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정말 내 눈앞에 있는 저 작은 인형이 신이라는 말인가…….
살면서 수 백, 수 천 번 라파엘을 부르짖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허나 태어나 처음 보는 신이 마신(魔神)….
그것도 지옥의 최상위 신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자일이 없을 때 방안에서 저 인형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설마 이것도 불경죄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이미 마신이잖아. 마신한테 불경죄 같은 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마음만 먹으면 나 따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을 텐데…….’
홀로 상념에 빠진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 따위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일 지그하르트를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있냐고 물었다.
그 말은 각성에 돌입한 자일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허나 목숨을 걸 수 있냐는 대목에서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제… 목숨 말입니까.”
【그래. 못하겠느냐? 아까도 말했듯 이것은 도박이다. 너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도박. 목숨을 건다고 한들 결코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지. 내 계약자도 원래대로 돌리지 못하고, 너는 너대로 죽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프레이는 상공에 떠 있는 인형을 바라보며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 목숨 따위로 자일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아스모데우스 인형이 피식 웃었다.
【내 마음에 든 인간들은 하나 같이 나사가 빠져 있었지.】
그 옆에 있던 요한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시여. 정말 자일 군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습니까?”
아스모데우스의 시선이 요한에게로 향했다.
허나 당장 입을 열지 않고 유심히 그를 지켜보는 아스모데우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마치 그를 관찰하는 듯 했다.
【이것 봐라? 그동안 어디 숨어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하……. 이 또한 인과인가. 하필 계약자에 주위에 이런 인간들이 죄다 모여 있다니.】
남들이 듣기에는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들렸지만 요한은 아니었다.
‘역시 최상위 마신은 내 힘의 원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그래. 이것도 인연이겠지. 나태한 인간아. 네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아까도 말했듯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마성에 사로잡혀 이블이 될 수도 있지. 그 과정에서 애꿎은 저 인간 여자아이의 목숨만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요한도 알고 있다.
사실 그를 되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껏 수많은 서적과 학문, 사례들을 공부해왔던 요한이었지만 이블이 된 인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문헌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스모데우스가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나지막이 말했다.
【나 또한 이블이 된 인간이 제 정신을 찾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아르스 디에고였다.
“단 한 명이라면…….”
【시온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가문의 초대 가주이자, 너희 인간들에게는 악룡 파프니르를 토벌한 용살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
이 말을 들은 이들 전부가 상당히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당황한 것은 다름 아닌 아르스 디에고였다.
“……허어. 이건 상당히 뜻 밖에 얘기인데. 개파조사(開派祖師)인 초대 문주(門柱)께서 이블이 되는 것을 극복했었다고?”
【네놈. 시온 지그하르트를 아느냐?】
아르스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문파에 초대 문주(門柱) 되시는 분이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스모데우스.
【문파…? 문주…? 시온 지그하르트. 그 놈은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건지……. 그러니까 네놈이 시온 지그하르트의 명맥을 이었다는 애기냐? 본인이 직접 세운 가문은 어따 팔아먹고 웬 이상한 놈에게…….】
“정확히 얘기하자면 문파를 세운 것은 그 후대입니다. 초대 문주께서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창술의 명맥이 이어지기를 원하였고, 그로 인해 제자를 들여 자신의 창술이 후대까지 이어지기를 명하였습니다. 그의 유지를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이 창천문(窓天門). 거창하게 문파라고 부르고는 있으나 사실 일인전승(一人傳承)으로 이루어진 스승과 제자에 불과합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알고 있지 못하는 시온 지그하르트의 행적들.
자신이 모르고 있는 동안 그가 이 대륙에 남겨 놓은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었지. 대체 뭘 준비하고 있던 것이냐. 시온 지그하르트.’
【그래. 그 별난 놈이 벌이는 기행을 이해하려 드는 게 멍청한 짓이지. 어찌됐건 내가 본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성(魔性)을 극복해내고 이블이 되지 않은 인간은 시온 지그하르트다. 공교롭게도 같은 지그하르트의 핏줄이지. 선대가 극복해냈다면 후대 또한 극복해낼 가능성 정도는 있지 않겠느냐. 물론, 시온 지그하르트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물 같은 놈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전해볼만한 가치는 있겠지.】
요한이 진지한 얼굴로 상념에 잠겼다.
‘인간이……. 마성을 극복하고, 되돌아온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었던가. 그러한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 이 또한 우연인지, 운명인지 자일 지그하르트 또한 시온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후예. 그라면 선대와 같은 사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그때는 마신과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초월자인 아르스 디에고 님이 곁에 있다고는 하나…….’
그 이후에 이야기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방법이 실패하더라도 초월자인 아르스 디에고가 있다면 고치 상태에 자일 지그하르트를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허나 관건은 그의 계약자인 마신이 잠자코 두고 볼 것이냐는 것.
만약 그녀가 나서게 된다면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초대 문주……. 아니, 시온 지그하르트께서는 마성(魔性)을 어떻게 극복하셨다고 합니까?”
【……그냥 했다고 한다.】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아르스 디에고.
“…그냥 했다고요?”
아스모데우스도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했다고 말했다. 천사조차 오염시켜버리는 마성을 한낱 인간이 정신력만으로 극복해낸 것이지.】
“무슨 그런 괴물이…….”
폐관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아르스 디에고였지만 자신이 사용하는 창술을 고안해낸 시온 지그하르트가 마성을 극복하고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다는 얘기를 듣고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육신으로 이블이 되는 것을 극복해낸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넘어야 할 새로운 벽이 보인 듯 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것은 그저 정신력만으로 극복했다는 것.
초월자가 된 자신조차 가능한 영역일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프레이가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내 계약자가 시온 지그하르트만큼 괴물 같은 정신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저기 저 고치가 보이느냐? 지금 저 고치는 일종의 방어기재 같은 것이다. 자일 지그하르트가 진정한 모습으로 부화하기 전까지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이지.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자일의 정신은 마성(魔性)에 침식돼 오염되고 있을 터. 본인이 빠져 나올 수 없다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프레이. 너는 자일 지그하르트의 무의식에 직접 들어가 그를 마성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이 다급히 소리쳤다.
“마신이시여!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데 하물며 이블이 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의 무의식에 강제로 침입하는 행위는 굉장한 위험을 동반한다.
그런데 자일 지그하르트는 평범한 인간도 아니었다.
각성에서 깨어나게 되면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대재앙(大災殃).
그런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말해보거라.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가?】
말문이 막힌 요한.
“그건…….”
본인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것을.
설령 다른 방법이 있다고는 해도 자신은 모른다는 것을.
오늘만큼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하겠습니다. 그 정도 각오는 진작 한지 오래입니다. 제가 직접 자일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그를 구출해오도록 하겠습니다.”
“프레이 양…….”
프레이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며 광채를 뿜어내는 그녀의 눈동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자일 군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 그에게 못했던 말들은 전부 털어놓을 겁니다.”
변했다.
그녀는 이제 요한이 알던 프레이가 아니었다.
복수심과 책임감에 사로잡혀 끝없이 자기 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린 소녀가 아니었다.
모든 번민을 극복해내고 깨달음을 얻은 소녀는 그 무엇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저 하늘에 걸린 별처럼.
“무력한 스승이라 미안합니다. 부디 제 또 다른 제자를 구해주십시오. 프레이.”
“걱정 마세요!”
【준비 되었느냐?】
“네!”
【그래. 그럼 지금부터 자일 지그하르트의 무의식으로 보내주도록 하마. 그곳에서 무엇을 보건, 어떤 것을 듣건,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 너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 그 끝에 네게 바라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프레이가 침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모데우스가 마기를 끌어올리며 손짓을 하자 공간이 분리됐고.
잠시 후.
프레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태어나 처음 보는 형태의 방.
처음 보는 형태의 가구. 이상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이곳이 자일의 무의식……?”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침대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종이 같은 것이 놓아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언어인데…….”
어디선가 울먹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방 밖인 듯 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방을 나간 나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채 연신 손발을 비비는 아이를 바라봤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아이.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얼굴에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덧씌워진다.
“자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