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1화 (11/29)

11회

제3의 플레이어

9-1

만능에 가까우나 결코 만능은 아니다.

테사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실감했다. 이 젊은 마술사는 친구가 악몽을 꾸지 않게 할 순 있어도 와병까지 막진 못했다. 그웬은 내내 지독한 열에 시달렸다. 의사는 당신도 알겠지만, 어떤 명의라도 마음을 고치긴 어렵다며 해열제를 처방한 뒤 떠났다. 스트레스를 주의하란 말도 함께.

테사가 머무는 두 시간동안 그웬은 서너 번 눈을 떴다. ‘독한 감기인가봐. 그날 옷을 얇게 입었나.’ 중얼거리는 쉰 소리에 마술사가 답했다. ‘감기였으면 내가 이미 백 번도 더 고쳤겠지.’ 그웬은 힘없이 웃었다.

‘테사…… 알지. 넌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친구야.’

‘얘, 넌 단순히 스트레스로 인한 발열이야. 시한부 환자처럼 말하지 마.’

‘대답해줘. 네겐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보이니?’

테사가 그웬에게 가장 특별한 친구이듯, 마술사에게도 그웬은 평생 가져본 적 없는 가장 연약한 친구다. 한없이 여린 보통 사람. 친구의 눈으로 지켜봐주고 싶었지만, 그웬처럼 방어 개념이 없는 일반인은 보고 싶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쫓기는 얼굴로 그웬이 테사의 손을 잡았다. 확신 없는 불안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마술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보여.’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줘.’

‘틀리지 않아. 선택은 죄가 될 수 없어.’

기꺼이 원하는 말을 해주며 테사는 그웬의 눈을 감겼다. 마술사의 손짓에 저항 없이 그웬이 잠에 빠져들었다. 테사가 중얼거렸다. 작은 새가 폭풍우를 피해 지붕 아래 들어온다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아, 친구여.

문 바깥으로 나오자 오거스트 소령이 서있었다. 테사를 보자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숨긴다. 거기 들린 것은 그웬의 바랜 적발을 닮은 나리 꽃다발이다.

‘소령은 정말 재수 없는 타입이에요.’ 테사의 말에 군인이 답했다. ‘순수한 병문안일 뿐입니다.’ 그리고 헛기침하며 묻는다. ‘생각은 다 끝나셨습니까, 마술사?’

해무가 짙게 낀 오전이었다. 어딜 봐도 흐릿하다. 창가를 힐긋 본 테사가 말했다. ‘고려 중이에요.’ 뻔뻔한 낯으로 돌아온 오거스트가 어느 방향으로 고려 중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재차 떠봤다.

테사가 즉답했다. ‘부정적으로요.’ 그에 소령은 실소했다.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

해적들이 출항한 지 닷새째.

마치 흰 고래의 등 같은 해무가 타운을 잠식했다. 꼭 태풍이 지나가기 전 날씨가 이렇다며 노인들은 창문을 덧댈 것을 조언했다. 극심한 안개에 제일 높이 내걸린 졸리 로저마저 그 윤곽이 희미하다. 모두들 조심스럽게 다니며 각자 재물이 있는 곳을 정비했다.

물론 테사에겐 해당 없는 얘기다. 이 마술사에게 바람은 늘 제일 친한 지기였으며 폭풍은 가장 믿음직한 무기였다. 안개 또한 마술사의 눈을 가리지 못한다. 테사는 평소처럼 걸어 공방으로 향했다.

만약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언제나 인간뿐…… 마술사는 그리 생각하며 발치에 떨어진 과육들을 쳐다본다. 멀거니 선 테사를 향해 과일상 만델린이 소리쳤다.

“어이! 누구야, 거기 좀 주워봐! 하나도 안 보인다고!”

“무슨 이런 날씨까지 좌판을 열고 난리예요?”

테사가 복숭아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빛깔 좋게 잘 익은 복숭아는 안타깝게도 떨어지며 수명을 다 한 듯했다. 누군고 눈살 좁히던 만델린이 어깰 늘어트린다.

“뭐야, 약재상이었냐…… 제기랄. 날씨가 이런다고 하늘에서 보상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라도 더 팔아야 먹고 살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간 있으면 같이 좀 주워.”

“약재상이 아니고 마술사요. 부탁하는 주제에 꽤 대단한 말투인데요.”

“됐고! 너뿐이야? 이러다가 애기들 다 버리게 생겼어. 좌판 두 개가 다 엎어졌다고. 염병할 안개 같으니.”

애기들…… 잘도 무생물들에게 그런 애칭을. 과일들이 알면 감동해서 오열할 지경이다. 혀를 찬 테사가 부유 마술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저도 이제 알았는데 저 뿐만은 아닌 듯하네요.”

“뭔 소리야?”

“아, 저를 말하나 봅니다.”

어수룩한 기색으로 청년이 뒤편에서 걸어 나왔다. 만델린이 대경해서 꽥 소리 질렀다. 아 깜짝이야!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요? 이놈의 안개 때문에 뭐가 보이질 않네.

테사가 안경을 치켜 올린다. 순박한 인상의 사내는 마술사와 키가 비슷했으나 여기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잘생긴 편에 들었다. 타운 사람은 아니고…… 돌이켜보니 아까 오거스트 소령 옆에 저런 얼굴이 있었던 것도 같다.

“왜 따라왔죠?”

“뭐야. 약재상을 따라온 거야? 겁나 착하게 생겨선 스토커였어?”

“만델린, 부탁이니 좀 빠져요. 정신 사나워.”

“아 그게…… 일단 이쪽 분 과일부터 주워드리고 얘기할까요?”

남자가 과일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만델린 말이 맞긴 맞다. 비유하자면 초면에도 담보 대출 해줄 것 같은 인상이다. 말투는 공손했고, 몸짓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테사는 물끄러미 보다가 말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마술사가 손짓했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떨어진 과일 모두가 일시에 부유했다. 손짓을 따라 하나씩 좌판에 다시 담긴다. 마지막 과일까지 만델린 품에 떨어지는 걸 보며 테사가 뒤 돌았다.

“이제 해봐요. 얘기.”

이름은 일레븐. 나이는 스물일곱, 직업은 소설가.

특이한 이름이죠? 순하게 웃어 보인 그는 오거스트 소령의 오랜 친우로서 이번에 동행했노라 스스로를 소개했다. 비록 해군은 아니지만, 친구의 피앙세가 궁금했을 뿐더러 오거스트의 부탁도 있었다고.

“객관적인 눈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말하더군요. 아무래도 제3자의 눈이 정확하지 않겠냐면서. 어떻게 보면 테사 씨와 저, 우린 비슷한 처지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오라힐리가 더 좋아요.”

“네?”

“이름보다 성으로 불리는 쪽이 편하다고요. 그쪽은 성이 어떻게 되죠?”

“아…… 실례했네요. 전 성은 따로 없습니다. 고아거든요.”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과거 얘길 풀어놓는다. 마치 버튼 하나 누르면 자동으로 길게 노래하는 주크박스처럼.

이어지는 과거사는 나름 감동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가난한 고아 소년과 친구가 되어준 귀족 소년. 함께 해병이 되길 꿈꿨지만 불행처럼 닥쳐온 부상, 고난에 더욱 굳건해진 우정…….

내가 이걸 왜 듣고 있어야 하지? 테사는 생각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어떤 특별한 기색도 없었다. 쑥스러운 얼굴로 일레븐이 긁적인다.

“지루한 얘기죠? 아 저도 모르게 엄청 떠들었네요. 평소엔 절대 이렇지 않은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인상 깊었어요. 그나저나, 왜 따라왔는지 다시 물어봐도 될까요?”

“아 참, 그랬죠. 그 얘기가 있었죠.”

안개로 습도가 높다. 약간 축축해진 금발을 일레븐이 빗어 넘긴다. 드러나는 이마는 반듯했고, 선량한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잘 그린 명화처럼 미소 지으며 그가 말했다.

“진부하지만, 이상형 같은 얘기 믿으세요? 그게 아니면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라도. 그래서 실례인 걸 알면서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어요.”

테사는 그만……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해적들 출항 이레 째. 이상한 세상이 더 이상해진 듯하다.

어떤 결혼식을 치루는 곳에선 신랑의 친구와 신부의 친구가 맺어지는 일이 흔하다는 것쯤은 테사도 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흔한 케이스의 일환으로 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인간들이 다 개구리밥이 되어봐야 정신 차리려나. 테사는 눈가를 주무른다. 이틀 사이 퍼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누가 꼭 작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의심 가는 후보야 물론 많다. 우선 일레븐과 오거스트 소령부터. 그 외 <잘생긴 소설가 양반이 마술사 처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따위의 얘기에 흠뻑 빠진 심심한 타운 사람들까지.

그 중에서도 단독 선두는 오거스트 소령. 이 젊은 장교는 마술사를 회유하는 일보다 제 불알친구와 마술사를 잇는 데에 더 중한 사명감을 지닌 듯 굴었다. 얼마나 적극적인지 수단과 방법마저 가리질 않았으니까.

테사는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집어던진다. 실실 웃으며 오거스트가 자세를 고쳤다.

“친구의 편지를 이렇게 던지셔도 됩니까? 그웬 양이 슬퍼하겠어요.”

“내 친구 이름 팔아먹는 짓 관둬요.”

“하지만 그웬 양 부탁이 아니면 만나주지도 않으시잖습니까. 그 공방이란 데도 이상하게 문도 안 열리고 말이죠.”

결과적으로 말하면 크라이튼 그웬은 타협했다. 그게 선택이자 답이었다.

테사는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 그웬이 타협한 상대는 오로지 <현실>. 거기에 오거스트 소령의 자리는 아무데도 없다. 다만 그가 어떻게 입을 턴 건지 몰라도…… 이름까지 빌려주는 걸 봐주는 것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선술집 안. 천장은 높고 벽은 얇다.

본래 해적들로 바글거렸던 실내는 약간 다른 바다 냄새로 꽉 차있었다. 주인인 빈센트가 익숙한 럼주 대신 위스키와 와인을 꺼내 옮긴다. 제복 차림의 해군들은 삼삼오오 모여 건배했다.

술집 바깥으로는 전진하던 폭풍우가 막 도달하는 참. 나무문 경첩이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낸다. 판자 위를 빗겨 치는 빗줄기는 몰아치듯 사납다.

그럼에도 군인들을 잠재우긴 꽤 모자라서.

오거스트 소령 근처의 장교들이 파이프를 깊게 빨아 뱉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는 천장 조명까지 솟아 닿는다. 그 틈에서 테사는 표정 변화 없이 고지했다.

“문이 그쪽에게 열리는 일은 영영 없을 거예요. 또 출항할 때까지 또 보는 일도 없을 거고요. 이 가증스러운 편지가 대필인 걸 알아도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거 하나니까 새겨 들어요. 소령.”

“그렇게 제가 마음에 안 듭니까, 오라힐리 씨?”

대신 답한 것은 소령 왼편에 앉아있던 일레븐. 미청년은 퍽 상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우리가 제법 잘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깜짝 놀랐다는 듯 테사가 깜빡였다.

“거기 있었군요. 일레븐 씨. 하도 존재감이 옅어서 몰랐어요.”

신랄한 비꼼에 소령이 친구 쪽으로 고갤 기울였다. ‘일레븐, 상심하지 말게. 진짜 싫었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불행히도 테사는 청력이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다. 따라서 저 여우 새끼를 당장 여기서 꿇려 짖게 만들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젊은 소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벌린다.

“그러지 말고, 일단 좀 앉으시죠. 마술사, 아니 오라힐리 양. 계속 서계실 겁니까? 우리 사이좋게 앉아서 얘기합시다.”

과연 어디까지 하려나. 단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이들은 마술사의 힘을 모르고, 또 큰 착각에 빠져 있으니까. 예로부터 쌓인 기록들을 보면 패배는 상대를 우습게 여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에게로 향한다. 약속된 패자들에게 베풀지 못할 것도 없다고 테사는 그리 여겼으나…….

문득 다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폭풍우를 만난 파도의 비명이 이곳까지 우짖었다. 테사는 앉으며 건조하게 말문을 열었다.

“좋아요. 나도 슬슬 매듭지을 생각이었어요.”

“그렇죠. 저희 아직 끝내지 못한 얘기도 있잖습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유난히 더 싸늘하십니다.”

“집어치워요. 대체 이 웃기지도 않은 연극을…….”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바람들이 속삭였다. 거센 흐름을 타고 흘러와 귓가의 흑발을 흩트린다. 균형 잃은 조명이 점멸했다. 뭐? 한쪽 눈썹을 치켜든 테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테사를 잡았다. 마술사, 방금 뭐라고……. 그와 동시에 해병 하나가 경첩을 밀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소령님!

“비상입니다! 해적단, 흰 수염 해적단이!”

뒷말은 포격 소리가 대신했다. 폭풍우를 찢어발기는 폭음이다. 멀지 않은 곳, 항구였다. 바다에서 시작된 충돌이 가까운 내륙까지 뒤흔들었다.

거나한 충격이 선술집을 휘감는다. 잔들이 떨어지고, 술병이 바닥으로 굴렀다. 소음과 소음의 연속. 지면과 부딪친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며 튀어 올랐다.

테사가 반사적으로 한쪽 뺨을 감싼다. 청각은 아직도 먹먹하다.

미처 결계를 두를 생각도 못 했다. 마술사 이전에 현대인. 등의 각인은 위험하다 싶을 때만 스스로 발동한다. 뺨을 긋는 생채기 따위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는 테사를 옆에서 다소 거세게 끌어당겼다.

“제기랄, 일단 가시죠!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달려온 해병이 긴박한 목소리로 소령에게 보고했다. 서남쪽, 커닝엄 해역에서 출현. 군선 일 척은 이미 반파. 전혀 예측되지 않았고 감시선으로부터의 연락은 없다. 전선 전멸로 추정되며 충돌 현황은…….

그러나 거기서 더 이어지지 못한다.

먼저 나간 해군들 중 하나가 문을 박살내며 안쪽으로 퉁겨 굴러왔다. 테사는 소령이 짓씹는 욕설을 듣는다. 상황과 절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걸음 소리도 들었다.

언제나 느긋하고…… 쫓겨본 적 없는 약탈자 특유의 발걸음.

마르코가 말했다. 폭풍우 속에서 청염을 꺼트리며.

“손 떼. 해군.”

“…….”

“아니면 그 숨통을 떼야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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