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요한은 눈앞에 여인을 바라봤다.
룬델 공작가를 상징하는 문양.
흑색 갑옷.
그리고 붉은색 자수.
들어본 적이 있다.
다곤 룬델의 배다른 동생이자, 룬델 가(家)의 사냥개.
“당신이 그 유명한 룬델 가의 사냥개인 아르미 룬델이십니까?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
아르미 룬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요한을 응시했다.
평소에 그녀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기습을 해 왔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완벽한 사냥개로 키워진 그녀는 상대를 물어뜯는 법을 잘 알았다.
어디를 물어야 아플지, 어디를 물어야 고통스러울지 그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그러나 눈앞에 사내는 그러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코가 위험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 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여기서 저 자를 상대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맡은 바 임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과묵하신 분이군요.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만…….”
요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에서 검은 칼날이 솟아올랐다.
촤르르르륵!
청십자회에 일원조차 반응하지 못했던 일격을 요한이 반응했다.
아니, 정확히는 반사적으로 막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계를 푼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 전체에 방어 술식을 새겨두었고,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어둠 속성을 다루는 자가 정말 존재했군요.”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상대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이미 파악한지 오래다. 마법사의 가장 큰 약점은 근접전.
바닥에 깔린 그림자에서 검은 칼날들이 가시처럼 솟아오른다.
척척척척!
동시에 검을 뽑아든 아르미 룬델이 질풍 같은 몸놀림으로 요한을 향해 쇄도한다.
다리의 근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지면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다.
펑!
파공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
어둠의 마나가 깃든 검은 그 형체가 불분명하다.
“공간구속(空間拘束).”
푸른 마나가 깃든 사슬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촤르르르륵.
마나로 이루어진 수 백 개의 사슬들이 아르미 룬델의 몸을 속박한다.
“발화(發火).”
그녀의 몸을 감싼 쇠사슬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화르르르륵!
강렬한 열기(熱氣).
허나 아르미 룬델이 검을 휘두르자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던 화염과 쇠사슬들이 단번에 소멸했다.
그것을 본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 그 자체를 베어버리다니…….”
단순히 검을 휘두른 것이 아닌, 요한의 마법 그 자체를 베어 소멸시킨 것이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없었다.
“룬델 식(式) 절기(絶技) 일점(一點).”
검은 오러를 머금은 검이 요한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쇄도했다.
한 점을 노려서 극한으로 뻗어나가는 찌르기.
방어 마법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러와 검술이 결합된 무투기(武鬪氣).
‘이건… 피해야 한다.’
찰나에 순간.
요한은 5보 뒤로 공간전이(空間轉移)를 사용했고, 아르미 룬델의 검끝은 허공을 갈랐다.
허나 그 위력이 어찌나 강했는지 그녀의 검이 뻗어나간 궤적을 따라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뻗어져 나갔다.
그것을 본 요한이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소문이 거짓이 아닌 것 같군요. 아니. 그 이상입니다.”
“재잘재잘 시끄럽군.”
“드디어 입을 여시는 군요. 원래 그렇게 과묵한 사람이십니까?”
“…….”
다시금 접근하는 아르미 룬델.
그녀가 뻗은 검날이 요한의 어깨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 당황한 것은 요한이 아닌 아르미 룬델이었다.
당연히 피할 거라고 예상했건만 오히려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마법사 주제에 나와 근접전을 하겠다고…?’
어느새 생겨난 마력의 창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물 흐르듯 파고드는 요한.
그의 손에서 창이 춤을 췄다.
기사인 아르미 룬델의 입장에서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도 아니었다.
위력 자체도 뛰어난 편이었고, 무엇보다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창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마법사가 이 정도 실력을…….’
마법사라면 근접전을 못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기사와 마법사가 1대1로 붙으면 기사가 유리한 이유가 그 때문.
그러나 눈앞에 사내는 마법이면 마법, 근접전이면 근접전 전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절단(切斷),”
요한의 주 마법중 하나 절단.
공간 내부에 무형의 칼날을 믹서기처럼 돌리는 마법이다.
처음 이 마법을 겪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 채 고기조각이 되기 마련이었지만 아르미 룬델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무형의 칼날들을 전부 베어버렸다.
허무하게 사라진 요한의 마법.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원천속성은 어둠.
다시금 검을 휘두르자,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온 검날이 요한의 옆구리를 베었다.
모든 감각을 극대화한 요한조차 속일 정도로 빠른 일격.
그의 옆구리에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건 까다롭다는 수준이 아니군요.”
결단을 내린 요한이 마지막 남은 반지 하나를 손에서 빼내었다.
“인정하겠습니다. 그대의 강함을.”
* * *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프레이는 초연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이질적인 감각.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주변 모든 것들의 기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눈으로 보지 않음에도, 귀로 듣지 않음에도 전부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눈에는 지금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있었다.
마나.
대기에 떠도는 아주 미세한 마나.
그리고 결.
세상 모든 것들을 이루고 있는 선과 같은 것이었다.
허나 지금의 그녀는 미래의 그녀의 힘 일부분을 빌려온 것 뿐 이기에 아직 이것들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저것이 사물을 구성하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뿐.
시간이 흘러가는 감각도 다르다.
인지속도 자체가 다른 것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너무도 느렸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소드 마스터인 다곤 룬델마저 그녀가 보았을 때는 이 공간에 있는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생소하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군.’
정확히는 미래의 그녀를 일부분 덧씌운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프레이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겉모습 또한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금발에는 윤기가 흘렀고, 아직 앳된 소녀의 얼굴은 완숙한 여인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평소 그녀가 보여주던 부드러운 눈빛은 산전수전을 겪어 닳고 닳은 초연한 전사의 눈빛으로 변모했다.
거기에 더불어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금색 오러.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오러는 그녀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숨을 내쉬고 뱉는 게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몸에 두르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엉겨 붙어 있었다.
‘이것이 자일 지그하르트의 힘인가…….’
그녀는 호수처럼 깊고 고요한 눈동자로 정신을 잃은 자일 지그하르트를 바라봤다.
전신은 상처투성이에 온통 피범벅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용사 파티에 일원이었고, 수준급의 강화마법을 다루며, 어쩌면…….
마신숭배자일지도 모르는 인물.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
그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다.
너무너무 많았다. 왜 자신을 속였는지,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 왜 내게 잘해준 것인지.
왜. 왜. 왜. 왜. 왜. 왜.
의문은 쉴 새 없이 생겨났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답은 오로지 자일 지그하르트 본인만 해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을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자일.”
프레이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곤 룬델에게로 향한다.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공포가 눈 녹듯 사라졌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저 자를 두려워했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재능이 만개한 지금의 그녀가 보았을 때 다곤 룬델은 소드 마스터 따위가 아닌 그저 반쪽짜리 검사였다.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서 이뤄낸 것이 아닌.
마신의 권능을 이용해 겨우 발만 걸쳐있는 경지.
검의 극의(極意)에 대해서 하나도 깨닫지 못한 범재에 불과했다.
‘고작 저 정도 경지에 이른 것으로 소드 마스터라고 자칭하다니…….’
미물을 바라보는 눈빛.
이성을 잃은 다곤 룬델이 프레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또 빌어먹을 술수를 부리는 구나. 이 버러지들아.”
촤악!
검푸른 오러가 허공을 갈랐다.
자일 지그하르트의 사귀들을 단번에 베어버린 파괴적인 검술.
룬델 공작가의 정수가 담긴 절기였다.
“…….”
프레이는 여전히 제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초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 정확히는 그의 검술을 관찰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당황한 다곤 룬델이 짓이기듯 중얼거렸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무언가 술수를 부린 듯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 계집이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저 하찮은 계집과 자신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마기를 잃었다고 하지만 검술 실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제국을 대표하는 소드 마스터.
한낱 아카데미 생이 자신의 검을 받아낼 리가 없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분명.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계집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아주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황금빛 기운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이 거슬렸지만 자신의 검이 그것을 베지 못할 리가 없다.
다곤 룬델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공간을 찢어발길 기세로.
──서걱!
무형의 검날이 프레이가 서 있는 공간을 베었다.
“죽어라! 빌어먹을 하르만의 핏줄이여!”
그러나 이번에도 프레이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프레이가 다곤 룬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다곤 룬델은 그녀를 향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프레이는 계속해서 그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다곤 룬델의 눈에는 자신의 검이 그녀에게 닿으면 그저 소멸되는 것으로만 보였다.
허나 그것은 그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일 뿐.
사실은 그의 검이 닿기도 전에 프레이가 그의 검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마지막 걸음.
다곤 룬델의 눈앞에 도착한 프레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까지 받쳐가며 이룩해낸 검술이 고작 그 정도인가…?”
“네놈 따위가 뭘 안…….”
프레이가 손가락 한 개를 움직이자, 황금색 빛줄기가 다곤 룬델의 몸 전체에 선을 그었다.
────.
몇 번을 베었을까.
100번.
아니 200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수 천 번을 베인 다곤 룬델은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잘게 썰려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