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한 폭의 그림처럼 몽환적인 판타지 세계의 밤 풍경.
그 옆에 있는 건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이상적인 캐릭터.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화와 행복일까.
감미로움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기에 위험이 될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느끼는 모든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없게 될 테니까.
내가 느끼는 이 안정감과 여유가 두려움과 간절함으로 뒤덮일 테니까.
“……어떤 인간이라는 게 무슨 의미죠?”
역시 나도 아직은 반말보다 존칭이 편하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소천마 천악천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가 궁금한 거에요. 그는 자일이 직접 구상하고, 만든 인물들 중 한 명이니까요. 아,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일의 소설 속 이야기지. 실제 이 세계에서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일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도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내 모든 기억을 전부 본 인물이라는 것을.
내가 구상하고 만든 소설 속 세계와 이 세계는 같은 세계이면서 같은 세계가 아니다.
세계관을 이루는 설정과 뼈대, 텍스트들이 구성요소 일 뿐. 이들은 한낱 창작물 속 등장인물이 아닌 살아있는 인격체들이다.
그렇기에 무수히 많은 변수가 생기고, 나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나비효과가 일어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창조주 따위가 아닌 오히려 관찰자에 가깝지 않을까? 허나 뭐가 됐건 찝찝한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는 그 어떤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나를 받아들여주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분명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의문들을 물 밀 듯이 쏟아냈을 것이다.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이 세계의 천악천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자일이라면 대략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물어본 겁니다. 그래야 저도 다가올 재앙에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프레이는 두렵지 않나요? 이 세계의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고 어차피 죽을 거 가만히 있어야지 하면서 살 것도 아닌데요. 결말이 어찌됐든 저는 저대로 최대한 살기 위해 발버둥 쳐보려고요. 이제야 제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았는데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빛난다.
그녀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다.
그 미소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렇죠. 너무 아깝죠. 저도 이 세상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서도 있지만 이제는 이 세계에도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겼거든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프레이.
“아…….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샜군요. 어쨌든 천악천이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자면 한 마디로……. 음…….”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그 순간.
팍! 하고 떠오르는 단어.
“이레귤러(irregular)입니다.”
“이레귤러요?”
“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판단을 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말 그대로 어떤 세상에 가든 그 세상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수 있는 변수와 같죠.”
“……그 정도 인물이라고요?”
“예. 적어도 제 머릿속 설정에서는 그렇습니다. 저도 이곳에 온 뒤로 처음에 만났던 게 전부라 지금은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허나 그가 가진 재능은 이 세계의 모든 천재들을 다 합쳐도 비할 바가 안 됩니다.”
프레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곧 사당에 도착할 것이다.
“아무리 자일의 애기라도 그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 세계의 모든 천재라면 초월자가 된 이들도 포함이 됩니다. 설마 그들이 가진 재능보다 더 천악천이라는 인간이 가진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가요?”
“…솔직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늘이 내린 무재입니다. 단기적으로 본다면 그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도 여러 명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 끝에는 결국 천악천이 넘어서게 될 운명이지요. 그 또한 저처럼 빙의된 인물이라는 것을 프레이는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그런 ‘설정’이었죠.”
“맞습니다. 그럼 그가 살던 세계가 어떤 세계였는지 아십니까?”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도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그가 살고 있던 세계는 흔히들 무림(武林)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제가 살던 세계보다는 이곳과 닮아 있는 세계지요. 무(武)와 협(俠)을 중시하고, 끝없이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모인 곳.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을 아주 손쉽게 행하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손짓 한 번으로 바다를 가르고, 산을 베며, 하늘을 걷는 기행을 보여주죠. 물론, 그 세계에는 마법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법도 없이 하늘을 난다고요? 그게 가능한건 가요……?”
“그렇습니다. 이 세계로 따지면 기사들과 가장 비슷하겠군요. 거기서는 기라고 불리는 무형의 기운을 다룹니다. 이곳에 마나의 개념과 흡사하지요. 기사들 중에서도 오러 마스터나 혹은 초월자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하늘을 걸어 다니는 것 정도야 흔하지 않습니까?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프레이는 오히려 호승심 넘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세계가 존재하다니……. 허구라고 하여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는 군요.”
“천악천은 그런 세계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힘으로 군림하는 세력인 ‘천마신교’의 소교주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무림 세계 최강자의 후계자라는 얘기지요. 천마신교의 교주는 자신을 스스로 ‘천마(天魔)’라고 일컫는 종교 집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천마신교의 교주는 천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명실상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입니다.”
흥미진진하게 내 얘기를 경청하던 프레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떤 가문이나 길드, 혹은 황실도 아니라 종교 집단의 교주가 천하제일인이라고요?”
“네. 프레이 말처럼 수많은 문파, 가문, 연합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압도적인 최강입니다. 대대로 ‘천마’의 이름을 계승해온 사람들은 그에 맞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죠. 애초에 천마신교라는 집단 자체가 말이 종교 집단이지, 투신을 키우기 위한 양성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강자존(强者尊), 약육강식(弱肉强食). 이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곳이 바로 천마신교거든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동감합니다. 본래 천악천이 처음부터 소교주였던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후보들 중에 한 명일 뿐이었죠. 천마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 중 한 명. 그중에서도 막내였습니다. 허나 끊이지 않는 암투와 모략들을 견뎌내고, 형제들의 피를 손에 묻힌 채 당당히 소교주의 자리를 차지했죠. 당대 천마 또한 그의 업적을 치하하며 천마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소천마(小天魔)’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랬던 그가 천마신교의 서고에 있던 책을 잘못 읽고 이 세계에서 용사파티의 짐꾼인 칼 데미안이라는 인물에 빙의된 것입니다.”
열심히 설명을 해주다보니 어느새 사당에 도착했다.
나와 프레이는 석상 앞에 섰다.
“또한 아스모데우스에게 들은 바로는 지옥의 서열 8위 마신인 바르바토스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의 무력이 어느 정도일지……. 아, 거기 서시면 됩니다. 이제 이동하죠.”
“이러나저러나 결국 저희가 강해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군요.”
“그런 셈이죠. 그를 회유해서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가장 베스트긴 하겠지만요.”
나는 마기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러자 방안이 검은 마기로 가득 차며 우리의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 *
“프레이. 여기가 72교단의 본산입니다.”
“자, 잠시만요. 자일. 우욱!”
저번에도 그렇고 프레이는 공간을 이동하는 것에 심한 멀미를 느끼는 듯 했다.
“프레이. 제가 등 두드려…….”
잠깐.
뭔가 이상하다.
내가 이곳에 왔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환영해줘야 할 교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아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은 72교단의 본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
그 순간.
귓가를 강타하는 굉음.
──콰과과광!
천둥벼락? 아니, 포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다. 땅이 진동을 한다.
정신을 차린 프레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일! 저기 좀 보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드높은 상공.
“……드래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자, 거대한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친 붉은색 용 한 마리가 허공에 대고 강렬한 불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체 왜 드래곤이 이곳에 온 거지? 교인들은 전부 어디가고?
잠시 눈을 감고 감각을 넓혔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촤르르르륵.
…500미터.
…1000미터.
…2000미터.
“찾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곳에 교인들이 없었는지.
용은 처음부터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였던 것이다.
상공에 떠 있는 용 한 마리와 본산 끄트머리에 위치한 용 한 마리.
교인들은 전부 그곳에서 용을 막고 있었다. 아마 한 마리가 더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곳에 드래곤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피해를 줄이는 게 우선이다.
“자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프레이. 아무래도 지금부터 용 사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 사냥이요?”
나는 대답 대신 전신의 강화마법을 부여했다.
다중복합강화(多重複合强化).
보랏빛 마력이 전신을 감싼다. 그리고는 마창 악시온을 소환했다.
“악시온(axion).”
내 마기가 강해짐에 따라 악시온 또한 강해졌다. 예리하게 날이 선 창 끝에 흉흉한 마기가 응축돼있다.
“절삭력강화(切削力强化). 내구강화(耐久强化). 마기응축(魔氣凝縮).”
창날부터 창대까지 칠흑 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주변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방대한 기운.
손아귀에 힘을 주자 핏줄들이 선명하게 튀어나왔다.
목표물을 확인.
크게 숨을 들이 마신 뒤, 투창선수처럼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활시위를 놓는 것처럼 온힘을 다해 창을 던졌다.
──팡!
창을 던지며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음이 울리며 그 여파로 주변 일대에 바람이 불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악시온이 그대로 드래곤의 날개를 꿰뚫었다.
갑작스런 일격에 날개 한쪽이 찢어진 드래곤은 균형을 잃고서 추락했다.
“끼예에에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