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3화 (13/29)

13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上

10

사황의 힘은 그 일신의 강함에만 한하지 않는다. 시대를 움켜쥔 패자로서 미치는 영향력은 그들 해적단을 넘어 광대한 영해로 뻗어나갔다. 지배하는 섬들의 모든 경제활동과 연관된 만큼, 그 세력은 본선과 산하 해적들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층으로 퍼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 흰 수염 해적단, 총 전력 수만 명. 하지만 그 밑을 들여다보면 광활한 영해만큼이나 너르고 탄탄한 거미줄이 있다.

단순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조력자들. 이들은 때때로 흰 수염의 눈이 되었으며 또 귀를 대신하기도 했다.

—저번에 말했잖아. 또 말해줘? 그 자식 낯짝만 뺀질해선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잠깐 보이는 눈빛이. 내 참,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을 지경이라니까. 절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아냐.

“군인은 아니라고 했다며.”

—뭐였더라, 소설가라던가. 거짓말 아니겠어? 책방 그 노인네도 그러는데 절대 펜 잡는 손은 아니라 하든만.

“그래…… 크라이튼의 약혼자란 해군에 대해선 아직도 들은 게 없고?”

—타운 사람들이랑 마주쳐야 말이지. 뭔 비밀들이 그렇게 많은지. 지들끼리만 몰려다니면서 바렛 씨네 집이랑 술집만 들락거린다니까.

그 정도면 됐다. 5번대 소속 핀이 고갤 끄덕였다. “알았어. 돌아가서 내가 술 한 잔 살게.” 풀린 눈을 깜빡이는 전보벌레. 가만히 듣던 마르코도 짤막하게 인사한다.

“고맙다. 만델린. 도움이 됐어요이.”

바인브릿지의 과일상 만델린은 좋은 술을 사야 될 거라며 낄낄 웃었다. 너희가 없어 타운이 별로라며 빨리 돌아오란 말도 함께. 만델린의 형상이 사라진 전보벌레는 이내 눈을 감고 잠잠해진다.

각자 생각에 잠기는 회의실. 5번대 대장 비스타가 일단 크루부터 내보냈다.

“핀, 수고했다. 나가봐도 돼.”

다정다감한 성격의 5번대 핀은 발이 넓기로 유명했다. 바인브릿지 타운에 따로 정보원이 없는 건 아니나 거주민들과 두루두루 친한 그가 더 빠를 때도 적잖았다. 이번도 비슷한 경우다.

핀이 나가자 4번대 대장 삿치가 제일 먼저 운을 뗐다.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 하겠냐 싶지만…… 그런 것 치곤 무척 조용하네. 그 소설가란 놈도 보통 수상한 게 아니고.”

“게다가 정보 부대에 의하면 낯익은 얼굴도 전혀 없다 하더군.”

콧수염을 매만지며 비스타가 응수했다. 지금 회의실 내에 있는 대장은 셋. 해도를 치우며 마르코는 눈가를 문질렀다. 그럼 장성 급은 아니란 얘긴데요이.

본대가 출항하자마자 거점에 들이닥친 해군. 흰 수염 해적단에겐 보급과 정비만을 위한 섬들이 따로 있다. 보통 그곳에 들르는 출항은 대부분 주기가 비슷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해군의 출현은 어떻게 봐도 그 시점을 노렸다고밖에 판단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관적인 부분은 있는걸. 해군이나 수상한 놈이나 둘 다 노골적으로 마르코네 마술사한테 들러붙어 있잖아.”

“삿치…….”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될지 말문이 막힌다. 한숨 쉬는 마르코 옆에서 비스타가 납득했다. 그런 거였나…….

“마르코. 중요한 정보를 빼두고 말하면 뭘 해도 논점을 놓치게 되잖나.”

“농담하지 마. 삿치 녀석이 멋대로 한 말이다. 그런 사이 아니니까.”

비스타는 잠시 바라보더니 고갤 흔들었다. 얼굴은 다른 얘길 하는군.

“본부의 군선이긴 하나 장성 급이 아니면 목적이 충돌은 아니란 뜻이다. 전에 얘기한 대로 그 마술사의 포섭이 목표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 원했다면 눈에 띄지 않는 방법도 있었을 터.”

“…….”

“우리 구역 한가운데 침범하지 않나, 시기를 노린 점도 그렇고. 너무 노골적인 도발이라 의문이었는데…… 이쪽과의 관계가 두텁다는 걸 알고 있다면 전부 맞아떨어진다.”

파도의 움직임에 맞추어 머리 위 전등이 흔들린다. 5번대 대장이자 돌격대장을 겸하는 비스타는 마르코와 비슷한 최고참으로 판단력이 뛰어나기로 손꼽혔다. 느릿하게 마르코가 턱을 쓰다듬는다. 가만 듣던 삿치가 물었다.

“비스타, 네 말은 그러니까 <이간계>라 이거야?”

“최종 목표가 포섭임은 분명하잖나. 바인브릿지의 마술사가 마르코와 그런 관계든, 아니든. 멀어질 사이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부터 갈라놔야 그들도 진행이 되겠지.”

“이해가 안 되네. 말처럼 간단해야 말이지. 그 마술사, 잠깐 봐도 혀를 놀려 먹힐 부류는 아니잖아? 대체 뭔 방법으로.”

화검의 비스타. 비스타는 검사였다. 무엇이든 베는 검사의 눈엔 쉽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건 요리사이자 또 한 명의 검사인 삿치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아무래도 간과하고 있는 듯하지만.

비스타는 허리춤의 검을 툭툭 쳤다. “중요한 걸 잊었군, 삿치.” 그에 삿치가 깨달은 듯 이마를 누른다.

“아, 그래. 그렇지. <민간인>이군.”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박이가 도드라지듯. 생과 사. 그 외줄 사이 걸쳐 살아가는 이들 틈에서 땅에 발 딛고 선 사람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마르코는 문득 마술사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린다. 가는 손목과 가지런한 목선, 너무 희어서 마치 성역 같던…….

“골치 아프네. 해군 놈들. 이거 진짜 죽으러 온 놈들이었잖아. 무슨 자살특공대도 아니고…… 목숨 바쳐 우릴 악당으로 만들겠다 이거냐.”

“당하는 해군, 죽이는 해적. 선과 악은 명확하겠군. 양심을 자극하는 건 오래된 회유책 중 하나지.”

충돌은 불가피하다. 폭탄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거점으로 삼은 섬, 적은 무려 흰 수염의 앞마당에서 깃발을 모욕했다. 그냥 보내줬다간 신세계 전역에 사황의 체면이 우스워지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화약고 같은 세계.

흰 수염은 이를 누르는 누름돌이나 다름없었다. 그 무게는 가벼워지는 일 따위 있어서도 안 되며 그의 장성한 아들들 또한 좌시하지 않는다. 적의 잘 짜인 연극인 걸 알면서도 이번엔 어울려줘야 하는 이유였다.

바람 빠지듯 삿치가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다.

“우린 해적이고. 따지자면 나쁜 놈들이 맞긴 하지만 말야. 이럴 때마다 정의란 것들도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고. 마르코, 이거 원수 그 양반 짓일까?”

“글쎄. 모를 일이지요이. 간교한 편이긴 해도 아버지는 센고쿠가 아군을 버림 패로 쓰는 인물은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그 사람 설계라기엔…… 좀 지저분하구만.”

아마 미심쩍다던 그 소설가. 사이퍼 폴일 수도 있겠다고 마르코는 생각했다. 마술사의 능력이 어디까지 알려졌는지 몰라도 세계 정부라면 눈독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이 얽혀 깨끗한 걸 본 적 없으니 제법 그럴싸한 확률이다.

주의 깊은 시선으로 비스타가 말했다.

“내가 추측한 걸 네가 몰랐을 리 없겠지, 마르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번 일에 넌 빠져 있는 게 최선이다. 5번대 선에서 정리할 테니 맡겨둬.”

함께 항해한 시간만 수십 년. 굳이 들춰 묻지 않아도 비스타는 이 문제가 마르코에게 보통 건이 아니란 것쯤은 단번에 파악했다.

그 <마르코>가 육지에 정인을 둔다는 사실이 다소 놀랍긴 하지만…… 가족이자 동료가 짐을 느낀다면 덜어줘야 마땅하다. 그뿐. 더 많은 얘긴 필요 없었다.

비스타의 말이 옳다. 마르코가 해군의 그림을 짚어보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특히 오라힐리 테사와 관련된 모든 문서는 1번대 대장 직할로 올라오니까. 비스타의 얘기로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무 말 없이 마르코가 치웠던 해도를 끌어온다. 항해사가 두고 간 것으로 정박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해군의 감시선도 다 처리되어 배는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이다.

물끄러미 해도를 보던 마르코가 한참 뒤 부정했다. 아니.

“하선은 1번대가 제일 먼저 한다.”

“어이, 마르코. 그럴 필요 있냐? 지금 해군 심리로 봐선 선두에 네가 나타나면 걔네한테 그것보다 최상의 시나리오도 또 없다고.”

“이대로 따라갔다가 나중에 악화된 상황으로 되돌아올 가능성도 있어. 그리고 아마도 그건 내가 아니라 마술사한테 더.”

뒤를 잇지 않고 마르코가 다문다. 테사에 관한 모든 얘기가 그에겐 지극히도 사적인 부분이라 꺼내기 어려웠다. 아무리 형제들 앞이라도 말이다. 이성적으로 논함이 불가능하니까.

해군은 적의 관계자들에게 매우 가혹하다. 수틀리면 한계 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는 게 정의였다. 마르코는 이 점을 똑똑히 안다. 그렇기에 그들이 짜둔 판대로만 갈 수 없다. 작은 불씨라도 화마가 되기 전 사그라져야 한다.

“어떤 전제로 만든 설계라면…… 두 번 다시 써먹지 못하도록 그 전제부터 부숴야겠지.”

“…….”

“역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란 걸 확인시켜주면 그만이야.”

잠시 뒤, 선실을 나가며 삿치가 지나가듯 물었다. 괜찮겠냐고. 마르코는 생각했다. 괜찮지 않아도 결국 걘 안전해.

그럼 그는 수만 번이고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

폭풍우가 치는 날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배를 난파시키고 사람을 절망시키는 이 사나운 바람은 대대로 마술사의 분노를 상징해왔다. 마술사가 슬퍼하거나 노할 때, 그의 친우가 부름에 응하리니.

사위를 휘감는 비바람. 그 속에서 테사는 인간의 오랜 구절을 읊조린다. 오, 놀라워라.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미란다의 순진한 감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조롱으로 재해석됐다. 마찬가지로 더 어릴 적,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부분을 이렇게 곱씹게 될지 테사 또한 몰랐다.

기만한 첩자를 내쫓고, 홀로 낯선 신세계의 난폭성을 되새기던 테사. 그대로 생각에 갇힐 듯해 공방 바깥으로 나왔다. 폭음이 사그라진 타운은 바람의 분노밖에 들리지 않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테사가 멈춰 섰다.

“얼마 전에 안 건데, 뒤에서 나오는 걸 제가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아 그래? 이거 미안하게 됐네.”

“괜찮아요.”

우산을 든 해적은 테사도 처음 본다. 비치는 눈빛이 빗속에서도 재기발랄하다. 흰 수염의 직속 대장들은 하나같이 몹시 개성적이었다. 셰프 복을 바깥에서 입고 다녀도 괜찮은 거냐, 테사가 묻자 삿치는 웃었다.

“오, 상냥한걸. 몇 벌이고 엄청 있으니 걱정 말라고. 우리 구면이지?”

“그렇죠. 선장님 뵀을 때랑 그 외에도…… 몇 번.”

“그래도 통성명은 아직이니까. 4번대 대장 삿치라고 한다.”

“오라힐리 테사, 마술사예요.”

잠깐 대화 괜찮냐는 삿치의 제안을 마술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우산을 씌워주려는 것은 좀 별로. 그의 우산은 밝은 노란색이었다. 거센 11월의 폭풍우 사이에서도 색이 안 죽는다. 삿치는 오다가 주운 거라 변명했지만, 목에 걸린 스카프 역시 같은 색이었다.

“따라온 건 아니고. 우연히 봤는데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여서 말야. 계속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딱 들켜버린 거지.”

“확실히 안 좋았죠. 그래도 아까보다 나아요. 적당히 화풀이도 끝났고. 아까 빈센트네 술집에서 나올 때…… 바깥에 있었던 거 그쪽이죠?”

“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멋쩍은 얼굴로 삿치가 혀를 찬다. 마술사가 나올 때 급히 숨는다고 숨었는데 좀 늦었던 것 같긴 했다. 폭풍우를 믿었는데 역시 스카프 색이 너무 튀나.

할 말이 있는데 시작점을 못 잡는 느낌이라 테사는 잠자코 기다렸다. 삿치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아 젠장……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역할을……. 계속 입을 달싹거리던 그는 아주 어렵게 운을 뗐다.

“그…… 솔직히 지금도 우연히 본 건 아니고.”

“네. 알아요.”

“으음 알았구나. 알았어……. 딱히 내가 둘 사이가 걱정된 건 아니고. 마르코 녀석이 걱정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음, 역시 이런저런 갈등이 생기면 결정적인 조력자 같은 게 보통 있잖아?”

“그런가요. 처음 안 사실이네요.”

“근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나뿐인 거지.”

“아…….”

“그걸 깨닫고 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

“저런, 안됐어요.”

악당이 나타나고 무대는 완성됐다. 전의를 상실한 해군은 한심할 만큼 무력했다. 다만 한 가지. 삿치는 마르코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진심이냐 묻자 더 나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했었지. 후회…… 삿치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선술집 앞이었고, 또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다.

삿치는 바깥으로 걸어 나오던 마술사의 얼굴을 기억한다. 비바람이 노란 우산 위를 두들겼다. 농담 같은 만담도 끝났다. 가만히 빗소리를 듣던 삿치가 말했다. 그래, 안됐지.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도와주고 싶어서 오긴 왔는데 언제 뭐 이런 걸 해봤겠어. 뭔가 꼴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도 뭐라도 말하자 결심하고 나왔는데.”

“…….”

“그랬는데…… 이상하군. 왜 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까. 마술사란 자들은 원래 다 이런가?”

그건 마술사들이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었다. 테사가 픽 웃었다.

“제가 유달리 뛰어난 편이긴 하죠. 그런 기분을 느끼는 그쪽도 감이 좋은 편이고요. 다 알진 못하니 하고 싶은 얘기를 편하게 하세요.”

“이봐, 다 알지 못한다는 건 거의 다 안다는 말이잖아.”

마술사에게선 긍정도, 부정도 없었다. 어쨌든 확실히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다. 너무 늦지 않게 삿치는 말문을 연다.

“해군은 적당히 죽이고, 적당히 살렸어. 그게 해적의 최선이니까. 그리고…… 마르코, 그 녀석은 먼저 알아줄 때까지 말 안 하는 그런 답답한 놈은 절대 아냐. 아마 상황이 정리되면 바로 널 찾겠지.”

“…….”

“내 예상으론 그런데…… 또 모르는 거니까. 너 같은 경우를 본 적이 있어야지.”

해군이 설계한 트랩이고, 바다에서 적들과의 역학 관계 등등. 복잡한 얘긴 그냥 모두 관둔다. 손에 쥔 우산을 바라보며 삿치가 말했다.

“같이 젖기 전에 씌워주면 누가 먼저든, 그걸로 나쁘지 않잖아.”

내일을 모르는 해적으로서 이들의 등을 밀어주는 일이 맞는지 삿치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 오늘을 살아가는 데에 안간힘을 다하는 해적이기에 틀렸다고도 생각 않는다.

삿치의 큰 손이 우산을 내민다. 받으라고 흔들었다. 망설이다가 테사가 건네받는다. 이 노란 우산은 마술사에게 너무 무겁고 컸다. 씩 웃은 삿치가 다시 멀리 정면을 바라본다.

“폭풍우가 심하네. 우리 항해사들이 관측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야. 조심히 가야겠어. 마술사.”

“……이제 서서히 잦아들 거예요.”

“뭐야 그건, 설마 너 때문이었어?”

“마술사가 화가 나면 그럴 수도 있죠.”

“전혀 그럴 수 없거든? 상식이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투덜거리는 셰프 복을 입은 해적. 보며 테사는 새삼 또 깨닫는다. 이 사람들, 진짜 서로가 가족이구나. 서로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

물끄러미 보는 테사에게 삿치가 묻는다. “왜 그렇게 봐. 마르코 어디 있는지 알아봐줘?” 마술사는 웃었다. “나보다 빠르지 않을 텐데요.”

지나가는 바람을 손을 뻗어 잡는다. 손끝에서 수천, 수만 개로 다시 갈라진다. 가장 친애하는 친구에게 바람들은 기꺼이 속삭였다.

“찾았어?”

“네. 다 젖기 전에 가봐야겠네요.”

“대단하네…… 그래. 어서 가라. 홀딱 젖은 파인애플 되기 전에.”

“파인애플? 그 사람 별명이에요?”

“딱 봐도 그렇게 생겼잖아. 왜?”

“우연이군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노란 우산을 어깨로 기울이며 마술사가 인사했다. 고마워요, 조력자. 해적 요리사는 그저 손을 흔들 뿐이었다.

/

템페스트의 미란다. 페르디난드를 보며 당신보다 나은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페르디난드는 결코 완벽한 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미란다의 눈이 이미 그로 채워져 있기에 별 다른 수가 없었겠지.

폭풍우가 잦아든다. 혹사당한 파도도, 날뛰던 바람도 쉴 준비를 한다. 해안 절벽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다녀가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마르코는 바로 그 끝에 서 있었다.

대양에 모자라 광활한 창공마저 제 영역인 사내.

날 수 있기에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고, 해적이기에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계와 맞서고 운명조차 이기기에 적수 또한 없으며…….

해적이 뒤돌아 바라본다. 노란 우산을 든 마술사. 몇 걸음을 남기고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느릿하게 살피던 마르코가 물었다.

“사과부터 할까?”

“…….”

“아니면 변명부터 할까.”

“……날 드디어 보네. 여기서 뭐하는데요?”

“올 것 같아서. 그럼 사람 없는 데가 낫겠다 싶었지.”

“올 생각 없었어. 누가 이 우산 빌려줄 때까지.”

“삿치로군. 계속 신경 쓰는 것 같더니 결국 만난 모양이구만.”

분위기가 썩 안 좋긴 했다. 마르코는 노련한 해적이면서 또 의사였고,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가 드문 사내다. 따라서 진심으로 살의를 갖는 순간은 사실 그렇게 잦지 않은데…… 삿치가 말리지 않았다면 목격자를 살려놔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

마술사와 아무 관계 아니란 걸 증명할 목격자. 그 하나를 위해 모든 짓을 했음에도 말이다. 멍청한 일이었지, 마르코는 쓰게 자조한다.

최근 판단을 그르치는 일은 사실 익숙하다. 무엇이 옳고 틀린지도 제대로 확신하기 어렵다. 갖고 있던 기준이 하나씩 엉망이 되는 느낌을 과연 마술사는 알까.

그의 위대한 아버지는 이 바다에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다. 마술사를 보며 해적은 그 말을 되새긴다. 테사가 물었다.

“안경은요.”

“그렇게 세게 던졌는데 깨졌지요이. 펜 쥘 힘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야. 의외로 아프던데.”

“아프라고 던졌으니까 아프지.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하지 마.”

간신히 누른 감정이 마술사는 또 흔들린다.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늘 혼자서만 침착하고, 혼자서만 여유롭고. 이쪽은 이리도 엉망진창으로 초조하게 만들면서…….

고위 마술사로 살며 생전 처음 맛보는 무력감.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한참 응시하던 테사가 건조하게 운을 뗐다.

“난 살인이 싫어. 끔찍하니까.”

“…….”

“폭력도 싫어. 비슷한 이유로.”

“…….”

“피를 보면 거부감부터 들어. 총칼 앞에선 어쩔 수 없이 불안해. 전부 살면서 겪을 거라 한 번도 생각조차 못 해본 것들이거든.”

“…….”

“하지만…… 당신은.”

다시 잇는 목소리가 떨린다. 그러나 시선만은 곧게, 테사는 말한다.

“이 신세계에 내게 단 하나뿐인 사람이에요.”

새로운 세계에서 만난 페르디난드를 미란다는 신에 가깝게 묘사했다. 오라힐리 테사에게 마르코는 세계를 열어주고, 거기에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이다.

굴곡진 손마디에선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냄새가 동시에 나며. 단단한 어깨는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다. 야성과 이성이 공존하는 이 해적의 눈보다 모순적이고 강렬한 걸 테사는 본 적이 없어서.

비바람 속에서도 마술사의 목소리는 선명하다. 마르코가 무겁게 말했다.

“오라힐리. 제대로 <눈>을 떠.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봐.”

“……싫어. 어차피 안 보여. 안 읽혀. 당신만큼 내 뜻대로 안 되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잖아. 예외가 있다면 당신이라고, 늘 얘기했잖아. 난 더 이상 운명이나 세계 따위 안 두려워. 나한테 두려운 게 있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 한 명이야. 그러니까!”

“…….”

“……그러니까 똑바로 말해요. 나랑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

“당신 입으로 직접.”

테사 키안드라 오라힐리. 6계급 고위 마술사, 상아탑의 영예로운 현자.

눈부신 지성과 이성으로 정점 가까이에 다다를지니. 그러나 오늘 이 순간, 평생 쌓아온 그것이 아닌 오로지 감정에 의한 한 수가…… 이 젊은 마술사를 마침내 역전승에 이르게 한다.

마르코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걸 시작으로 방벽은 무너진다.

걸어온 해적의 손이 우산을 떨쳤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마르코가 턱을 기울인다.

조급하고, 집어삼키는 키스였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두른다. 옭아맨 힘으로 테사의 등을 받치고, 뒷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겹치는 호흡과 젖어 맞물리는 소리. 마르코의 키스는 능숙하고, 노련했으며, 집요했다.

진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르코가 떨어진다. 테사는 차오르는 숨을 삼킨다. 얼굴을 맞댄 거리. 아주 가까이서 시선이 부딪친다. 무뢰한의 눈, 그 안에 서린 적나라한 열망.

“뭐예요…….”

“…….”

“뭐야 이게…….”

잠긴 목소리로 마르코가 신음했다. 일단…… 한 번 더.

얽히는 혀에선 야만적인 맛이 났다. 거친 손이 몇 번이고 젊은 마술사의 여린 뺨을 어루만진다. 해적이 가둔 품에 안겨 테사는 몸을 떨었다.

폭풍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나 더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세계는 무너졌다. 부드러운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마르코는 생각했다. 기어코, 네가 기어코 나를 꿇리는구나.

뜨거운 적막 끝에서 마르코가 입을 연다. 답지 않게 성마른 눈빛이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나쁜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얘기 아무도 안 해주던가? 어쩌려고 이래. 마술사.”

“…….”

“도망칠 기회를 줘도 본 척도 안 하고. 해적이 어떤 놈들인지 아직도 몰라 넌.”

그리고 그런 널, 끝내 욕심내는 나를 용서해선 안 된다. 설령 테사가 그러더라도, 마르코는 오늘 이 순간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했다.

이성과 양심은 모두 목이 잘렸다. 고삐도 끊겼다. 마술사의 턱을 부드럽게 당기며 바다의 대해적은 말한다. 이젠 늦었어.

“테사.”

“…….”

“같이 가보자. 내일 없는 내일로.”

무엇도 약속하진 못한다. 영원과 내일은 해적에게 너무 멀다. 그러나 나의 매순간만은 너의 시선에 종속될 것임을. 언젠가 찾아올 테사의 후회까지 떠안을 결심으로 마르코가 바라본다.

그에 테사도 깨닫는다.

애초에 우산 같은 건 말이 안 됐다고. 이 관계는 둘 다 젖는 것밖에 길이 없다……. 폭풍우가 바다에 닿아 사라지고 있었다. 종착 없는 신세계의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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