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169화 (169/180)

169화

멍하니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별 뜻 없이 그냥 준 거겠지. 말 그대로 감사의 표현일 거야.’

어쩐지 로만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설마하니 내가 로만의 눈치를 보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교주님. 아, 이제는 교주님이라 부르면 안 되겠네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음……. 호칭은 딱히 상관 없으니 그냥 부르기 편한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그냥 자일 님이라고 부를게요.”

“뭐, 그게 편하다면야.”

“자일님은 이 꽃의 꽃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 꽃의 이름은 아네모네. 꽃말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요.”

“…….”

무거운 정적.

로만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더 따가워진 기분이 든다.

프레이 또한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검집으로 향할 것 같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전력을 다해 머리를 회전시켜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하하. 아름다운 꽃말이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척 굴기였다.

실제로 꽃말은 꽃말일 뿐. 그녀가 내게 저 꽃을 선물해준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그냥 김칫국을 들이마시는 것이고, 그녀는 그저 감사의 의미로 내게 꽃을 선물한 것일 가능성도 분명 존재…….

“제 마음이에요.”

음.

저쪽에서 검 뽑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녀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예쁘냐.

“아네모네의 또 다른 꽃말은 기대와 희망입니다. 제게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주신 자일님께 감사하다는 얘기에요.”

“아……. 그렇구나.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당연한 거니까.”

내게 있어서는 정말 당연한 것이었다. 로만과 내가 나눈 정당한 거래였으니까.

또한 이제는 그녀도 내 사람이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의 삶을 엿본 이상,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여기서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기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럼 데이지. 나는 이만 가볼게. 혹시라도 필요한 것들 있으면 하르만 백작 통해 얘기해.”

“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뒤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자일님.”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평소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묘한 미소.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그, 그래.”

끼익.

황급히 문을 열고 나온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딱히 지은 죄는 없었지만 어쩐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양옆에 로만과 프레이가 있는 것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프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일…….”

평소의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굉장히 딱딱했다.

“설마 데이지 씨에게 다른 마음 품고 있는 건 아니죠?”

돌직구.

“…아, 아닙니다.”

“말까지 더듬는 거 보니까 더 수상한데요? 아까 데이지 씨가 꽃말 말해줬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거 같던데…….”

“……주인.”

덩달아 로만까지 침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 진짜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당황해서 그랬던 것 뿐 이니까. 저는 데이지에게 아무런 마음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럼 제 여동생은 여인으로서 매력이 별로 없다는 말씀인가요?”

첩첩산중.

끊이지 않는 질문의 굴레 속에 갇힌 나는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해명을 반복해야만 했다.

* * *

아카데미가 정상적인 수업을 하기까지 약 1주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나는 밀린 일들을 차례대로 처리했고, 오늘은 그중에서도 초월자인 아르스 디에고를 만나러가는 날이다.

‘시온 지그하르트의 창술을 이어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대체 그는 어디까지 내다 본 것일까.

어쩌면 미래의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낱 인간임에도 초월자가 되었고, 전란의 위기에서 제국을 구하고, 용을 사냥했으며, 마성을 극복하고 마신(魔神)이 되었다.

‘이렇게 나열해서 보니까 진짜 말도 안 되는 먼치킨이란 말이지…….’

잠깐.

생각해보니 마신이 되었다면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신이 된 이상 불멸자와 다름이 없으니까.

‘그러면 지옥에 있는 건가?’

허나 그와 계약을 맺엇던 마신인 아스모데우스조차도 그의 행방을 모르는 듯 했다.

만약 그가 지옥에 있다면 아스모데우스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만 더욱 복잡해질 뿐.

“대략 이쯤인 거 같은데…….”

로키 산맥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아-르-스-디-에-고-님-!”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쭉쭉 뻗어나갔다.

퍽!

“악!”

뒤통수에서 느껴진 충격과 동시에 머리가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자세를 잡아 뒤를 돌아보니 아르스 디에고가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 터지겠다. 이놈아.”

“아……. 여기 계셨군요.”

“따라와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아르스 디에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나 또한 전신의 강화마법을 두른 뒤, 그의 뒤를 따라갔다.

후우웅!

몸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며, 거친 바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덧 정상에 도착한 아르스 디에고가 발을 멈추었다.

“어떠냐.”

탁 트인 풍경.

주변 일대가 훤하게 드러났다.

“멋있네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내가 널 왜 부른 줄 아느냐?”

대충 알 것 같았으나 굳이 안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제 선조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 밖에는…….”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초월자 양반.

내가 ‘이 새끼는 뭐지?’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눈짓했다.

“앉아라.”

굳이 흙먼지가 가득한 땅바닥에 앉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초월자가 하라면 해야지.

“넵.”

털썩.

창으로 하늘이 되겠다는 오만한 이름을 가진, 창천문(槍天門)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문파에 주인.

가장 밝게 빛나는 별 룩스(Lux)의 칭호를 하사 받은 초월자.

시온 지그하르트의 창술의 명맥을 이은 자.

어찌 보면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었다.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느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딱 봐도 내가 널 왜 불렀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겠지. 네놈 눈빛만 봐도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

“내가 왜 네놈이 마신숭배자인 것을 알고도 살려준 줄 아느냐?”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는 내가 이블이 될 수 있었음에도, 또한 마신숭배자임이 확실히 드러났음에도 나를 죽이지 않았다.

본래 초월자라는 작자들이 세상 일에 개입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의아한 부분이 여럿 있었다.

‘마치 일부러 살려둔 것 같은 느낌이었지.’

“이유는 딱 하나다. 네놈이 지그하르트의 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 말은 결국…….

“그게 아니었다면 넌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나는 필히 죽었을 것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지고, 본체의 일부를 끌어오지 않는 이상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제가 지그하르트의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까? 어째서죠? 제 아무리 제 선조가 아르스 디에고님이 속한 문파의 창시자라 하여도 그거 하나 만으로 저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예언이라 해야 하나. 명령이라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게 있다. 우리 문파 만에.”

그의 얘기는 이러했다.

창천문이라는 문파는 본래 시온 지그하르트의 창술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인연이 닿은 한 사내가 우연히 시온 지그하르트에게 창술을 배우게 되었고, 이대로 맥이 끊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창천문이라는 이름의 1인 전승 문파를 세우게 된 것.

물론.

이 과정에서 시온 지그하르트의 허락은 당연히 받았고, 그는 문파를 세우는 데 동의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훗날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아이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를 만나면 그를 창천문의 새로운 제자로 받아들이고, 내가 가지고 있던 창술과 이 책을 건네주도록 해라. 너의 후대, 너의 후대의 후대에도 이것을 전하라. 라고 하였다.”

“……그 말은 시온 지그하르트는 제가 올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그렇다는 얘기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그는 몇 백 년 뒤에 내가 창천문의 사람과 만나게 될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한 단서를 추적할 때마다 어쩐지 그는 내가 올 걸 미리 알고서 준비한 것처럼 행동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탈리온의 권능이라도 가지고 있던 것일까? 그렇다 하여도 이렇게 먼 미래까지 보지는 못할 것이다.

권능의 실제 주인인 단탈리온조차도 확정되지 않은 먼 미래의 편린은 잠깐 보는 게 고작이라고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아스모데우스와의 대화.

-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때로는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뱉었지. 먼 미래를 위한 ‘안배’라던가.

안배.

이 말을 보면 확실히 그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계획에 어쩌면 내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얻어낸 지그하르트 가문과의 연결고리.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우연’이 아니었던 걸까.

“아주 넋이 나갔군. 그래서 나도 네 이름을 들었을 때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만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지.”

“확실히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이네요.”

“그렇지? 그렇기에 나는 지금부터 너에게 창천문의 창술을 가르칠 생각이다. 개파조사(開波祖師)의 말씀대로 창천문의 다음 후계자는 이제 너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아르스 디에고.

갑자기 그의 손에서 생성되는 푸른 빛깔의 창.

“뭐하냐. 안 일어나고?”

“……네?”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너를 이제부터 창천문의 후계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네가 다음 창천문의 문주가 되려면 적어도 내가 사용하는 모든 창술을 쓸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씨익 웃으면서 살벌한 말을 내뱉는 그.

“속성으로 배우는 데는 역시 맞는 게 최고지.”

“자, 잠시만…….”

“자세 잡아라.”

후우우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