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아카데미에 돌아온 이후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예상했던 것처럼 제국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개국공신 가문으로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룬델 공작가문이 알고 보니 마신을 숭배하던 이단자이며, 수많은 영지민을 제물로 받쳤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차기 가주가 된 테레사 룬델도 모든 사실을 인정했고, 라파엘 교단 측에서도 정식으로 성명을 발표했으니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테레사는 본인의 입으로 당당하게 룬델 가의 모든 치부를 공개했다.
동생인 사딘 룬델과 아버지인 다곤 룬델이 저지른 모든 만행들부터 그동안 극비로 숨겨왔던 추악한 역사까지도 전부.
‘룬델’이라는 이름이 쌓아올린 명성은 결국 애먼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철옹성이었다는 사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핏줄에 의해서 공개된 것이다.
백성들은 분노했고, 테레사는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며 도리어 담담하게 반응했다.
모두가 멸문(滅門)을 예상했다.
제 아무리 개국공신 가문이라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중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마신을 숭배한 것도 모자라, 죄 없는 영지민들까지 희생시킨 구제불능의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황제의 판단은 달랐다.
룬델 가의 모든 재산과 영지를 몰수하고, 룬델 가의 직계 혈족들은 평생을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봉사할 것.
그것이 황제가 내린 명령이었다.
즉.
황실(皇室)이 룬델 가(家)를 그대로 꿀꺽했다는 의미다.
테레사의 자식도, 그 자식도, 그 자식의 자식도, 영원히 황실의 충직한 검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맹세 따위가 아닌, 물리적 속박력을 지닌 맹약이었다.
테레사 룬델의 영혼에 새겨진 주박.
황실의 명에 절대 복종할 것.
이것은 혈통에 새겨진 저주였다.
누구든 황실의 핏줄을 이은이라면 룬델 가의 핏줄에게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처음 그 소식들을 백성들은 너무 약한 처벌이라며 길길이 날 뛰었으나,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제국을 능멸하고, 죄 없는 백성들을 희생시킨 죄인들에게 ‘죽음’이란 판결은 처벌이 아닌 구원일 뿐. 진정한 의미의 속죄는 평생 제국과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짐은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 일회성에 죽음이 아닌, 영겁의 세월 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검으로 살아라. 그것이 내가 죄인에게 내리는 처벌이니라.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처음에는 너무 약한 처벌이라 생각했으나 황제의 말을 들어 보니 이것이야 말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처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여론은 금세 우호적인 쪽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황실의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고, 권력 또한 배로 강해졌다.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룬델 가는 명실상부 귀족파의 수장격이었다.
황권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작 가문이란 얘기다.
허나 그런 가문이 하루아침에 쫄딱 망했고, 그걸 황실이 꿀꺽 삼켜버렸으니 이제 균형의 추가 완전히 기울어져 버린 셈.
황실 입장에서는 전력 손실도 손실이지만, 아마 그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룬델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그 뿌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의 핏줄을 구속할 수 있는 자물쇠를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테레사를 잃게 된 게 살짝 아쉽긴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내가 건 암시가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시간이 날 때 그녀의 상태를 한 번 보는 게 좋겠군.’
황실 측에서 어떤 형태의 맹약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신이 된 나라면 그것을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레사 룬델은 이대로 잃기에는 아까운 전력이었다.
예전에는 가진 힘에 비해 크게 이용가치가 없었다지만, 지금은 다르다.
본인 스스로 불살(不殺)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나가는 산적처럼 자신과 아예 관련이 없는 이들이 아닌, 본인이 사랑하는 가족들.
자신의 핏줄을 스스로의 손으로 죽였다.
이 사실 만으로도 그녀는 앞으로 더욱 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리미트가 깨졌으니 룬델 가의 핏줄과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그녀라면 더욱 더 성장할 테지.
그러한 일들이 있는 동안 나는 추기경인 토마스 이스카리옷을 만났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그와도 나눠야 할 얘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첫 번째로 룬델 공작가의 가주이자 소드 마스터인 다곤 룬델을 대체 누가 죽였느냐에 대한 얘기였다.
내가 아무리 대외적으로는 영웅 지그하르트의 핏줄이라 할 지어도 내가 그를 죽였다고 말하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딸려오는 주목 또한 사양이고.
그렇다고 프레이가 그를 죽였다고 사실대로 고해도 믿지 않을 터.
오히려 마신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닌지, 흑마술을 사용한 것이 아닌지 등 이런 쪽의 오해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개연성만 충족시켜준다면 상당히 폭 넓게 변명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불세출의 천재이자, 아카데미 최강의 마법사 중 한 명인 요한 크루이트를 팔아먹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사전에 그에게 허락을 구하려고 했으나 아카데미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가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나 일단은 이 이야기를 끝낸 뒤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어찌됐건 내 얘기를 들은 추기경은 탐탁지 않은 듯 보였으나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어찌됐건 본인들도 거대한 악을 잡아들였으니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닌가.
이 일로 인해 교단 내에 입지도 많이 상승했을 터.
다만……, 그 덕분에 나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라파엘 교단과 더욱 긴밀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약 한 달간 휴교를 결정했다.
이 정도로 긴 시간 휴교를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 축제 때와 마찬가지로 정체불명의 마신숭배자들이 아카데미를 습격한 것이다.
허나 저번 사태 때와는 그 결이 달랐다.
우선 습격한 흑마술사들 전부 아카데미 교수들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이었고, 안타깝게도 아카데미 최강의 전력인 이사장은 황제의 부름을 받아 출타 중이었다.
한 마디로, 이사장이 없는 틈을 타 아카데미를 습격한 것.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초월자인 이사장의 부재. 그 아래에 손꼽히는 실력자인 요한 또한 우리를 돕느라 밖에 있는 상황이었고, 기사학부의 학부장인 맥도웰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아카데미 내부에 상주하고 있는 라파엘 교단의 인원들도 상당수가 임무를 위해 떠났다.
마치 아카데미 내부에 상황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처럼.
핵심이 되는 인물들이 전부 아카데미 밖에 있을 때를 노린 것처럼 보였다.
이는 아직도 내부에 그들의 첩자가 있음을 의미했다.
마신숭배자들의 연합체.
게티아(GOETIA).
그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맥도웰의 쌍둥이 형이자, 마법학부의 학부장인 맥스웰의 냉정하고도 깔끔한 지휘와 학생회 인원들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으나 그 과정에서 S 클래스의 기숙사 건물과 강의실 건물이 반파되어 버린 것.
그 날 목격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심지어 그들은 처음부터 이곳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우리는 하루아침에 숙소와 강의실을 잃게 되었고, 급하게 임시거처로 사용하게 된 것이 지금 이곳이었다.
“……전보다 더 좋아졌잖아?”
“……그러게요.”
나와 프레이가 놀란 듯 얘기하자 샬럿이 가슴을 활짝 내밀며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이게 바로 이 샬럿 메이지 님의 진정한 힘이다! 알겠냐, 이 우매한 인간들아! 호호호!”
그 옆에서 익숙하다는 듯 담배를 꼬나 문 채 한숨을 쉬는 벨라 트레이.
“……며칠 동안 질리지도 않는 듯 매번 같은 소리를 하는 군. 뭐, 어쨌든 한 달 간 아카데미는 휴교다. 아니, 이제는 삼 주 정도 남았겠군. 아마 그 정도면 새로운 기숙사와 강의실이 완성될 테니 정상적인 수업이 가능할 거다.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살도록.”
“네.”
메이지 가문의 재력 덕분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임시거처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백작가나 공작가의 저택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A 클래스의 기숙사 건물과는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저택.
이래서 돈이 중요하다.
‘샬럿이 없었으면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될 뻔 했군.’
심지어 보란 듯이 A 클래스 학생들이 사용하는 기숙사 옆쪽에 위치해 있다.
아마 이 또한 샬럿이 노린 게 아닐까.
이 정도 시설이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숙사가 완성된다 해도 굳이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새로 완성된 기숙사가 이보다 좋을 거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운은 많이 차린 듯 하군.’
지금은 쌩쌩해 보여도 처음 나와 프레이가 돌아왔을 때 샬럿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프레이를 붙잡고 미친 듯이 오열했다.
얼마나 울어대는지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 자존심 강한 샬럿 메이지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었을까.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프레이를 무사히 데려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자일 지그하르트.
재떨이에 담배를 지진 뒤 자리에서 일어난 벨라 트레이가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다음 주에 당분간 너희를 담당하실 새로운 교수님이 올 거다.”
“새로운 교수님이요?”
“그래. 요한 교수가 그렇게 됐으니 그동안 임시로 너희를 가르칠 사람이 필요할 거 아니냐.”
“……그 분이 누구시죠?”
“그건 너희들이 직접 만나서 확인해라. 그럼 난 간다.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그 말을 끝으로 벨라 트레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임시 교수라…….’
그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한은 현재 근신을 명령 받았다.
정식으로 열린 교직원 회의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처음 징계 위원회가 열렸을 때는 근신보다 더 심한 수위의 징계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다행히도 이사장 아슈타르에 완고한 고집으로 인해 근신에서 그쳤다고 한다.
‘근신이라 다행이지…….’
아카데미에 소속된 교수이면서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학생들과 가문의 일에 관여하고, 그 과정에서 여럿을 죽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룬델 가문이 어디 변방에 위치한 작은 가문도 아니고, 제국을 양분하는 최강에 가문과 엮인 일이니 아무리 이사장이여도 결코 쉽게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다행히 그가 이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이라 본다.
‘그게 어찌됐건 나와 프레이 때문에 근신을 받게 된 것은 사실이니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아야 하겠지.’
솔직히 말해 그가 이 정도로 의리가 있는 인간일 줄은 몰랐다.
어느 정도 열정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제자들의 일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설 줄이야.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감동을 받을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이사장도 그렇고, 아르스 디에고 일도 그렇고, 72교단도 그렇고 해결해야 될 게 산더미군…….’
멀지 않은 시일에 아마 여러 곳에서 나를 애타게 불러 제끼리라 예상했다.
‘일단은……. 하르만 백작가로 가야겠군.’
임시 거처를 빠져 나온 나는 내 기척을 완전히 차단하는 흑마술을 두른 채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본래라면 순식간에 저택으로 향했을 테지만 아직도 나는 새로운 몸에 적응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제국의 상황도 살필 겸, 천천히 도시를 거닐기로 했다.
“거기 멋진 오빠~여기 와서 놀다가~잘해줄게~.”
“이리와. 여기야, 여기! 우리가 서비스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오자 벌거벗은 여인들부터 구걸을 하는 거지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디든 양지가 있다면 음지가 있는 법.
별 다른 생각 없이 그들을 지나쳐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거기, 청년, 한 푼……. 한 푼만 주십시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웬 거지가…….
잠깐.
어디서 본 듯 익숙한 얼굴.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내 말 들리오…?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소. 그러니 제발 돈 좀 주시오.”
익숙한 목소리.
‘저 눈매는…….’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명의 사내.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허리를 숙인 나는 그와 눈높이를 맞춘 채 아주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누구야. 제국을 구한 용사, 라스님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