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분명 나는…….
그래. 전투를 끝마치고, 마성에 사로잡혀 이블(evil)이 되었었다.
내 머릿속을 울리는 끔찍한 음성.
뇌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감각.
쉴 새 없이 끓어오르는 지독한 살의(殺意).
잊을 수 없다.
그 기억들이, 그 감각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만든 고치 속에서 부화를 기다리는 나비가 되었었는데…….
어째서 지금 눈앞에는 프레이가 있는 것일까.
그녀가 왜 나를 바라보며 저토록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전부 내가 만들어낸 꿈일까.
결국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대의를 위해서 희생한 것도 아닌…….
그저 마성에 잡아먹혀 이블이 되는 엔딩이라니.
참 한심하다.
그래. 이게 나 다운거지.
그러니까 내 눈앞에 있는 프레이도 결국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겠지.
이곳은 나의 도피처이며, 나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감옥이니까.
내 죄책감들이 둥둥 떠다니는 감옥…….
그래도 좋다.
마지막에 마지막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녀가 나를 향해 사랑 고백을 해주었으며, 심지어는 먼저 입술을 맞추었으니까.
너무 내 사심이 많이 들어간 꿈이라는 게 여기서 티가 난다.
“자일! 왜 멍 때리고 있어요? 아직도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환상 주제에 더럽게 실감나네.
“환상 주제에 더럽게 실감나네.”
그 말을 들은 프레이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내 머리에 딱밤을 갈긴다.
아.
아프다.
통증이 느껴진다.
“환상? 참나. 아직도 이게 꿈인 줄 아나보네? 누구는 목숨까지 걸고 구하러 왔구만……. 하긴, 뭐 자일이 나를 위해 개 고생한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 발의 피죠. 하하, 제가 어떻게 새 발의 피라는 말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프레이? 정말 환상이 아니에요?”
“그렇다니까요! 봐봐요!”
다시금 내게 입술을 맞추는 그녀.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인다.
“어때요? 따뜻하죠? 저 여기 있어요. 환상 따위도 아니고, 정말 자일을 구해내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니까 이제 좀 믿어주세요.”
“……정말. 정…말 프레이에요…?”
“네. 그렇다니까요.”
“…아아. 프레이. 프레이. 프레이. 프레이.”
내가 갑작스럽게 그녀를 껴안자 이번에는 그녀가 당황하는 듯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건 내 죄책감이 형상화된 끔찍한 비명소리 밖에 없었다.
이 고치에 갇혀 내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과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과거를 보았다.
얼마나 보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내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실에 커진 티비를 멍하니 보는 것처럼 내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계속해서 보았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 나타난 프레이.
그녀를 보자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곳이 내가 만든 무의식 속이라도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으며, 그녀의 심장은 열심히 뛰고 있었다.
“다 괜찮아요. 제가 이곳에 왔잖아요. 괜찮아요. 자일.”
내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신의 안정을 찾아준다.
슬슬 기억이 떠오른다.
이 무의식 속에서 그녀가 행했던 일들이.
그녀는 나의 삶을 전부 엿봤다.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이 세계에 온 이후의 삶까지.
전부.
“……내가 원했던 거였어. 내가 원해서, 프레이가 나에 대해서 알아주기를 바라서 무의식적으로 그동안의 일들을 보여준 거였어.”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아니면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현실이 무서워 도피를 하기 위해 소설 속 주인공을 창조하고, 몰입했던 그 당시에 여리고 작은 아이가.
“전부 봤군요…….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다 알아버렸네요. 제가 어떤 인간인지…….”
“네. 잘 알았죠. 이제는 이 세상 누구보다 제가 자일에 대해서 잘 알겠죠?”
“……미안합니다. 실망시켜드려서. 제가 이런 인간이라 정말 미…….”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다시 부드럽게 입 꼬리를 올렸다.
“제가 아까 뭐라고 말했죠? 평생 자일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했죠? 자일의 모든 걸 보고 나서 내린 결정이에요. 알죠, 제 고집? 한 번 정한 거는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거. 제가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으니 자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요.”
“……읍읍.”
“아!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가 내 손을 이끌고 장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내가 물었다.
“프, 프레이? 갑자기 왜…….”
그녀의 손에서 생성된 황금빛 검이 바닥에 꽂혔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고 백작가의 차기 가주이자 장차 제국 최강, 아니 대륙 최강의 기사가 될 나 프레이 칼리고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나의 영원한 주군이 될 자일 지그하르트에게 맹세합니다. 나는 그대의 가장 용맹한 첫 번째 검이며, 결코 부러지지 않는 마지막 검이고, 내 생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그대를 위해 검을 휘두르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는 프레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주군?”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을 뻗었고.
그녀는 내 손을 확 낚아채며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것으로 저는 영원히 당신의 검이 되었습니다. 주군.”
“……프레이. 이런 선택을 해도 정말 후회하지 않…….”
“한 번 더 물어보면 저 진짜 화낼 겁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까 자일은 그저 고맙다고 다독여주시면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너무도 단호한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말했다.
“고, 고마워. 프레이.”
“평생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자일.”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
나를 향한 애정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져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허나 그녀의 마음 자체는 너무 아름답고, 고마웠기에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자, 자일!?”
아까 전 본인이 입을 맞추었을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그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든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프레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게 있습니까? 아까는 본인이 먼저 해놓고도 아무렇지 않던데…….”
“그거랑 그거랑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네! 아주 많이! 다릅니다!”
고개를 갸웃 거린 나는 마침 떠오른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프레이. 저희 이제 슬슬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프레이도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지금처럼 말을 하는 게 더 편합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그냥 동급생도 아닌 기사와 주군의 관계! 기사가 되어 제가 모시는 주군께 어찌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내가 말했다.
“명령이라면요?”
당황한 프레이.
“며, 명령이라면……. 받들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단 둘이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하는 걸로 하죠. 아직은 익숙지 않을 테니 억지로 하지 말고 천천히 하도록 하세요.”
“……네. 자일도 편하게 하세요.”
“…그, 그래.”
괜히 말을 꺼낸 것인지 어색한 기류에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봤다.
지옥처럼 붉게 물든 허공을.
그것을 보니 여기서 이리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고치 상태가 되어 끔찍한 악몽을 꾸었지만 밖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7인의 초월자 중 한 명인, 창천(槍天). 아르스 디에고.
가장 밝게 빛나는 별, 룩스(Lux)의 칭호를 하사 받은 초월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거, 그가 로키 산맥 중턱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설정을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됐건 이대로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그 괴물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
최악의 상황으로는 내가 깨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통째로 고치를 날려 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레이. 우선 이곳을 나가죠.”
“좋아요. 근데 어떻게 나가죠?”
“그…러게요?”
“……네?”
이 공간 자체가 나의 무의식의 일부이고, 내가 직접 만든 것이기는 하나…….
다들 알다시피 내 의지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나가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음…….
어차피 내 무의식이니 간절히 바라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무너져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공간.
……이게 되네?
* * *
【호오……. 그 아이가 정말 성공할 줄이야…….】
고치에서 빠져 나온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스모데우스…? 교수님…?”
“자일! 괜찮은 겁니까? 정신이 들어요?”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치에서 쏟아진 정체불명의 액체로 인해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망할 계약자 놈.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할 거면서 왜 그리 무리를 한 것이냐!】
아스모데우스의 인형이 날아와 내 머리를 콩하고 내려찍었다.
“걱정했어?”
【거, 걱정은 무슨…! 위대하신 이 몸이…! 네, 네놈 따위에 걱정을 할 성 싶으냐! 그저 나와의 계약을 다 이행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까봐 짜증이 났던 것 뿐 이니라. 네놈이 그렇게 사라진다면 내 원대한 꿈은 누가 이뤄줄 것이냔 말이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프레이가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자일. 아스모데우스 님 같이 행동하는 분을 자일의 세계에서는 츤데레라고 부르는 게 맞죠?”
정답을 맞췄으니 칭찬해달라는 듯 해맑게 웃는 프레이.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있는 것은 프레이 뿐 만이 아니었다.
【츠, 츠, 츤데레? 위대한 지옥의 마신인 이 몸을 츤데레라고 한 것이냐? 계약자의 무의식에 들어가고 나더니 이제는 네년이 정신이 나간 것이냐!】
‘프레이와 아스모데우스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게 되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후에도 둘은 시덥잖은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 둘을 무시한 채 내 몸을 살폈다.
‘날뛰던 마기가 갈무리됐다. 심지어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목소리들 또한 들리지 않아.’
가볍게 마기를 끌어올렸더니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농도 짙은 마기.
“이, 이게 무슨…….”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모든 형태의 흑마술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지금 상태라면 권능을 사용하더라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몸을 움직여 봤다.
주먹을 쥔 뒤 가볍게 팔을 뻗었다.
──후우웅!
시원하게 뻗어나간 주먹의 궤적을 따라 파공음과 함께 돌풍이 불었다.
“…미친.”
강화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이번에는 두 다리에 살짝 힘을 주어 점프를 했다.
그대로 시원하게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나의 몸.
내 눈앞에 마주한 것은…….
“새?”
였다.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너 또한 마성(魔性)을 극복했으니 이제 신격(神格)을 얻게 된 게 당연하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