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두 쌍의 날개를 지닌 새하얀 드래곤.
빙룡(氷龍) 스카디아.
그녀는 지금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이번 임무만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이곳에 왔다.
허나 버러지 같은 인간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더욱 거셌다.
그녀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종족은 참으로 이상했다.
한 명, 한 명의 힘은 보잘 것 없으나 모이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발휘했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는 가끔 드래곤인 자신조차 위협할 수 있는 특별한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분명 인간이란 종족은 나약하고 보잘 것 없을 것인데……. 어째서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걸까.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런 꼴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무시하는 인간의 손에 붙잡혀 노예와도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번 임무만 무사히 수행하면 더 이상 빌어먹을 인간들의 도구로 살 필요가 없다.
탈출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힘을 길러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전부 쓸어버릴 것이다.
【이 멍청한 것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야!!!】
허나 그녀의 생각처럼 일은 잘 풀리지가 않았다.
멍청한 동생 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두려워 하지마라! 안드로말리우스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거다!”
“장로님들을 지켜라!”
이번에도 흑마술을 쓰는 인간들이 있었다.
마기(魔氣).
그 끔찍한 기운을 다루는 인간들이 격렬히 저항했다.
자신을 묶어둔 그 인간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마기’ 자체는 그녀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얼어라.】
용언(龍言).
말 그 자체가 마법이 되는 현상의 기적.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땅에 있던 흑마술사들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것들! 마신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왜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 것이냐!】
까다롭기는 했지만 결코 상대하지 못할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종족들 중 가장 우월하다고 칭송받는 드래곤인 자신이 이런 놈들에 의해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할 뿐.
그나마 위협적인 애들을 뽑으라면 장로라 불리는 것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이들 중 뛰어난 것이지 자신을 묶어둔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이 다루는 마기는 이놈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버러지들을 상대로 이만큼 시간을 끈 것조차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그놈의 마기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인지 화가 나는 군. 그래. 두려워할 것 없다. 인간은 원래 미개한 종족이다. 나를 묶어둔 그 놈들이 비상식적으로 강한 것이야. 인간 주제에 그러한 마기를 지니고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드래곤인 자신에게 공포를 각인시켜주었던 인간을 떠올리자 몸이 저절로 떨렸다.
그때의 기억으로 인해 마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는다.
그녀가 72교단의 교인들을 상대로 애를 먹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때 당시에 생겼던 트라우마만 없었더라도 훨씬 더 수월하게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그녀.
【이제는 너희 인간들과 엮이는 것도 지긋지긋하구나!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도록 하겠다!】
스카디아가 포효하며 몸을 움직이자 그녀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들이 하나, 둘 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으윽! 버텨라! 버텨야 한다!”
“……죽고 싶지 않아.”
“제사장님! 교주님께서는 어디 계신 겁니까!”
그 순간.
스카디아의 생존본능이 격하게 반응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기운이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건 뭐지?’
──후웅!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
한 손에 쥐고 있는 거대한 창에서는 드래곤인 그녀조차도 위험하다고 판단할만한 흉흉한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고, 칠흑 같은 갑옷으로 뒤덮인 그의 전신에서는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놈들과 같은 냄새가 난다! 저 놈은 위험해!’
황급히 목표물을 바꾼 스카디아가 빠르게 꼬리를 휘둘렀다.
후웅!
그러나 자일 지그하르트는 아주 손쉽게 꼬리를 피해낸 뒤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고 나아간 창날이 스카디아의 비늘을 찢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끄으으아아악!】
쿵!
그대로 바닥에 착지하는 자일.
“이든. 대체 그게 무슨 꼴이냐.”
“……교주님?”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인해 이든의 몸 군데군데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내가 직접 장로로 선정한 이들.
그들 또한 이든과는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곳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드래곤들이 침입한 것인지….”
“이런 일이 생겼으면 나에게 가장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죄송합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보고가 늦었습니다.”
매번 깐족거리던 모습만 보다가 잔뜩 다친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뭐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언제나 능글맞던 녀석이 지금은 상당히 지쳐보였다.
“내가 왔으니 걱정마라.”
그 말을 듣자, 근처에 있던 교인들이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교주님? 정말 교주님이야?”
“교주님이 오셨어!”
“정말 교주님이 오셨다! 됐다! 교주님이 오셨어!”
“교주님! 저희를 구원해주세요!”
수 백 명의 교인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은 채 소리쳤다.
처음에는 이런 관심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끝난 상태다.
“그래. 지금까지 버티느라 다들 고생했다.”
내 한 마디에 교인들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기도를 했다.
그 중에서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들까지 존재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만세! 이 시대의 진정한 선지자이신 교주님을 평생 받들겠습니다!”
“저는 교주님의 발닦개가 되겠습니다!”
열렬환 환호와 지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적극적이면 민망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이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교주님. 솔직히 이거 노리고 오신 거 아닌가요?”
“아직 농담할 힘이 있는 걸 보니 멀쩡한가 보군.”
“오랜만에 교주님을 뵈니 힘이 나는 군요.”
“입 발린 소리 하지 마라. 네놈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어라?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어깨를 으쓱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취하는 이든.
자일 지그하르트는 그를 지나쳐 빙룡 스카디아를 향해 걸어갔다.
“용 사냥이 끝나면 그때 얘기하지.”
저벅. 저벅.
거대한 빙룡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남성.
그의 발걸음에는 공포도, 두려움도, 긴장감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확신에 가득 찬 움직임.
오히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었다.
모든 종족들 중 가장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그 긍지 높은 드래곤이 자신의 발톱만한 크기에 인간을 보며 겁을 먹고 있었다.
【제, 젠장! 얼어라! 얼어!】
용언이 발동되며 자일 지그하르트의 주변으로 거대한 한기가 몰아붙였다.
공기마저 얼려버릴 듯한 지독한 한기.
──그러나.
“먹어라.”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고래에 의해 자일 지그하르트를 둘러싸고 있던 한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스카디아는 이성을 잃은 것인지 쉴 새 없이 용언을 남발했다.
【얼어라! 얼어! 얼어! 얼어! 전부 얼어버려라!】
어마어마한 마력이 깃든 언어가 현현하며.
그들이 서 있는 공간 일대를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한기폭풍(寒氣暴風)이 불어왔다.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뒤쪽에 있던 교인들에게서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교, 교주님! 저기 좀 보십시오!”
“……폭풍입니다! 폭풍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먹어라.”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레비아탄.
전보다는 더욱 커다란 크기였다.
그래봤자 본체의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거대한 아가리를 쩌억 벌린 레비타안이 일대를 뒤덮은 한기폭풍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꿀-꺽.
【……이…거 차…갑…고…맛…없…다.】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알…았…다…. 주…인 마…기 맛…있…으…니 참…는…다….】
저벅. 저벅.
“이제 보여줄 건 더 없나?”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일 지그하르트를 바라보는 스카디아.
【너, 너도 그 놈들과 같은 힘을 쓰는 구나. 빌어먹을 마신의 사도들. 이치를 벗어난 권능으로 나를 우롱하려 드는 것이냐!】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 빌어먹을 속박이 풀리면, 반드시 힘을 길러 자신을 묵어두었던 인간놈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오로지 그 각오 하나만으로 버텨왔던 스카디아였다.
그렇기에 압도적인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인간이다. 마신의 권능을 다룰 수 있다고는 하나 몸은 인간에 불과해. 전력을 다하면 죽일 수 있다!’
드래곤 하트에 그동안 축적시킨 힘들을 전부 끌어낸다.
어차피 여기서 죽게 된다면 힘을 모아놓은 것들도 전부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크게 숨을 들이 쉰 스카디아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자일 지그하르트를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일자로 뻗어나가는 얼음 속성의 브레스.
닿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리는 극한의 냉기.
“얼음 속성 브레스라…….”
대부분은 피하거나 막으려 들었겠지만 자일 지그하르트는 오히려 브레스를 향해 파고들었다.
촤르르르륵!
불꽃 속성이 부여된 창끝이 브레스를 가른다. 마치 거대한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듯한 기이한 광경.
그는 거기서 멈춰 서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한다.
그의 창끝의 불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게 발화한다.
화르르륵!
브레스마저 갈라버리는 압도적인 무력에 포기한 스카디아는 결국 육탄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초월(超越).】
드래곤 하트에 깃든 마나를 일시적으로 폭발시키는 금술(禁術).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절반 이상은 줄어들지만 그 대신 본래 지니고 있던 신체 능력의 두 배의 힘을 얻게 된다.
스카디아의 입장에서는 정말 목숨을 건 필사의 선택을 내린 셈이었다.
‘수명의 절반을 잃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우선 살고 본다.’
지금이라면 수 만년을 살아온 고룡들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그녀였다.
【변해라.】
거대한 드래곤의 몸체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인간 여성의 육체로 변모했다.
만년설처럼 새하얀 머리칼.
푸른색 눈동자. 세로로 찢어진 동공.
희고 고운 피부.
그리고 엉덩이 부근에 위치한 꼬리까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외형의 여인이었다.
“…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하게 될 줄이야.”
자일 지그하르트를 상대로 커다란 덩치를 지닌 자신은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녀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택한 것이었다.
“그래. 덩치가 커봤자 맞을 곳만 늘어단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나 보군. 그토록 고귀하신 드래곤님도 결국에는 이기기 위해 인간의 모습을 취해야만 한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군.”
싸늘한 시선으로 자일을 바라보는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입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