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화룡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프레이와 로만.
“로만 씨.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멋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저를 구해주신 분께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건데……. 정말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로만 입장에서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님이 사랑하는 여인. 어찌 보면 예비 주인님이라고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이미 죽은 몸이다. 무어라 말 할 입장이 아니란 얘기다.
주인의 힘을 빌려 이성을 유지한 채 활동하고 있었지만 어찌됐건 사역마에 불과하다.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왈가왈부(曰可曰否) 한다는 것부터가 웃겼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은 도구와 같다.
주인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저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면 된다.
본인 스스로부터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마음이 여린 인간이군.’
처음에는 자일 지그하르트와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이 죽이려 했던 목표물의 사역마가 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당연한 거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살수도 자신의 그런 미래를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명백한 악연(惡緣).
기형적인 관계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말해 만족하고 있었다.
삶에 대한 집착 따위는 크게 없었고, 자신의 안위보다는 여동생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내뱉은 말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죽은 뒤에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강해지는 것은 즐거웠고,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과연 어디까지 향할 것인지를 보는 것도 기대가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강제로 주종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 로만 스스로도 그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사실 기레스 하르만에게 복수를 하고, 그의 여동생을 구해준 시점부터 로만은 이미 그의 충직한 부하와 다름없었다.
“저는 주인님의 그림자입니다. 그가 내리는 모든 명령을 수행하지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륜을 져버리는 것이든, 천륜을 져버리는 것이든, 혹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잔혹한 것이든 말이지요. 그림자는 자아를 갖지 않습니다. 감정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께서 저에게 그러한 감정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에요. 그리고 당신 입으로는 감정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안 느낀다고 얘기하지만 그거 다 거짓말인거 전 알고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혈육을 그렇게까지 아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요?”
로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마기가 넘실거리는 그의 눈을 프레이는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주인님에게 들으신 건가요?”
“어쩌다보니 자일의 과거를 좀 보게 되었어요. 거기서 자일과 로만 씨의 관계에 대한 것도 보게 되었죠. 그렇게까지 여동생을 위하면서 어떻게 저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실 수가 있죠? 비록 지금은 죽은 몸이지만 스스로 생각도 하고, 저와 같이 감정도 느끼잖아요!”
“크흠….”
“심지어는 여동생 분을 만났을 때 눈물도 흘리던데요!?”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이제 그 일들은 잊어주시지요.”
프레이가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용서해주시는 거죠?”
“……처음부터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요. 제가 미안해서 그렇죠. 저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 저에게 바라는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전부 들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끈질긴 여자다.
그냥 대충 대답하고 넘기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다.
‘생각보다 더 높이 있군.’
혼자서는 저 하늘까지 올라갈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일단은 드래곤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 게 우선이다.
“프레이 님.”
“네?”
“저를 하늘 위로 좀 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 위로요?”
“네. 아무래도 저 드래곤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전력을 다해 저를 하늘 위로 던져주시면 됩니다.”
“해볼게요.”
프레이의 전신을 뒤덮는 금빛 마력.
그대로 손을 뻗어 로만의 다리 한쪽을 붙잡더니 이내 빙글빙글 도는 프레이.
수많은 수련과 성장을 거듭해 이정도로는 어지럼증도 느끼지 않게 된 로만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던지는 방식이었다.
설마 이렇게 무식하게 던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후웅! 후웅! 후웅!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던 프레이가 이내 기합을 내뱉으며 로만을 저 하늘 위로 던졌다.
“하압!”
파르르르르!
흡사 투석기에서 쏘아진 바위처럼 날아가는 로만.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바람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할 정도였다.
‘대단한 힘이군.’
그대로 드래곤의 등위에 올라탄 로만.
【아프다……. 날개가 너무 아파……. 어서 누나한테 가야 돼. 이대로면 그 괴물 같은 인간한테 죽고 말 거야…….】
그가 애용하는 단검을 손에 움켜쥔 채 오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로는 이 도마뱀을 바닥에 끌어내리는 건 불가능할 테지.’
애초에 덩치차이가 너무 났다.
개미가 인간을 문다고 해서 인간이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마기응축(魔氣凝縮).”
그렇다면 주인님의 마기를 빌린다.
로만의 오러와 마기가 융합했다. 결코 어우러지지 않을 두 기운이 서서히 하나가 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새로운 형태의 기운을 뿜어냈다.
‘내가 노리는 건 목이다.’
급소.
모든 생명체는 급소를 지니고 있다.
덩치가 아무리 크더라도 급소를 맞으면 피해가 있을 것라 판단하는 로만.
“쌍도영격(雙刀影擊).”
촤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룡의 목덜미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화룡이 그대로 추락했다.
쿵!
이미 앞선 부상으로 인해 그는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인간들……!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셈이냐! 】
허나 쇠약해져 있다고 해도 그 역시 용.
그것도 가장 호전적이라고 소문난 화룡이었다.
다다다다다!
프레이가 검을 뽑아들고서 화룡을 향해 내달렸다.
“칼리고 식(式) 1검.”
그녀의 검에 깃든 금빛 오러.
이내 허공에 아름다운 궤적이 그려졌다.
“곧게 베기.”
* * *
폴리모프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확실히 저 용은 아까 전 보았던 화룡에 비해 더욱 나이가 많은 듯 했다.
대처하는 방식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인간과의 전투 경험이 많은 게 틀림없다.
‘커다란 덩치로 있어봤자 약점만 더욱 노출되는 꼴이지.’
나는 제자리에 선 채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공격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굳이 고르지 않았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용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근자감 따위가 아닌 확신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 인간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래. 그 눈빛. 한낱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녀의 손에서 얼음으로 된 검이 생성됐다. 예리한 검 끝에서는 어마어마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심히 불쾌하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펑!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무슨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피할 수 있는 것이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검격.
인간의 눈으로는 쫓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1초를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그 사이사이에 검을 쑤셔 넣는 것 같은 동작들.
힘과 속도.
전부 괴랄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전부 피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내 옷깃조차도 스치지 못했다.
…우측 어깨.
옆구리.
하단.
머리.
“어째서….”
왼쪽 다리.
오른쪽 팔.
좌측 가슴.
심장.
“어째서 닿지 않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를 더한 그녀의 검은 더욱 더 빨라져 갔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몸에 생채기 조나 내지 못한 상태였다.
마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동작.
그래. 맞다.
“궁금한가? 너의 검이 왜 내게 닿지 않는지?”
나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단탈리안의 서.
미래 예지의 권능.
“너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내 머리통을 향해 검을 휘두르겠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그녀의 검.
“……어떻게.”
“……어떻게 라고 말하겠지.”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다. 중독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저 도마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막 희열까지 느껴진다.
【얼어붙어라!】
꿀꺽.
용언이 발동됐으나 동시에 레비아탄에게 먹혔다.
“네, 네놈……. 설마 미래를 보는 것이냐?”
드디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내 입 꼬리가 귀 밑에 걸렸다.
“빙고.”
권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반쪽짜리여도 신격(神格)은 신격(神格).
예전과 비교하면 거의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예지의 권능을 발동했고, 그녀의 행동을 초 단위로 읽어내고 있었다.
“어디까지 나를 우롱할 셈이냐! 인간!”
다음에 펼쳐질 미래는.
오.
이건 좀 위험한데.
그녀가 휘두른 검풍으로 인해 주변 일대가 쑥대밭이 된다.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저 정도라니 엄청난 위력이다.
허나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서비스는 이제 끝.
“절망의 사슬.”
촤르르르륵!
지면에서 솟아난 사슬들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부패(腐敗).”
사슬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그녀의 몸을 서서히 녹이기 시작했다.
전신이 속박된 그녀가 발광하며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사슬은 계속해서 생겨나 그녀의 몸을 옥죄였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싱거운데?”
“끄으으응으으으아에엑!!!”
내 도발이 먹힌 것인지 그녀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기둥.
얼음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솟아올랐다. 주변 일대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물든다.
‘각성 이벤트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걸 지켜보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
“음. 이 정도면 다 본 거 같아. 각성 하는 것 까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마기를 잔뜩 머금은 창을 그녀를 향해 던졌다.
펑──!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악시온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