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끝이 났다.
프레이는 초연한 눈동자로 눈앞에 다곤 룬델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다곤 룬델이었던 것을 바라봤다.
검의 극의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검은 다곤 룬델의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만 보이는 선을 따라 검을 휘둘렀고, 그 결과 다곤 룬델은 문자 그대로의 소멸을 맞이했다.
본인의 기운을 갈무리하던 프레이가 씁쓸한 듯 중얼거렸다.
“……지독하리만큼 허무한 최후로군요.”
그의 죽음에 동정을 느끼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동안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지독히도 괴롭혔던 인간의 최후가 고작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 뿐.
고작 이 정도 복수로는 그녀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똑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뒤편에서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던 자일 지그하르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폐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고, 전신은 피투성이에, 한쪽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식을 놓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뻗자, 다곤 룬델의 시체 위에서 검은색 연기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다곤 룬델을 구성하는 영혼이었다.
프레이의 검에 의해 영혼이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마기를 끌어올린 자일 지그하르트가 그의 영혼을 압축한 뒤 레비아탄의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프레이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이렇게 쉽게 죽이기에는 프레이도 아쉽지 않습니까? 솔직히 쉽지는 않았지만……. 이런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프레이 당신이 원하는 복수는 아닐 테지요.”
그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던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어라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자일은 정말 마신숭배자였군요……. 그럼 용사 파티의 보조 마법사인 아벨 크로이도 사실은 마신숭배자였다는 걸까요.’
그간에 일들이 증명하듯 그가 흑마술사일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 확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드는 것이다.
자신에게 권능을 사용한 것도 그렇고.
방금도 죽은 이의 영혼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않았나.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자일 지그하르트는 힘겹게 숨을 쉬며 말했다.
“이… 일이 전부 끝나는 대로 프레이 당신이 궁금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프레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기운들도 전부.
권능의 사용시간이 끝이 난 것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로감.
갑작스럽게 덮쳐온 고통에 프레이가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검을 바닥에 꽂아 중심을 잡고서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의 검격들을 베어내고, 나아가 그의 몸을 도륙 냈을 때에 그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이.
사람을 죽이고 나서 이 정도의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정말 내 손으로 다곤 룬델을 죽인 것인가……. 아버지……. 제가 저희 가문의 복수를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지금은 전부 사라진 상태였지만 언젠가 자신도 이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로부터 나오는 믿음과 자신감이 이제는 그녀의 인생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준.
장본인이 바로 자일 지그하르트라는 사실.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많은 것들을 숨기고, 심지어 흑마술을 다루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지만 …….
그와 별개로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도 안다.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주고, 나아가 가문의 멸망을 막아주고,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나와 가문을 이용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뭐가 달라질까?
그가 악마고, 마신이고, 마족이고, 악의 편이라고 하여도 결국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구원해준 것은 잘나신 라파엘이 아닌 흑마술을 다루는 자일 지그하르트가 아닌가.
의도가 무엇이든, 무엇을 원했든, 나와 가문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꺼내 준 것은 다름 아닌.
…자일 지그하르트라는 말이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확신이 섰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항성과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몸을 눕히며 인상을 구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저주와 폭언. 그것들이 이제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미 한 쪽 눈으로 보는 시야는 정상적이지가 않다.
그의 시선에 비친 인간들이 전부 촉수, 장기, 근육 등 붉게 꿈틀거리는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차오르는 그런 끔찍한 것들.
심지어는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코에서도 냄새가 느껴진다.
1년간 씻지 않은 노숙자의 환부를 잘라 나온 고름을 맡는 냄새가 그나마 적합할 수 있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빨리 이곳을 정리해야 해…….’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마성이 뇌를 좀먹는 것도 느껴진다.
가주인 다곤룬델이 죽었지만 룬델 가문에는 아직도 많은 기사들이 남아있다. 거기에 청십자회에 일원들 또한 이곳을 향하고 있기에 마주치게 되면 일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테레사.”
“…….”
“살아있나?”
“…아직 숨은 붙어 있다.”
양팔이 잘린 테레사는 멍하니 다곤 룬델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죽은 것인가. 나의 아버지는.”
“그래. 죽었다. 다곤 룬델은.”
“……그렇군. 정말 죽은 거군.”
믿기지가 않는다.
그 괴물 같은 아버지가 죽었다.
그것도.
칼리고 가문의 어린 검사에 의해.
황실의 기사단장까지 역임했던 그녀의 눈에도 프레이 칼리고의 검술은 아름다웠다.
절제된 강함.
결코 부러지지 않는 담대함.
그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검의 길에 극의(極意)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본연의 힘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테레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은 틀림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슬픔. 후련함. 괴로움 등 많은 감정들이 응축된 눈물이었다.
자신의 양쪽 팔을 베어버린 인간이여도 그녀에게는 아버지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고,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악마임에도 그녀의 기억 한 켠에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아버지다.
마땅한 대가를 치룬 것이라고는 생각하나 눈물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감상에 젖은 그녀에 마음을 짓밟기라도 하듯 자일 지그하르트에 말이 들려왔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테레사.”
“…….”
“네 손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일일 것이다. 가문의 핏줄로서 악마를 죽였으면 그 모든 책임을 떠안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라. 그 악마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간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
자일 지그하르트는 품에 있던 최상급 회복약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팔이 없는 테레사는 두 다리로 그것을 받았다.
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정작 테레사 본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했다.
어차피 지금의 자신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물약이다.
“마셔라.”
그리고는 어떻게든 마기를 끌어올려 일리야를 불러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주변의 모든 잡음이 전부 나를 향한 저주로 들린다.
잠깐이면 된다. 잠깐이면.
“일리야. 회복시켜줘.”
새하얀 유령마에서 내린 일리야갸 바닥에 떨어져 있던 테레사의 양팔을 쥐었다.
흙과 불순물들로 인해 절단면이 상당히 더러운 상태였으나 그녀가 신성력을 끌어올리자 순식간에 본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프레이는 놀란 눈동자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낯이 익다고 생각했더니 과거 자신들이 입학시험을 치룰 때 마주쳤던 듀라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기는 했으나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분이 그때 그 듀라한이라니…….”
그녀 본인도 모르게 존칭을 쓸 정도로 거룩한 존재감.
테레사에게 다가간 일리야가 그녀의 절단면에 두 팔을 붙여주었다. 백색 기운이 그녀를 감싸자 절단면과 잘려나간 팔 사이에 상처가 점차 아물어들기 시작했고, 그제야 테레사는 자일 지그하르트에게 건네받은 물약을 마셨다.
순식간에 팔이 아문 테레사.
그녀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고, 일리야는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뒤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어루만져준 뒤 소멸했다.
자일 지그하르트의 정신력이 거의 끝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과 콧구멍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맙다. 자일 지그하르트.”
“고마우면 이제부터 네 할 일을 해라. 테레사. 마침 저기에 오는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익숙한 얼굴의 소년과 두 명의 흑기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흑기사 두 명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니 소년이 억지로 이곳까지 데려온 듯 했다.
“사딘 님! 정말 안 됩니다! 지금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가주님께서도 분명 화를 내실 겁니다!”
“맞습니다. 다른 기사들이 오기 전까지는 방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제가 수차례 얘기했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알면 가주님 뿐만 아니라 단장님도 아마 화를 내실 겁니다.”
“그 입들 닥쳐! 이 저택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아버님 옆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거 아니야? 저택이 그렇게 위험하면 방안에 쳐 박혀 있을 게 아니라 아버님 옆으로 가야지. 그리고 그런 나를 지키는 게 네들이 해야 할 일들이고. 안 그래?”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아버님은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주변을 둘러보던 사딘 룬델이 테레사와 그 일행들을 발견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딘 룬델. 자신의 누이를 향한 애정 하나는 남들과 확연히 달랐다.
“누님! 저입니다, 사딘! 대체 거기서 뭐하고 계신 겁니까.”
옆에 있던 자일과 프레이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저 쓰레기들이 누님을 괴롭힌 겁니까? 걱정 마십시오. 누님. 제 곁에는 두 명의 흑기사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저 놈들을 죽이라고 명할 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아! 누님의 실력을 못 믿는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단지 누님의 마음씨가 너무 곱고 연약하니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이 그걸 이용해서 접근하려 들었겠지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테레사.
“…….”
사딘은 옆에 있던 흑기사 두 명에게 프레이와 자일 지그하르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테레사가 사딘 룬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그걸 발견한 사딘 룬델이 기쁜 듯 소리치며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누님!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
그저 발을 내딛을 뿐.
흑기사들 또한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자일 지그하르트를 향해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중간에서 마주치는 흑기사들과 테레사.
──서걱!
그 순간, 그녀의 검이 뻗어져 나가며 순식간에 두 기사의 목을 베어냈다.
“……테레…사 님?”
“……어째서?”
털썩.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두 흑기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딘 룬델.
“누…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동생아…….”
“예…?”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란다.”
“그게 무슨…….”
──푹!
그대로 뻗어나간 테레사의 검끝이 사딘 룬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사랑하는 자신의 누이를 바라보는 사딘 룬델.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에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딘 룬델.
너무도 사랑하는 누이가 자신을 해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어쩌면 부모보다도 더욱 사랑했던 자신의 누이. 일그러진 사랑이라 규탄할 정도로 집착하며 사랑하던 단 하나 뿐인 누이가 자신을 찔렀다.
“누…님…?”
더욱 깊게 검을 박은 테레사 그를 안아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지옥에서 보자구나. 사랑한다. 사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