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화 (1/29)

1회

신세계

계산은 끝났다. 가장 우선될 일은 기반이다.

안타깝게도 사람이란 홀로 설 수 없는 동물이다. 혈육 하나 없는 천애고아든, 누울 자리 없는 방랑자든, 세상 어디에도 제 편 없는 희대의 악인이래도 땅에 발붙이고 숨 쉬는 이상 저마다의 히스토리가 존재했다.

고향 없음, 부모 없음, 친구 없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무근본의 배경은 적어도 만7세 이상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엔 기억상실이라는 아주 편한 숏컷의 핑계가 존재하나 사실 웬만큼 뻔뻔한 낯짝이 아니고서야 간단치 않은 일이다.

어떤 배경을 지녔고, 어떻게 자랐느냐는 구사하는 언어만 들어도 충분히 추측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결코 세상을 만만히 봐선 안 된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6계급 마술사 테사는 결정했다.

당장 지인부터 만들자.

백프로 거짓은 아닐 제 거짓말을 한 치 의심 없이 믿어 즉, 이세계에서 자신의 새로운 배경이 되어줄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지인(호구)을.

초인의 해적과 해군이 지배하는 바다 세계에 떨어진지 만 하루.

난무하는 범법자들과 뒤틀린 사상의 상위 계급들.

<원피스>라는 단 하나의 비보에 매몰된 세계를 이곳 사람들은 대해적시대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테사의 눈에는 전쟁 중인 비문명 야만 사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전장 위 가장 어리석은 이는 사서 의심을 모으는 자이다. 테사는 조용히 거리로 섞여 들어갔다. 마술사 특유의 거대한 존재감을 갈무리하며.

❙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

처음 발들인 섬은 <샤본디 제도>라고 불렸다.

마술사의 눈에도 생소한 환경의 그 섬은 테사의 빠른 사리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성원 또한 마찬가지.

이전 세상에서도 인간 종 외 요정과 인어, 반신 같은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괴력난신에 가까웠다. 이처럼 흔한 거주민의 일종은 아니었다.

목표했듯 테사는 세 달간 총 두 명의 지인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를 인어로 삼은 것은 그런 연유도 무시 못 했다. 관찰해볼 요량이었으니까.

인어라 함은 본래 신비적 존재로 약간의 미래를 읽을 줄 아며 만물과 소통해야 한다. 적어도 테사의 상식에 의하면 그랬다.

그러나 지켜본 결과, 이곳 인어는 정말 외양만 다른 인간 종에 가까웠다. 친구가 된 어린 인어, 샐리는 미래는커녕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

단적인 예로 이 제도는 인신매매 따위가 판을 치는 곳이었다. 인어 및 어인 족은 특히나 희귀한 것으로 취급받아 고가에 팔리기 일쑤다. 그걸 알면서도 몰래 놀러와 납치될 뻔한 것도 모자라 구해줬다는 사실 하나로 테사에게 경계심 하나 내보이지 않다니.

그래도 나불나불 다 떠드는 샐리 덕분에 테사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사고 파는 시장, 살아 숨 쉬는 노예제, 민간인은 안중에도 없는 군 정부, 네 개로 나뉜 바다, 악마의 열매 등등…….

특히 정식 루트를 밟을 수 없는 해적들이 후반 바다로 가기 위한 비공식 루트로 이곳 샤본디 제도에 모여든다는 정보는 무척 유용했다.

테사가 제도를 떠나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술집에서 사귄 다른 친구, 그웬이 가족들과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얘길 꺼낸 참이기도 했다.

“텟사 정말로 가는 거야? 어떻게 날 두고 떠날 수가 있어!”

“내 이름은 텟사가 아니라 테사라고 몇 번 말해, 샐리. 마술사에겐 중요한 이름이니 멋대로 바꾸지 말아주겠니.”

“너무해 텟사!”

“아 아니래도! 이 멍청한 물고기가! 집에나 가! 또 납치당할래?”

“나 걱정해주는 거지? 역시 괴팍하지만 다정해…….”

“웃기지 마!”

다정한 마술사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저 납치 매니아 인어는 어찌나 덤벙대는지 네 번쯤 구해지더니 테사를 저 좋을 대로 해석해댔다. 테사는 지긋지긋한 인어에게 보호 결계를 걸어주고 돌아섰다. 배 멀리 어린 인어가 따라오다가 멈추는 기척이 느껴졌다.

마술사에게 작별 인사 같은 건 없다. 테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계속 여기 살게 된다면 언젠가 어인 섬에 가는 날도 있겠지, 생각했다.

긴 항해는 험하고 때론 잦아들었다.

그웬의 고향은 <신세계>라 불리는 후반 바다에 위치했다.

해군 측 식품 관련 하청을 맡던 부친을 따라 제도로 이주했지만, 이번에 관련 사업이 전부 군 자체로 전환되며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슬픈 일은 아니라고 그웬은 딱 잘랐다. 부친에겐 어떨지 몰라도 나머지 가족들은 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며.

“내 고향은 제도에 비하면 매우 작은 섬이야. 하지만 별거 없는 것들이 다 그렇듯 조용하고 평화롭지…… 고향 친구 말로는 몇 년 전에 흰 수염의 영토가 되면서 더 살기 좋아졌대.”

바닷바람이 그웬의 바랜 적발을 할퀴었다. 거친 무법자들의 시대에 사는 또래는 어쩔 수 없이 괄괄했으나 누구보다 평화를 갈급했다.

테사는 그웬을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려봤다.

술집에서 일하던 그웬은 해적이 던진 맥주잔 파편에 맞아 뺨에 큰 상처가 났었다.

앞에선 너 죽고 나 죽겠다고 날뛰다가 골목 뒤편에서 홀로 서럽게 울었다. 테사는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대신 비밀 엄수를 강요하고 멋대로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몇 주 뒤, 의심을 피하고자 붙인 반창고를 떼자 주변 이들이 어찌 된 거냐 물었지만, 그웬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었다. 그 순간 마술사와 웨이트리스는 이미 친구였다.

사납던 파도가 슬슬 가라앉는다.

기후도 제 궤도에 올랐다. 온후하고 특징 없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항해가 끝나간다는 증거다.

마술사의 눈을 가진 테사에겐 벌써 깃발이 보였다. 평화로운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해적기였다.

“흰 수염…….”

“현 시대의 이름이지. 이 바다 위 가장 위대한 해적.”

기록되지 않은 섬에서 세상을 알고자 나왔다는 테사의 얘길 그웬은 믿어주었다. 뒤끝 없고 의심 없는 성격답게 어린애도 알 만한 기본 상식을 일러주는 데에도 망설임 없었다.

“흰 수염의 영토가 된 섬은 축복받았다고 해. 그들은 착취도 약탈도 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정당한 값을 주고 안전을 보장 받지.”

“빼앗지 않는다고? 해적이?”

눈썹을 치켜든 테사를 향해 그웬이 웃었다.

“그야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이니까.”

정점은 수탈하지 않고 지배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시대의 이름이 흰 수염이며 그가 이 왕 없는 무법자들의 바다 위에서 황제로 군림하는 것이다.

“아 이제 보이기 시작하네. 저기 깃발 보이지? 테사, 저 졸리 로저에 몇 억 베리의 가치가 있는지 상상이 돼?”

재잘거리던 그웬이 상륙을 알리겠노라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테사는 선미에 서서 가까워지는 섬과 해적기를 바라봤다.

<바인브릿지 타운>. 섬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위 금색 다리의 이름을 딴 작은 섬. 마술사의 새 정착지가 될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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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말리번의 공방에서 어쩌다가 이계로 떨궈졌는지 테사는 아직도 원인을 알지 못한다.

시간 이동은 시공간계 학술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주제이며 케이스도 많지만, 이와 같은 세계 이동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없다.

몇 없는 젊은 6계급 마술사로서 상아탑에도 이름 올린 인재인 그녀가 모른다면 웬만한 이들은 모른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야말로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이 테사에게 일어난 것이다.

솔직히 7계급 승급을 면전에 두고 연구 주제가 막막했던 테사는 이 사실에 적잖게 흥분했다. 아니, 이게 웬 횡재야!

하지만 마술사의 이성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요리 봐도 저리 봐도 돌아갈 방도가 없다는 현실이 금세 끼얹어졌다. 어떻게 왔는지를 모르니 돌아갈 수도 없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이런 마당에 연구 주제가 무슨 소용이람.

테사는 우울했다. 아마 한 사흘쯤?

젊은 천재 마술사로서 쌓아온 명성, 권력, 더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던 미래 따위를 생각하니 그랬다.

여러모로 마술사를 나흘까지 우울로 끌어당기기엔 부족한 것들이었다. 테사는 눈앞의 신세계에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모든 요소들이 테사가 모르는 미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마술사의 삶이란 시작은 알아도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연구를 하다보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이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애초에 마술사 또한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테사는 훌륭한 마술사였다.

다행히 바인브릿지 타운은 그웬의 가족에 꼽사리 낀 테사를 환영해주었다.

테사가 처음 의도한 대로 그웬은 믿음직한 보증인이 되었고, 테사는 무리 없이 그들 틈에 정착했다. 시내 끄트머리에 마술사의 새 공방이 갖춰지기까지는 어떠한 어려움도 없었다.

공방 외양은 테사의 취향답게 미니멀했다.

먼지 하나 안 묻은 백색 외벽은 사뭇 이질적이기도 하여 쉽게 눈길을 앗았다. 테사는 제 공방이 썩 마술사답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도 취향이 어디 가겠는가.

타운 사람들은 마술사의 공방에 곧잘 들락거렸다.

외부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나뉘어 있으므로 전혀 문제는 아니었다. 무얼 파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테사는 <가능한 것>이라고 답했다. 흥미를 자극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는 테사를 의사라 불렀고, 잡상인으로 불렀으며, 약사 또는 주인장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방은 원래 간판을 잊고 서점, 식자재점, 약국, 온실 혹은 잡화점 등등으로 불렸는데 다들 자기 멋대로 칭했으나 누구나 알아먹었다.

“주인장 다른 데선 골치 아팠을지도 모르겠어.”

“왜요?”

“이렇게 신기한 걸 많이 갖고 있는데 해적 놈들이 가만뒀겠어? 특이한 건 죄다 잡아들이는 해군 놈들도 그렇고.”

“응? 여기도 해적놈 섬이잖아요.”

테사는 머리카락 끝을 꼬며 모른 척 웃었다. 단골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갤 젓는다. 그가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테사는 블라인드를 내리러 창가로 다가갔다. 조그만 노란 불빛들이 거리를 물들였다. 멀리 잔잔한 파도 소리도 들려온다.

운이 좋았다는 걸 테사도 안다.

행운이 따르는 마술사 특유의 성질 탓인지, 어쩌면 비기너스 럭일지도 모르겠다. 무법자들이 날뛰는 전쟁기에 이토록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니…….

테사는 아주 많은 걸 할 줄 아는 빼어난 마술사지만,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의 일원이었다.

바바리안과는 거리가 멀다.

해적 같은 건 테사의 시대에선 머나먼 구시대 유물이며 전쟁은 상아탑과 국제연맹 그리고 교회의 이름 아래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 종교는 있을까? 정말 알아갈 것이 천지다. 테사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밤 파도가 규칙적으로 울었다.

정착민 등록도 끝나고, 세금(이라 부르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해적한테 내는데 상납금이라고 해야 하나)도 착실히 내고, 무탈한 시간들이 흘렀다.

보다 방대해지는 마술회로를 느끼며 테사는 탄생일이 가까워졌음을 체감했다. 말인즉슨 테사가 이곳에 불시착한 지도 거의 한 해가 다 되어간다는 얘기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니 셈이 더디구나.

사계절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테사는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외부 공방으로 나갔다.

“테사! 이것 좀 받아줘.”

동시에 그웬이 문을 밀고 들어온다. 품에는 꽃다발이 한아름이었다.

테사는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화병이 나타나고 안에서 절로 물이 솟았다.

여왕의 숲에서 끌어온 샘물이니 꽃들은 못해도 일 년은 싱싱할 것이다. 그웬은 허탈하게 두 팔을 털었다.

“들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저런, 일반인의 삶이란 고달프네.”

“너 진짜 얄미운 거 알지?”

고향에 돌아와 오래 쉬던 그웬은 얼마 전부터 타운의 하나뿐인 꽃집에서 일했다. 벌이는 시원찮지만, 어릴 적부터 꿈이었단다. 사실인지 나날이 좋아지는 낯빛이 보기 좋았다.

처음엔 단순히 기반 마련을 위한 관계였을지 몰라도 이제 테사에게 그웬은 그 이상의 친구니까. 테사는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테사 제발…… 차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대체.”

“왜? 좋기만 한데.”

“물론 좋긴 해. 확실히 마시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긴 한데, 맛이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앞으론 차는 그냥 내가 탄다니까.”

“마술사의 차를 일반인이 어떻게 타니? 잔말 말고 마셔.”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 자식이. 내가 지 것에는 특별히 좋은 걸 얼마나 넣어주는데. 테사는 울상인 그웬의 잔에 차를 더 따랐다.

“아 됐어 그만 따르고 이거나 봐.”

“수배서?”

이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세계관에서 정보는 어떤 식으로 배포되나 궁금했는데,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뉴스 쿠>라는 특수한 갈매기가 존재했다.

그들은 섬으로, 배 위로 신문을 팔아 날랐으며 현상금 수배지 또한 이에 속했다.

테사도 정보 파악을 위해 그를 구독했으므로 그웬이 내미는 수배서를 알아봤다. 별 흥미가 없어 매번 버리지만, 오늘 오전에 보았던 수배지들 중 하나였다.

“아는 사람?”

“마야네 남동생이야. 마야 알지? 왜 있잖아. 동쪽 광장에서 식당 하는.”

설명을 듣고 기억났다. 갈색 머리에 코의 미인점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분명 그웬의 소꿉친구들 중 하나라고 했지.

수배지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그웬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마야가 불편해 하는 눈치라 얘기 안 했었는데 이렇게 알게 되네. 흰 수염 해적단에 들어갔다나 봐.”

“이천만 베리…… 높은 건가?”

“글쎄.”

테사는 힐긋 쳐다봤다. 그리고 눈치 챘다.

“단순히 친구 동생은 아니었나 본데?”

“하여간 빠르다니까…… 사실, 제도로 떠나면서 헤어진 사이야. 마야는 모르지만. 친구의 동생이라니 좀 그렇잖아.”

“그래서?”

“그, 오 년 전에도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게 아니다보니 가끔 전보 벌레로 연락하기도 했거든. 근데 해적이란 얘긴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요점이 뭔데. 그냥 푸념?”

“아니! 얘가 맥락 파악을 왜 이렇게 못하나 했더니…… 너 못 들었어? 흰 수염 해적단이 곧 우리 섬에 정박한다잖아.”

아하. 그렇게 된 얘기군. 팔을 괸 테사가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었다.

“해적은 연애 상대로 별로야?”

“그럼 좋겠어?”

“하지만 여긴 그런 시대잖아. 꿈을 가진 사람들은 해적 아니면 해군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니? 너도 알다시피 내가 세상사를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돌아가는 꼴 보면 해군도 썩 정상은 아니고.”

“물론 그렇긴 한데…….”

“게다가 흰 수염이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해적이라며? 피스 메인이고.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도 그들 덕분이랬잖아.”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 훈수 둘 입장이 아닌 테사는 단지 들었던 그대로 그웬에게 돌려줬을 뿐이다. 테사의 말에 그웬은 한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매우 복잡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테사…… 그래도 해적은 해적이야.”

“…….”

“내 고민을 언젠가 너도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젊은 마술사는 아무 말 없이 친구의 미련 가득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찻잔 안 작은 소용돌이가 느리게 사그라졌다.

사황의 거대한 선박들은 소리 소문 없이 타운 귀퉁이 외진 해안가에 정박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대해적 치곤 굉장히 조용한 등장이라고 테사는 생각했다.

마술사는 공방을 오가는 주민들의 입에 귀 기울였다.

신세계 곳곳에 떨어진 영토들을 관리하는 흰 수염의 배는 제대로 정박하면 보통 일 년, 짧으면 반년 정도를 거점 삼는다고 한다. 또한 정박 초기에는 웬만해선 타운 근처로 오지 않는다고.

마치 야생의 습성과 흡사하지 않은가. 초식 동물들에게 배부른 맹수가 해치지 않는다고 교육이라도 하는 것처럼.

듣다보니 테사도 살짝 기대가 되긴 했다.

제대로 된 해적을 보는 건 아마 이번이 최초일 터다. 샤본디 제도에서 해적들을 보지 못한 건 아니나…… 세계를 들썩이는 진짜 <주역>은 처음이니까.

테사는 모험심이 강하지 않은 공방 마술사이나 그래도 마술사였다. 충분한 만큼은 뼛속 깊이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일주일쯤 됐을까.

해적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 그와 동시였을 것이다. 때 아닌 장마가 시작된 것도.

누구도 예측 못 한 장마.

타운 사람들은 해적선이 여름 기후 섬에서 기운이라도 실어 나른 게 아니냐 우스갯소리로 떠들었다.

테사 세계의 기준으로 따지면 지중해성 기후에 가까운 바인브릿지 타운에선 확실히 보기 드문 날씨였다. 웃던 것도 잠시, 작은 사건사고들이 빗발쳤다. 대부분 침수에 의한 사고였다. 겪어본 적 없는 날씨에 타운 전체가 삐걱거렸다.

마술사적 예감에 의하면 해적들은 테사의 공방에 한 번쯤 들리게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느긋하게 외출을 삼갔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테사를 찾는 사람들이 잦아졌다.

어제는 이웃집 헤일리, 엊그제는 게리네 야채가게, 그제는 올슨이었던가 제레미였던가…….

맥스웰 아저씨가 울며불며 자기네 염소를 구해달라고 달려온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지금은 또 강물에 미끄러진 티모시네 쌍둥이들을 건져내는 길이었다.

테사는 티모시 부인이 양 뺨에 쪽쪽 땡큐 비주를 날려대는 걸 떨떠름한 얼굴로 받았다. 알았으니까 그만해요…….

손이 크기로 유명한 꽃집 티모시 부인은 집으로 끌고 가 품에 테사가 탐내던 약초 한 다발, 수제햄 세 덩어리를 안겨주고서야 만족했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가냐고 소릴 꽥 지르니 도리어 마술사 아니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마술사의 프라이드는 그 말에 대한 반박을 허락지 않았다.

평소 정리를 하지 않아 아공간 용량이 한계치라거나, 아직 7계급 마술사가 아니기에 공간 이동을 남발할 수 없다는 것 등등을 일반인 앞에서 떠들어봤자 쪽만 팔린다. 특히 테사는 타운 사람들에게 거의 올마이티 비슷한 걸로 통하고 있지 않은가.

티는 안 내도 그에 대한 자부심이 나름 상당했다.

결국 좁은 아공간에 억지로 햄 두 덩어리를 욱여넣고 공방으로 걸었다. 느린 걸음에 따라 빗물이 찰박거린다.

돼지 등심을 통으로 훈제한 중세식 햄은 한 덩어리라도 무게가 상당했다. 약초를 젖지 않게 신경 써 안으며 테사는 어떻게 효율적으로 마술을 동시 응용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계산했다.

빗물을 막는 결계식과 부유 술식이 충돌하지 않도록…… 어 이거 잘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허공으로 약초 하나가 팔랑거리며 날아오른다.

빗속에서도 흰 꽃잎이 젖지 않았다. 테사는 기쁨을 삼키며 새로운 술식을 계산해내 배열했다. 부유하는 잎에 시선이 고정된다. 바람 따라 걷는 테사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고…….

“조심, 해야지요이.”

그대로 술식이, 깨진다.

팔을 잡아챈 거센 악력 때문이 아니다. 마술사는 그 짧은 순간 대기열이 새롭게 배치됨을 깨달았다.

방금 전 이곳과 지금 이곳,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테사의 팔을 당긴 남자가 떨어지는 물건들도 잡아챈다. 아슬아슬 했다며 혼잣말로 웃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 가까이서.

낯선 이 세계에서 테사는 수많은 인종을 만났다.

그중엔 9피트가 넘는 거인도, 상어의 이빨을 가진 이종족도, 사람에 가깝게 퇴화한 인어도, 네 발의 인간을 타고 다니는 짐승도 있었으나 이건 궤가 다르다.

맞닿은 몸은 몸서리칠 정도로 뜨겁다.

무방비한 눈매 아래 차가운 야만인의 눈빛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테사를 훑었다.

대기가 두려워 숨죽였다. 세계와 소통하는 마술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어떤 때에 그 고고한 허리를 꺾는가. 오로지 그들은 자신을 바꾸는 자 앞에서만…….

“곤란하네. 경계를 사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

“오라힐리 테사. 바인브릿지의 마술사. 맞지요이?”

테사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눈앞의 이거, <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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