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8화 (8/29)

8회

제3의 플레이어

6

“마술사?”

등 뒤로는 거대한 심볼, 항상 눈이 닿는 곳엔 <정의>가 적힌 원목 현판. 먼지 한 톨 없는 마호가니 탁자 위 종류별 전보벌레들이 정렬해있고, 미닫이 식 장지문 앞에는 단련된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대기한다.

서명을 마친 원수가 펜을 내려놓았다. 우직한 눈썹이 향하자 수석 보좌가 차렷 자세로 보고를 마저 이었다.

“아직 조사 단계입니다.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주변 탐문에 의하면 병과 부상을 치유하며 그 외 확인되지 않은 각종…….”

맹랑한 이명이군. 기껏해야 수정구슬이나 타로 카드 따위의 소꿉장난이겠지. 생각하며 흘려듣던 원수는 이어지는 내용에 얼굴을 굳혔다.

“불로불사?”

“예, 그렇습니다.”

“확실한가?”

“현재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보다 자세한 건 대상과 접촉 후…….”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바인브릿지 타운입니다. 그랜드라인 후반부에 위치한 소규모 섬으로 사 년 전, 사황 흰 수염 해적단에게 점거되었습니다.”

“흰 수염인가…… 그 망할 노괴는 죽지도 않고 안 빠지는 곳이 없군. 우리 쪽 눈을 모를 리도 없으니 보호 중이라 봐야 되겠지. 잘도 희한한 걸 끌어들였어.”

내미는 원수의 손에 보좌가 재빨리 서류철을 건넨다. 해군 원수, 센고쿠는 주의 깊은 눈빛으로 프로필을 확인했다. 계속 말이 없자 수석 보좌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럼 일단 접촉은 보류하란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두고 보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능력이다. 단순 접촉 같은 게 아닌 반드시 죽여야 할 가능성을 검토 중이니 기다리도록.”

“하지만 원수님…… 흰 수염 아래 있을 뿐, 대상은 민간인입니다.”

말한 것은 수석 보좌 뒤 대기하던 보좌관들 중 하나. 집무실 안은 침묵에 휩싸인다. 토코바시라의 삼나무 냄새만 가득한 가운데, 저도 반사적으로 나왔던 모양인지 보기 불쌍할 정도로 보좌가 식은땀을 흘려댔다.

말이 없던 센고쿠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래된 군인은 노력하지 않아도 발소리가 중압적이다. 걸어간 노장이 청년의 눈을 들여다봤다.

“중위인가…… 새파란 신참이군.”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들 이런 내가 과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중위, 답해보게. 지금 시대를 뭐라고 부르지?”

“…….”

“못 하겠다면 내가 대신 하겠다. <대 해적 시대>다.”

해군. 백의를 입은 바다의 군인들. 각자 지닌 신념은 모두 다르지만, 그 등에 적힌 것은 오로지 정의. 센고쿠는 집무실 창가 그 밖을 바라본다.

“저 바깥의 선량하고 힘없는 자들조차 그렇게 부른다. 아이들은 웃기지도 않은 해적 놀이를 하며 자라지. 무법자가 되고, 범법자가 되는 길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과연 정상이라 보는가?”

사람이길 포기함은 아니나 사람의 도의를 찾고자 함도 아니다. 센고쿠는 다시 등을 돌려 제자리에 앉았다.

“눈앞 시야에서 벗어나게. 청년.”

“…….”

“우리는 보다 큰 정의The Greater Good를 위해 존재함이니.”

다만…… 그래. 민간인이니 죽이기 전, 시험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겠지. 잠시 고민하던 원수는 무감정한 얼굴로 새 명령을 적어나갔다.

/

동물행동 연구에는 임프린팅이란 개념이 있다. 달리 말해 <각인 효과>라고 부르는데 세간에 널리 알려진, 새끼 거위가 알에서 부화하고 처음 본 자를 어미로 인식해 따라다니는 행위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최근 단순 조류뿐만 아니라 포유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존재한다고 밝혀졌는데…… 테사는 심각한 얼굴로 마르코를 바라본다. 내가 이 해적에게 끌리는 것이 혹시 그 때문은 아닐까?

공방 안 카우치에 긴 다리를 뻗고 앉은 해적. 제 집처럼 드나드는 그는 지금 테사가 건네준 시가를 태우는 중이다. 물론 일반 담배는 아니다. 착한 어린이는 따라하지 말 것.

“이거…… 맛이 이상한데.”

“몸에 좋은 거라고 했잖아요. 좋은 게 맛있는 거 봤어?”

“맛있는 쪽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아?”

“서로 가진 상식이 전혀 다른 듯하니 말해 뭐하겠어요.”

엄밀히 따지자면 테사가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마르코는 아니다. 납치 매니아 인어부터 골목에서 두들겨 팼던 인신매매꾼들, 진짜 친구가 된 크라이튼 그웬, 그 외 이름을 다 읊어봤자 입만 아픈 타운 사람들 등등. 이전에 존재한 자들이야 셀 수 없이 많다.

의미 있는 인연만 따진다 해도 앞서 그웬이 있으니까. 음 단순한 동성과 이성의 차이인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테사는 턱을 괴고 고민한다.

“생각 많은 얼굴이구만.”

“덕분에.”

“내 얘기 제대로 들은 건 맞고?”

“으음. 솔직히 브로커 얘기 뒤부터는 지루해서 집중 못 했어.”

명성을 꺾어보겠다 까부는 피라미들을 잡아다가 군에 넘겨 현상금을 대신 챙겨주는 커넥션이라니. 해군 돈으로 해적질을 한다는 말에는 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마르코는 재떨이 위에 비스듬히 시가를 올렸다. 몸에 좋은 약이라니 빨아보긴 했다만, 애초에 즐기는 편도 아니다. 그가 한숨과 함께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에선 너도 우리 사람이라 생각할 테니 잘 들으라 했잖아.”

“아.”

“사람 앞에 두고 딴 생각이나 하고.”

“음.”

툭툭. 눈을 피하자 이쪽을 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두드린다. 매사 건성인데도 쓰는 제스처 하나하나가 딱 필요한 만큼 효과적이다. 테사는 마르코의 굴곡진 손마디를 보다가 고갤 들었다.

“잘 들어.”

“네.”

“지금 균형은 굳이 건드릴 필요 없단 걸 해군도 알아. 특히 이 신세계에선 우리를 포함해 해적의 추가 훨씬 무거워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래도 이쪽에서도 군 정부 관련 소식을 듣는 라인이 따로 있는 만큼 그쪽도 비슷한데…….”

해적과 해군, 해군과 해적. 그 사이 복잡한 정세를 대략적이나마 설명하며 마르코는 그들도 테사를 주시할 것임을 일렀다. 그에 이어 해도 위 근처 해역들을 짚으며 해적단 휘하 영토 위치들을 알려준다. 얌전히 듣던 테사가 물었다.

“이 모든 게 내가 이조를 치료하고, 선장에게 인사하러 가는 것만으로 알아둬야 하는 정보라고요?”

“말했지만, 오라힐리 넌 더 특수한 경우로 봐야…….”

“그래도 너무 많고 또 너무 자세해.”

아무리 선 안으로 들어왔다 해도 이건 좀 작정한 것 같지 않은가. 테사는 흰 수염 보호 아래의 거주민일 뿐, 소속도 산하도 동맹도 아니다.

물끄러미 테사가 마르코를 바라본다. 늘 느긋한 이 해적은 남에게 제 속이 읽히는 것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물러나듯 마르코는 등을 기댔다.

“뭐, 단순히 <인사>만 하러 가는 건 아니지요이. 내 소원이 뭔지 알고 있잖아.”

“그리고요?”

“…….”

“더 없어요?”

듣지 않아도 애써 집중하게 만들고, 시선을 마주치며 짚어주던 손가락. 확실히 기억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던 눈빛. 몸은 때때로 언어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마르코가 실소했다.

“물러서는 법이 없구만.”

“마술사예요. 지는 거 안 좋아해.”

“져주는 걸 즐기는 해적도 없지.”

“그래서 안 져줄 건가요?”

“이미 눈치 챘잖아. 굳이 들어야겠어?”

무언으로 테사는 답을 대신했다. 마치 해적이 그렇듯 고집스레 기다려본다. 맞은편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데 마르코에게선 답이 없다. 참지 못한 테사가 자릴 박찼다.

“좋아. 해보자 이거지. 게임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걱정돼.”

밑으로 깔리는 나지막한 중저음. 천천히 테사는 뒤 돌았다. 아직도 눈을 떼지 않은 마르코가 웃음기 없이 마주본다. 거기에 느긋함 따위는 일절 없었다.

“신경 쓰이고 걱정이 된다. 네가.”

“…….”

“알아. 넌 뛰어나고, 나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지. 모르지 않는데.”

“…….”

“테사. 사람은 이미 아는 것에도 한심해질 때가 있잖아.”

굳이 듣지 않아도 상관없을 별거 아닌 말에 서로 자존심 부리는 지금처럼. 아무리 겪어도 마음 쓰는 일에는 모두 서투른 약자가 된다.

차분히 말을 마친 마르코가 두 손 들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항복 선언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하나도 져주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스스로 한심하다는 얘길 해봤자 이만큼 설득력 없기도 힘들 것이다. 바다 냄새가 나는 사내. 마르코는 보이는 면까지 모두 그를 닮았다. 알 것도 같다가 또 도저히 넘겨 짚어볼 수 없도록 한다.

마르코가 일어서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데를 보면 뺨 어디쯤을 건드리고, 흘겨보면 씩 웃었다.

“이렇게 승부욕이 있었을 줄이야. 의왼데. 이제 보니 도박꾼이었구만.”

“깡패랑 도박꾼이라. 같이 있으면 그럴싸하겠네요.”

“해적이래도.”

“마술사예요.”

사실 테사는 (마술사 치고) 승부욕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말 한 마디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물론 아니었다. 유독 마르코에게 물러지는 것처럼 이 역시 그 앞에서만 그럴 뿐이다.

단단하고 나른한 눈매,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눈빛. 이 놀랍도록 완숙한 해적이 보이는 여유의 한계가 어디일까 한번이라도 들춰보고 싶어서.

“그럼 친애하는 마술사. 이만 슬슬 가볼까.”

문을 열며 마르코가 손을 내밀었다. 태양이 그 뒤로 선다. 테사는 잡는 대신 앞장서라 등을 밀었다. 이대로 잡으면 영영 놓아주기 싫을지도 몰라서였다.

마치 왕을 알현하는 기분이다, 라고 테사는 생각했다.

이따금씩 의문 들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그토록 충성하게 했을까. 어떻게 쉽게 욕망하지 않는 남자를 소원하게 만들었을까.

해풍과 독한 럼주, 쇠와 총 그리고 피. 잘 정리된 갑판에는 지워지지 않을 혹독한 냄새가 뼛속 깊이 배여 있다. 아마 세월이 흘러 이 배가 수명을 다해 해저 아래 잠드는 날까지 이어지겠지.

사황 흰 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는 그런 갑판 위에 황제처럼 앉아 있었다.

하나의 태산 같기도, 그 자체로 일국 같기도 했다. 수많은 흉터들이 쌓아올린…… 어딘가에 있을 이 남자의 적들이 불쌍하다. 무심코 테사는 동정했다. 그만한 인물이었으며, 사실 같은 하늘 아래 발 딛고 있음이 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관찰은 다 끝났나?”

“네. 처음 뵙습니다. 오라힐리 테사. 마술사입니다.”

“에드워드 뉴게이트다. 내 아들들이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

마술사가 관찰하는 동안, 흰 수염도 꼿꼿이 편 허리와 눈빛 즈음을 봤다. 사람을 흑과 백으로 양단할 순 없는 노릇이나 오래 산 자에겐 보다 쉽게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그가 기세를 푼다. 테사는 숨을 들이쉬었다.

“뭘 하셨었군요.”

“처음 겪어보나. 패기라고 하지.”

“제가 들은 것들과는 다르네요. 이정도로 위협적일 줄은 몰랐거든요.”

물러나 지켜보고 있던 마르코가 말했다. “패왕색이니까.” 난간 쪽에서 동료들과 있던 그가 조금 더 근처에 걸터앉는다.

“왕의 자질을 지닌 자들이 갖는 패기. 위압하는 힘인데다가 아버지의 패기이니 버틴 게 대단한 거야.”

“마르코 말이 맞다. 들리는 소문이 많아 시험해봤는데 제법이군.”

“해적선에 오르는데 그 정도 각오는 해야죠.”

말은 그리 해도 자칫 쓰러질 뻔했다. 증조모로부터 받은 요정 족의 각인이 테사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터다. 패기뿐만이 아니었다. 악마의 열매가 흩트리는 흐름부터 세계의 전율까지.

쳐다만 봐도 아득할 지경. 이미 그는 시대 그 자체였다. 테사는 티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다. 흰 수염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라라라, 하는 독특한 소리였다.

“애송이가 꽤 하는구나. 이 많은 눈들이 지켜보는데도.”

“시선은 익숙해요. 약간 성가실 뿐.”

“마술사라…… 재밌는 녀석이야. 귀족 출신인가?”

항해만 수십 년을 거친 지긋함이 마술사를 내려 보았다. 안심하라는 듯 흰 수염이 덧붙였다. “마술은 늘 귀족의 전유물이었지. 기억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 테사는 고민하다가 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겠죠. 제 나라에선. 하지만 떠나왔으니 지금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당신께서 보호하는 섬에 거주하는 한 명의 마술사. 그걸로 족해요.”

“뿌리를 잘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을 텐데.”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살아가려면 그 또한 방법이니까요.”

드넓은 갑판 위, 말하는 이는 황제와 마술사.

답하면서도 테사는 아이러니했다. 눈앞의 거대한 이가 터무니없는 존재임을 앎에도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어쩌면 테사의 범위 밖 걸물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마술사를 포함해 무엇도 그를 해칠 수 없기에. 보잘 것 없는 욕망에서 이미 벗어난 대경은 결코 아래를 향하지 않는다.

뚫어지게 보던 흰 수염이 입가를 당겨 올렸다. 한없이 인간다우나 한없이 초월자에 가까운 얼굴. 인자한 노인에서 위대한 전사까지 전부 이 한 사람 안에 담겨 있었다.

“결단할 줄 아는 녀석들은 싫지 않지. 원할 때 내 이름을 가져가 써도 좋다. 마술사.”

그에 젊은 마술사는 진심을 담아 인사한다. 영광입니다, 흰 수염.

보다 깊은 얘기는 갑판 아닌 선장실에서 하기로 했다.

물론 독대는 아니고. 극비인 만큼 대장 격 인원만 대동하기로 한 것이다. 지나가면서 마주친 복도와 선실들은 배가 아니라 무슨 목조로 건축을 해놓은 모양새다. 힐긋거리는 테사 옆에서 마르코가 속삭였다.

“그렇게 두리번대다가 오해 사도 몰라.”

“……내 편 안 들어준다고요? 당신만 믿고 탔는데?”

“그래도 나보다 든든한 편이 생겼으니 안심해요이.”

“무슨 뜻이야?”

“아버지가 마음에 드신 듯하구만.”

세는 것이 버거울 만큼 오래 함께한 사이여도 마르코 또한 아버지와 매번 의견이 일치하진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은 사적인 의도가 섞이지 않았다 장담도 못하는 경우였다.

평소 제 판단력엔 의심 없는 편이나 이건 좀 다른 문제이므로. 마르코는 지켜보기만 했다. 이제까지 보고 겪은 오라힐리 테사. 모든 감상은 후회 없이 아버지께 전했으니 결정적인 판단은 온전히 선장의 몫이었고.

“어떻게 확신해요? 물론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긴 했지만.”

“유례없는 결정이었으니까.”

국가도 아니고, 섬도 아닌 민간인 한 명에게 이름을 허락했다. 물론 해적이 아니니 산하나 동맹도 불가하므로 보호를 위한다면 그쪽이 맞긴 하지만. 아마 이조를 구한 감사의 뜻도 포함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긴 대화를 나눌 타이밍은 아니었다. 나중에 얘기하자 눈짓하고 마르코가 테사를 먼저 들여보냈다. 안면 있는 몇몇 대장들과 눈인사 나누며 테사는 선실 내로 들어섰다.

대장들은 참관하는 역할인 듯했다. 흰 수염의 최정예들. 위대한 명성을 대표하며 아래로 각각 수백을 지휘하는 자들이었다. 갈무리하는데도 새어나오는 기세들은 하나같이 보통을 상회했다.

흰 수염은 아까보다 한결 무거워진 눈빛이다. 곧 테사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최근 지병이 생기셨다고 들었어요. 또 모든 의사들이 불치의 병이라고 진찰했다고도.”

“그래. 인간은 모두 끝이 있는 법. 나이를 먹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순리일 것이다. 내 시건방진 아들들은 생각이 다른 듯하지만.”

“원래 지켜보는 마음은 또 다른 법이죠. 당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능력이 되는 데까지 돕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여성 치고 작은 키는 절대 아니나 흰 수염 시선에선 턱없이 작았다. 영민한 눈으로 마술사가 그에게 묻고 있었다. 흰 수염은 물끄러미 보다가 응수했다.

“대가 없는 호의는 결국 더 큰 폭풍을 초래할 뿐이다. 바라는 게 무엇이지.”

“없습니다. 저는 선장님을 따르는 수많은 아들들 중 한 명의 소원으로 여기 서있는 거니까요.”

마르코. 흰 수염은 가장 신뢰하는 아들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내 아들에게도 대가는 없는 것인가.”

아들은 아픈 아버지를,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서로 걱정하는 모습이 혈연을 떠나, 또 해적임을 떠나 여느 부자지간과 다름이 없었다.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애정으로 엮인 고리.

부드럽게 테사가 웃었다. 그들이 마술사의 냉랭한 인상에서 쉽게 기대하지 못한 미소였다.

“마술사들은 본래 인간의 소원으로부터 힘을 얻어요. 고대부터 지금까지 쌓여간 수많은 염원들이 우리에게 기적의 가능성을 내려준다고 하죠. 마술사로 태어난 이상, 그 은혜에 신세진 몸. 답하는 의미로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해요.”

“…….”

“뭐 하나 바라본 적 없는 자가 간절히 간구하는 게 있었어요. 선장님, 그런 소원은…… 반할 만큼 눈부셔요.”

마르코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물행동이론이니 각인 효과니 떠들어도 테사는 사실 알고 있었다. 다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제 힘에도 제한이 있고, 따라서 장담은 못해요. 아마 악마의 열매까지 드셨으니 읽기마저 쉽지 않겠죠. 이건 제게도 도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이고.”

“네. 그럼에도 이뤄주고 싶으니까요.”

우리 모두 타인으로 탄생한다. 각자 하나의 세계로서 자립한다. 둘의 만남이란 곧 이의 만남이다. 너라는 세계가 내게로 와 닿아, 그로써 또 다른 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바람 또한 되리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나이에게 답하며 테사는 스스로에게도 답했다. 놀랍도록 다정한 얼굴로 흰 수염이 웃는다.

“기대한 것 이상의 답이다. 고맙다, 마술사. 나 흰 수염, 아버지로서 기꺼이 네 도전을 받아들이마.”

미온한 해풍이 분다. 마술사가 청회색의 눈을 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한 명의 해적은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임을…… 아주 강렬히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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