존재 자체만으로 공간 전체가 떨린다.
그녀의 발산하는 기운만으로 일대의 대기가 요동친다.
황금빛으로 물든 오색찬란한 눈동자가 눈앞에 적을 응시한다. 잔잔한 호수처럼 한 없이 고요하고, 침착하다.
“…….”
진정한 소드마스터의 재림.
검희(劍姬)의 현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