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때는 마왕성에서 탈출 후 약 열흘이 지났을 무렵.
용사 일행은 수도 변방에 위치한 여관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 왜 다시 부른 거야?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알잖아? 이제 와서 다시 마왕성으로 갈 것도 아니고, 이미 제국과 교단에는 마왕이 죽었다고 보고 했고. 우리는 마왕을 처치한 영웅이 되었지. 그럼 된 거 아니야? 이제 각자 입 싹 닫고 서로 모른 척 각자 갈 길 가자고!”
잔뜩 화가 난 듯 신경질적으로 얘기하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
샬럿 메이지의 언니이자, 용사 파티의 메인 딜러.
린 메이지였다.
“그러게요. 용사님. 저도 의문입니다. 당분간은 저희끼리도 접촉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던 거 같은뎀 무슨 일로 저희들을 호출하신 겁니까?”
성녀 리아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형태의 로자리아를 쥔 채 나지막이 말했다.
뒤이어 입을 연 것은 테레사 룬델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라스 경.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녀의 말대로 라스의 안색은 창백했다.
거지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덥수룩한 머리칼과 수염과 흑색의 얼굴빛은 지나가는 꼬맹이가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책상 위에 손을 올린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라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저 안하무인(眼下無人)한 인간이 이토록 진중한 모습을 보인 것은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기 때문이다.
“여신의 가호들이 사라졌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성녀 리아였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책상을 툭 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가, 가, 가호가 사라졌다고요? 전부요?”
라스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부.”
“아니. 대체 어째서…….”
테레사 또한 놀란 얼굴로 리아에게 물었다.
“리아 공. 신의 가호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도 가능한 것이었소?”
그 말을 들은 리아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지금껏 그런 경우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애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가호도 신이 직접 내리는 거니까요. 용사님께서 받으신 가호는 아프니엘 여신께서 내리신 「용사의 가호」와 하르키엘 님께서 내리신 「소망의 가호」인데, 이 두 개다 사라졌다는 뜻은…….”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테레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신들께서……?”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레사 경이 생각하는 바가 맞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긴 하지만……아마 신들께서 더 이상 용사님을 용사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겁니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라스의 표정이 구겨졌고, 그 모습을 본 린 메이지는 활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네년 얘기를 정리하자면 신마저도 저 구제불능을 버렸다는 얘기네?”
“…….”
쾅!
거칠게 책상을 내려친 라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개 같은 년이 뚫린 입이면 단줄 알지?”
“왜? 내 말이 틀렸어? 너 같은 버러지한테 가호를 두 개나 준 신님도 너를 버렸다는 얘기잖아?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너 같은 놈이 용사가 됐을까 생각했거든.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가장 재능 없고, 노력도 안하는 인간이 라스, 너 아니야? 여기 있는 모두가 동의할 걸? 그 병신 같은 아벨 크로이도 너보다는 많이 노력했겠다야.”
참다 못한 라스가 린을 향해 돌진했다.
“그만하시오. 라스 경.”
허나 테레사의 손에 막혀 어쩌지도 못하는 라스.
표정에서는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육체는 그의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다.
린 또한 살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이미 진홍의 불꽃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해보자고? 신의 가호도 없어진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풉. 테레사가 한 손으로 막는 것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
으득.
거세게 입술을 짓이긴 라스가 이내 힘을 풀었다.
파티 처음에는 반반한 외모 덕분에 린 메이지에게 꽤나 호감을 품고 있던 그였다.
성격 또한 상당히 드셌기 때문에 그런 여자는 눕히는 맛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성격과는 정반대라는 것이 느껴졌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바람에 여자로서의 매력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그 대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경멸과 혐오.
그리고 정복욕이 솟아올랐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라스는 오만한 포식자지만 처음부터 강한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은 자신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지금은 일단 원하는 것을 얻을 때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떤 이유에서 가호가 사라진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리 많이 약해진 상태다. 심지어는 수중에 지니고 있던 돈도 전부 떨어졌지. 그렇기에 너희들에게 부탁 하나만 하려고 한다. 그간 동료였던 정을 봐서 돈 좀 빌려줄 수 있겠나? 자리를 잡게 되면 곧장 갚도록 하겠다.”
아무리 그래도 몇 년간 생사를 함께 오고갔던 동료들이다.
그렇게 썩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모두가 침묵했다.
“하……. 정말 아무도 빌려줄 사람이 없는 거냐?”
라스의 시선이 리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요, 용사님도 아시다시피 성직자인 저는 수중에 돈이 없답니다. 미안합니다.”
다른 동료들은 몰라도 리아 만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 거라 생각했다.
마왕을 토벌하는 긴 여정 동안 서로 애틋한 감정을 품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교감 뿐 만 아니라 서로 육체적인 관계 또한 맺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쌍방이라는 것이다.
‘이 개 같은 년이……실컷 즐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뒤통수를 쳐?’
심지어는 그녀가 비밀금고에 따로 돈을 저축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따지고 싶은 말들이 한가득이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나중에 둘이 따로 얘기해.”
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라스는 이제 린 메이지를 바라봤다.
“린. 네가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허나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돈 몇 푼만 빌려줄 수는 없겠냐? 공작 가문의 장녀인 너에게 그깟 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래. 네 말대로 그깟 돈? 썩어 넘치도록 많지. 네가 한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주는 것도 나에겐 일도 아니야.”
얼굴이 활짝 핀 라스.
“…역시 그렇지! 그럼 염치 없지만 한 500만 골드 정도만…….”
“근데 너한테 빌려줄 돈 따위는 없어.”
“…뭐?”
자리에서 일어난 린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봤다.
그녀 특유의 오만한 시선.
누가 봐도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였다.
“너 따위한테 줄 돈은 없다고. 단 1골드도 못 줘. 왜 내가 가호도 뭣도 없는 쓰레기한테 돈을 줘야지? 그럴 바에는 지나가는 거지에게 기부하는 게 더 이로울 거 같은데? 까놓고 말해서 라스 네가 가호가 없으면 대체 무슨 쓸모가 있어. 안 그래, 리아? 너도 그래서 돈 안 빌려준 거잖아?”
“…….”
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라스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래라면 그의 성격상 이 정도 모욕을 듣고서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허나 지금의 자신은 그녀의 말대로 무능력한 인간 그 자체였다.
그 무력감이 자신을 짓누른다.
그저 눈알을 부릅뜬 채 그녀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전부.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라스가 테레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먼저 말했다.
“……500만 골드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만 50만 골드 정도는 가능할 것 같소.”
“…그거라도 좀 빌려줘라. 테레사.”
“알겠소.”
“…고맙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린이 말했다.
“보아하니 할 말 다 한 거 같네.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대로 여관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린. 성녀 리아도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보도록 하죠.”
입구 앞에 도착한 린이 갑자기 멈추더니 이내 뒤로 돌아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아! 그리고 한 마디 더 하겠는데 앞으로는 나 아는 척도 하지 마. 어디 가서 내 이름 하나라도 거론하기만 해봐. 그때는 용사 파티의 린 메이지가 아닌 메이지 공작가의 린 메이지가 나설 테니까.”
“……가지가지 하는 군.”
“그간에 정을 봐서 자비를 베푸는 줄 알아. 너네도 마찬 가지야. 테레사야 귀족들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치겠지만 이왕이면 아는 척 안 했으면 좋겠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냥 과거는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각자 갈 길 가자고. 서로의 앞길에 방해 안 되게 말이야. 그럼 할 말 끝났으니 간다. 내 경고 단단히 새겨듣기 바래. 특히 전 용.사. 라스님. 그럼 함께해서 더러웠고, 앞으로는 보지 말자. 잘 지내 애들아~.”
저벅. 저벅. 저벅.
대형폭탄을 투하하고 유유히 여관을 빠져나가는 린 메이지.
“그,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린 말대로 굳이 저희끼리 아는 척 해봐야 좋을 거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앞으로는 교단 일 때문에 바쁘고요. 그럼 모두 안녕히 계세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아 또한 황급히 여관을 빠져 나갔다.
* * *
“푸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기지?”
“이 얘기를 듣고 어찌 안 웃을 수가 있겠냐. 명색이 용사파티라는 놈들이 조금만 불리해지니까 지들 살겠다고 동료를 버리는 꼬라지라니. 너희들이 무슨 용사야. 그냥 쓰레기 오합지졸들이지. 황제랑 국민들도 알아야 될 텐데 그렇게 물고 빠는 용사 파티의 진짜 모습들을 말이야.”
“……그럴 게 아니라 이참에 나랑 거래를 하는 게 어떤가?”
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거래? 어디 한 번 얘기해봐.”
“네가 나한테 투자를 하는 거다. 내가 다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신의 가호를 한 번 받은 이 몸이 두 번은 못 받을 것 같나?”
“투자라……. 네 말대로 내가 투자를 했다 쳐. 그럼 나한테 득이 되는 건 뭔데?”
“복수다. 내가 힘을 되찾으면 나와 함께 그 빌어먹을 년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너도 그년들을 증오하고 있을 것 아니냐? 네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 그년들에게 복수를 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 샬럿은 명성과 권력 두 가지를 지니고 있고, 리아 또한 마찬가지지.”
“……음. 그거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데?”
라스가 기쁜 듯 소리쳤다.
“그렇지! 너도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지?”
나 또한 그를 마주보며 해맑게 웃었다.
“병신. 내가 아직도 호구로 보이냐? 내가 뭐하러 네놈 따위를 후원해서 복수를 해야 되지? 나 혼자서도 충분한데. 린 말대로 너는 이제 이용가치도 없는 쓰레기잖아.”
“……이 개 같은 새끼가!”
잔뜩 성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라스의 턱주가리를 쥔 채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네가 그렇게 물고 빨고, 애지중지하던 성녀 리아 있잖아.”
턱이 붙잡힌 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노려보았다.
“…….”
“걔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