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신세계
2
테사 키안드라 오라힐리.
켈트 마술사신을 모시는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 6계급 마술사로, 회색 숲 요정족인 증조모의 각인을 물려받아 강력한 마술 혈통을 타고났다.
삼 세에 상아탑 북쪽 맹주 갈라가르스 휘하 열세 번째 제자로 입적되었고, 가장 늦은 입문으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여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십사 세.
4계급 승급 심사를 통과해 마술사적 성인을 인정받은 때이며, 그 후로도 갈라가르스의 대표 애제자로서 많은 연구에 스승과 함께 이름 올렸다.
이어 차세대 마술사계를 떠받칠 인재로 손꼽혀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고작 스물셋 나이에 6계급 마술사로 등극하는 데에 성공. 마침내 세계의 끝 상아탑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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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소속 마술사는 전 세계를 통틀어 채 서른 명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 7계급 이상으로 이뤄진 탑의 구성원이 되기에 테사는 모자란 감이 있지만,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오른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 뒤로 삼 년.
테사는 스스로를 소개할 일이 사라졌다. 어딜 가도 모두가 이 젊은 천재를 먼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인브릿지 타운에 입적할 때도 기분이 퍽 미묘했다.
이 세계는 성과 이름순이 반대였으며 테사는 손수 제 이름을 적어야만 했다. 미리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녀의 풀네임을 몰랐다.
낯선 이에게 오랜만에 불린 성은 딱 그만큼 생경했다. 게다가 의도했을 리 없지만, 아주 정석적으로 마술사를 불렀다. 오라힐리의 테사, 그 다음 이명.
“좀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불린 게 하도 오랜만이라…… 평소였다면 소원 하나쯤은 기분으로 들어줬을 텐데.”
“들어줬을 텐데?”
“지금 기분이 영 별로야. 당신 해적인 건 알겠는데 뭐하는 사람이에요?”
언뜻 봐 삼십 대 초반 또는 그 이상. 정확히 짐작하긴 어렵다. 테사는 맞붙은 서로의 거리를 벌린다.
대충 겉옷만 걸쳐 상반신을 드러낸 해적은 쇄골 아래부터 복부까지 덮은 졸리 로저 타투가 인상적이다. 제도에서 본 해적들에 비하면 체격이 큰 편이 아니나 그들보다 배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느긋한 척, 나른한 척 풀린 태도로 자칫 방심하게 해도 <이건> 언제든 사람을 물어뜯을 수 있겠다.
이 세계의 진짜 해적이라는 건 이런 괴물들이었나.
그래도…… 마력 흐름까지 바꾸는 것은 좀 과하지. 아무리 세계의 명운을 움켜쥔 자들 중 하나래도 그래.
납득이 불가한 테사가 마술사의 눈을 치켜떴다. 청회색 눈동자 안에서 마술회로가 빛나려는 찰나, 해적이 더 빨랐다.
“뭘 하려는지 몰라도 내 소개는 내가 할 수 있는데.”
느긋한 말투지만, 분명하게 경고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라 테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래도 길 한 복판에서 할 얘긴 아니지 싶다. 해적의 타투를 잠깐 보고 마술사는 앞장서 걸었다.
“일단 내 공방에 가서 얘기해요. 멀지 않으니까.”
“좋지요이. 이번엔 발밑도 좀 보고 걷겠다면야.”
해적의 눈짓에 테사는 뒤돌아봤다. 다소 떨어진 옆에 깊게 팬 도랑이 있었다.
아까 그대로 갔다면 발을 헛디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팔을 좀 세게 잡혔었지. 정작 본인은 세게 잡았다고 인지도 못하는 듯하지만.
따지자면 못할 일도 아니나 호의에 괜히 날 세울 필요도 없겠지. 테사는 눈인사했다. 이번엔 해적이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전의 테사가 그러했듯이.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와 빗속에서 보폭을 맞춰 걷는 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것도 상대가 야만인 냄새가 풀풀 나는 해적이라면 더욱 더. 테사는 일부러 걸음을 평소보다 서둘렀다.
공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페이스가 안정되었다.
마술사의 공방은 공기 하나까지 전부 주인 소유인 공간이다. 뒤따라온 이방인은 무언가 달라짐을 느꼈으나 티내진 않았다. 대신 조급하지 않게 내부를 둘러본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이뤄진 공방은 곳곳의 생화와 관엽 식물 덕에 이질감이 덜했다.
밖에서 본 외부보다 내부가 훨씬 넓었으며 책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서적들이 바닥에 널리거나 쌓여 있었다. 난로가 안 보이는데 따뜻하다고 해적이 중얼거리자 마술사는 공방 안은 늘 최적의 온도로 유지된다고 답했다.
처음 보는 외형의 장식장에 고개 기울인 그를 뒤로하고 마술사는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테이블 위를 치우는 테사. 해적은 장식장 유리 너머로 마술사를 관찰한다.
날개뼈 언저리의 긴 머리는 칼에 잘린 듯 끝이 깔끔하고, 얼굴은 매우 희다. 잠시나마 잡았던 팔에는 어떤 근육도 발달하지 않았다.
아마 평생 전투라곤 해본 적 없을 테지.
해적은 급하지 않게 다가가 손 내밀었다. 훅 하고 끼쳐오는 약초 향. 테사는 그제야 오는 길 내내 그를 짐꾼처럼 써먹었음을 깨닫는다.
“아 이건…….”
“젖어서 큰일이네. 그래도 잘 말리면 소독제론 쓸 수 있겠어.”
“뭔지 아나 봐요.”
“일단은 선의니까.”
“의사?”
“알아. 그렇게 안 보이지?”
한쪽 입가를 작게 끌어올린 웃음이다. 그건 이 해적이 보이는 끝끝내 여유로운 태도가 타고난 성정임을 추측하도록 만들었다.
약초 한 다발은 테사 품으로 건네졌다. 크고 투박한 손이 약초 꽃잎을 스치듯 건드리고 떨어진다.
“마르코. 흰 수염 해적단 1번대 대장이다.”
“…….”
“일단은 이게 내 소개인데, 요이.”
“당신 말버릇이…… 굉장히.”
마르코는 또 씩 웃었다. 이 해적, 생각보다 잘 웃는 편이다.
“정신없는 놈들 틈에서 살다 보면 이상한 버릇 하나쯤이야. 입에 붙어도 이상할 건 없지요이.”
말 그대로다. 이상할 건 없다.
외려 건들거리듯 늘어진 말끝이 해적답게 불량하고 또 그의 느긋한 외양과도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테사는 해적이 쓰는 악센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제도나 타운 사람들이 쓰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착실히 차를 준비했다. 손짓에 따라 잔이 나타나고 찻잎이 불과 몇 초 사이 적절한 깊이로 우러난다.
마르코는 방해 없이 바라봤다. 빗속에서 물건을 띄우는 마술사를 발견했을 때도 신기했지만, 안정된 공간에서 보니 배는 신비했다.
“내 마술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가장 조용한 반응인데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걸.”
“무슨 생각?”
“이젠 이 바다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거라 자신했던 내가 얼마나 건방졌는지. 실감이 나서.”
의외의 답이다. 적어도 테사에겐 그랬다. 사실 웃통을 드러낸 이 금발의 해적은 길 한 복판에서 만난 후부터 매 순간이 그렇다.
다소 무거운 눈빛으로 마르코가 이어 말했다.
“나 정도면 해적 중에서도 항해가 제법 오래된 편이라. 마술사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야. 하지만 보자마자 알겠어. 내가 봤던 마술사들과는 다른 <마술사>구만. 차이점이 뭔지 물어도 되겠어?”
“당신이 본 마술사들을 설명해 봐요.”
“주로 미래를 점치거나…… 신의 목소리를 전했지요이.”
“해적도 신을 믿어요? 의왼데.”
“우리가 아니라 그들의 신. 내가 믿는 건 아버지 한 명뿐이고.”
테사는 고민했다. 어디서 어디까지 얘기해도 될까.
일단 바인브릿지의 거주민으로서 흰 수염 그늘 아래 있는 처지이니 말 못 할 것도 없지만, 마술은 그리 간단히 설명 가능한 성질이 아니다.
말해봤자 이 자가 납득이나 할까? 또 이 세계 마술사들 경지에 대해서조차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적잖은 문제다.
마르코도 테사의 고민을 눈치 챈다. 노련한 해적은 빠르게 정리했다.
“질문을 바꾸는 게 낫겠네. 가능한 일이 뭐가 있지?”
음. 차이보다야 낫지만, 이쪽도 쉬운 편은 아닌데…….
테사는 난처하게 미간을 좁혔다. 찻잔을 사이에 둔 둘의 눈빛이 부딪쳤다. 마술사의 청회색 눈이 본능적으로 사람의 소원을 읽는다.
아, 단순한 호기심 같은 게 아니구나. 이 남자 간절히 간구하는 게 존재한다.
마술사가 답하는 범위는 질문자가 누군가에 따라 미약해지고 거대해진다. 얼마든지 타인의 답을 강제할 수 있는 눈앞의 강자는 누구보다 차분히 테사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에 수만 번 휩쓸린 눈빛은 현명하고, 거친 뺨 깊이 새겨진 전장의 냄새…….
위험한 호기심이 풍랑 만난 바다처럼 요동친다.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순간 테사는 답의 범위를 확장했다. 스스로 지닌 역량, 그 한계치까지.
“이대로 밤이 새도 그 대답을 완성할 순 없어.”
“…….”
“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고, 그럴 수 없는 것들은 아주 적은 일부에 불과하거든. 내가 여태 배우고 행한 <마술사>란 그런 존재예요.”
공방의 조명이 흔들린다. 마술사가 힘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또렷하고 영민한 두 눈 안에서 금속성의 마술회로가 빛났다. 거기서 마르코는 시선을 떼기 힘들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오라힐리의 테사가 말한다.
“원하는 게 뭔가요? 해적.”
이뤄지길 내가 도울게요. 나 당신이 마음에 들었거든.
사해로 나뉜 바다와 가로지르는 붉은 벽. 그리고 그 사이 선택받은 자들만을 허락하는 위대한 항로.
이 미친 바다는 집요할 정도로 강자존의 법칙을 따른다.
타고나거나 도전하거나 단 두 개의 길에 세상 모든 재화와 영광이 쏠렸으며 승자는 독식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피스 메인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흰 수염은 위대한 항로 후반부, 신세계의 수많은 섬에 제 깃발을 꽂았고 모든 영토들은 철저하게 그의 룰에 따라야만 했다.
수탈하지 않을 뿐, 깃발 아래 모든 것이 그 해적단에 속할지니.
일개 거주민 하나하나까지 전부 해당되었고, 바인브릿지에 정착한 마술사의 정보 또한 물론 마찬가지.
전쟁에서 군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보급이듯 대해적에겐 영토 관리가 그러했다.
본대만 해도 천여 명을 훌쩍 넘고, 산하 세력이 수만에 육박하는 거대 선단의 항해는 웬만한 재화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농지를 포함한 각 영토들의 관리 인원을 따로 두어 조율했으며,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신경 썼다. 더해 아래 선에서 처리 불가능한 기밀Classified 서류들은 반드시 대장 격 인원에게 즉각 보고되도록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즉, 상처를 없던 것처럼 되돌리고 각종 병을 치유하는 약을 만들며, 자유자재로 바람을 다룬다는 <마술사>의 정보가 부선장 격인 마르코에게 닿기까진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흰 수염 본대가 마술사의 정보를 받아보는 데에는 그녀가 바인브릿지 타운에 도착한 후 약 이틀이면 충분했다.
일부 대장들은 허무맹랑한 얘기지 않겠냐며 회의적이었지만, 마르코는 선장과의 긴밀한 논의 끝에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판단했다. 이후 관련된 모든 정보는 1번대 대장 마르코 직속으로 처리되도록 분류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마르코는 마술사 관련 보고를 받았다. 오라힐리 테사, 26세.
이전 주거지는 샤본디 제도. 출신지는 이름 없는 섬.
양친과는 일찍 사별했으며 형제는 없다. 바인브릿지 타운의 보증인은 크라이튼 그웬.
시대를 대표하는 대해적의 오른팔로서 마르코가 뛰어난 베테랑이라는 데에 누구도 이견이 없다.
본능에 충실한 해적들 사이에서도 드물게 이성적인 편이었으며 모든 판단에 있어 신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한 결과, 그는 마술사가 다소 의심스럽긴 하나 아예 의심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증인의 신원도 확실하며 수상쩍은 행적도 없지. 위험인물은 아닌데…… 다만 능력이 좋아도 너무 좋으니.
마술사가 공방이라 이름 붙인 가게.
그 작은 가게에선 온갖 항로를 거친 마르코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 팔렸다.
구매자의 행운을 일시적으로 높이거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계를 펼치는 물건 등등.
무엇을 파냐는 주민의 질문에 마술사는 가능한 거라면 뭐든지, 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전 조사는 이걸로 끝이다. 마르코는 해적단의 다음 거점으로 바인브릿지 타운을 건의했다. 부선장의 의견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바람 없이 흔들리는 조명. 풍성한 속눈썹이 그늘진 아래 마술사의 두 눈이 빛난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마르코는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과연 테사의 대답은 마르코가 배의 행선지를 돌리면서 기대했던 그대로의 답이다.
허나 적은 많고, 편은 적은 이 바다.
원했던 답을 들었다고 들떠 행동할 만큼 어리거나 어리석지도 않아서.
해적왕이 나타나고 또 죽기까지. 변하고 뒤흔들리는 시대에서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게 한 것은 늘 육신의 강함보다 신중한 판단 쪽이었다. 호감과 신뢰를 구분하자고 마르코는 생각했다.
차 한 잔을 채웠다가 비우는 동안, 이 경험 많은 남자는 서로에게 적당한 호감이 차올랐음을 직감했지만…….
침묵이 빈 공간을 채운다. 적당한 텀을 두고 마르코가 말했다.
“우리는, 이 섬에 꽤 오래 있기로 했어.”
“그래요?”
“아마 일 년쯤 되겠지 싶은데.”
“자주 보겠네요.”
“자주 보겠지.”
시선은 서로의 숨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질 때까지 맞닿았다. 과도하게 집중했음을 깨닫고 테사가 일어났다. 어느덧 젖은 옷이 다 메말라 있었다. 공방 바깥의 빗줄기도 훨씬 가늘어졌다.
한 박자 늦게 마르코도 일어난다. 정리되지 않은 금발이 빗어 넘기는 손길에 더 흐트러졌다.
가겠다는 인사 없이 문으로 걸어가는 해적의 태도는 마술사와도 닮은 면이 있었다. 그에 테사는 충동적으로 묻는다.
“혹시 내 대답이 모자랐어?”
그랬을 리 없다.
이 낯선 자에겐 시간이 필요할 뿐이란 것쯤은 테사도 읽었다. 그니까 이건 정말 <충동>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도, 의문을 느낄 새도 없는 감정의 영역.
그리고 그건 이성적인 해적의 본능을 부추기는 데에도 모자람이 없어서.
마르코는 가던 걸음을 돌렸다. 조심성을 꺼트린 무법자가 원래 걷던 방식대로 성큼 다가섰다. 금세 상대의 온도가 느껴질 만큼 거리였다.
이 넓은 공간, 살짝 올려다보는 테사의 시선에만 모든 신경이 기운다. 해적이 고갤 숙여 속삭였다. 모자라?
“아니. 넘쳤지…… 과할 정도로.”
“…….”
“순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나조차 헷갈렸으니.”
저 먼 파도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몰아치는 파도인지는 알 수 없다.
낮은 호흡이 두어 번 교차한 끝에 마르코가 물러났다. 담백하게. 미련도, 작별 인사도 없이 공방의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홀로 남은 테사는 이성을 붙든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생각하는 걸 관뒀다니.
마술사로서 실로 오랜만인 경험임을…… 테사는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