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上
11
많은 게 달라지진 않았다. 변화의 정도를 따지자면 외려 테사보다 그웬 쪽이 컸다. 포부 좋게 입항했던 해군이 궤멸 직전으로 돌아가고, 오거스트 소령도 전치 수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크라이튼 그웬의 결혼이 무기한 연기되기엔 충분했다.
본인 또한 가해자임을 테사는 부정 않는다. 군과 정부라는 타의에 휘둘린 것은 마찬가지이나 약자는 상대적인 법. 테사에 비하면 그웬은 정말 일반인이고, 마술사의 존재로 인해 삶이 흐트러진 게 사실이다.
어떤 변명도 면죄부 삼을 생각 없다. 이기적이어도 비겁하게 살진 않는 마술사. 폭풍우가 멎고, 테사는 그웬을 찾아갔다. 얘길 듣는 그웬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의아하다고 생각은 했어. 아버지가 아무리 인맥이 좋아도 이렇게 바로 본부 소속 장교랑 연결되다니…… 결국 아버지나 나나 수단에 불과했던 거구나.”
약자가 사는 삶. 익숙해졌다 해도 시리다. 살이 내린 뺨을 매만지며 그웬이 웃었다.
“나도 욕심을 냈던 거니까 원망은 안 할게. 사과해줘서 고마워. 다만…… 테사.”
“알아. 더 이상 예전 같은 사이는 못 되겠지.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내가 네 삶을 망친 거니까.”
소인의 세상은 거인의 걸음만으로도 부서진다. 호의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마술사 사회가 폐쇄적인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은 그들만의 학교를 세우고, 연맹을 만들었으며, 탑을 올렸다. 일반인들은 마술사들을 흔히 볼 순 있었지만, 결코 섞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테사가 해적에게 홀렸을지도 모르겠다. 동류는 아닐지언정 동격이니까.
“그래도 그웬, 이거 하나는 알아둬. 전처럼 지내지 못해도 여전히 넌 내 친구야. 그것도 마술사가 빚을 진. 언제든 나한테 무언가를 바랄 권리가 네게 있다는 걸 잊지 마.”
“든든하네. 어떤 소원이 내게 남아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그래. 잊지 않을게.”
마주앉은 또래의 두 친구.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 오직 우연에 의해 만난 인연이었다. 옆방에서 울리는 쇠한 기침 소리에 그웬이 일어난다.
“일이 이렇게 됐어도 사울과는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 벌어졌든 그때 내 선택이 없었던 게 되진 않으니까. 그리고…… 의사가 그러는데, 아버지는 얼마 못 버티실 거래. 이번 일에 대한 여파가 심한가봐.”
호방하게 웃던 바렛 씨가 떠올랐다. 야망이 끝난 남자에겐 그게 마지막 열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착잡한 기색의 테사를 보고 그웬이 그러지 말라 손 저었다.
“늦든 빠르든 어차피 올 일이었어. 내가 이 말을 한 이유는 그저, 음, 나중에 혹시 아버지의 떠나는 길을 축복해줄 수 있겠니?”
“……난 성직이 없어, 그웬. 종교도 다른걸.”
“알아. 종교가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넌 마술사니까. 특별하지 않을까? 별 볼 일 없고, 솔직히 최악에 가까운 아버지였지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어.”
인간은 단 한 순간에 자라기도 한다. 테사는 짧은 며칠 사이 훨씬 깊어져버린 친구의 눈을 바라본다. 불어오는 바람은 방향을 알 길이 없지…… 마술사가 말했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뭐든.”
그웬이 미소 짓는다. 딸이란 정말 어쩔 수 없는 존재들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도 했다. 배웅하던 현관 앞, 날이 쌀쌀했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다가 놔주었다. 1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
가뜩이나 희박했던 마술사의 인간관계가 보다 협소해진 이 시점. 테사의 심경이 복잡하든 말든, 공방은 북적거렸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 타운 사람들이 구애자를 잃은 테사를 동정한 탓이며. 둘, 해군이 마술사를 포섭하려 했다는 소문을 접한 해적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인장, 기회가 왔을 때 빨리 낚아챘어야지. 아 거참, 내가 다 답답하네. 젊은 사람이 왜 그리 수줍음이 많아?”
“테싸텟사! 해군 편이 될 뻔했다는 게 사실이야? 우리가 자리 좀 비웠다고 어떻게 그러냐! 마음이 찢어지네 정말!”
“요즘처럼 멀쩡한 놈들 없는 시대에 어? 그 정도 얼굴이면 그냥 괜찮은 수준이 아니든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얘기 좀 풀어봐!”
“우연히 세 번을 봐도 운명이라고 하는 세상에, 우리처럼 얼굴을 자주 본 사이에 이래도 되냐고 테싸테싸!”
“주인장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아니 근데 이 해적 양반은, 뭔데 자꾸 여기서 텟사테싸를 찾아? 그게 누군데?”
“텟사텟사가 테싸텟싸지 누구야. 거 보쇼,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동네 아저씨 1은 왜 나 말하는데 자꾸 끼어들고 난리요? 거기 동네 아저씨 2도 말야.”
“새파랗게 젊은 놈이 말투 꼬락서니 하고는! 해적이면 다냐!”
“뭔… 이 아저씨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그래, 해적이면 다다!”
“네가 해적이면 어쩔 건데! 난 흰 수염 해적단 영주민이다!”
“참나, 어이, 이거 뭐라고 답해야 되냐. 아저씨요. 내가 거기 소속이거든? 이 문신 안 보여?”
누구 하나 우열 가릴 수 없이 시끄럽고 멍청하다. 이제 사칭이니 아니니 싸우는 무리들. 테사는 그쪽으로부터 아예 등을 돌린 참이었다. 마술사의 공방이 저들을 내쫓아도 되겠냐고 애걸했지만, 그 또한 무시하며.
바인브릿지 타운이 흰 수염의 영토이긴 해도 며칠 전 그들이 궤멸시킨 상대는 <해군>. 정의가 적힌 백색 정복의 군인들이다. 아무리 한없이 해적들 쪽으로 기울린 팔이라도 사람이란 체제를 외면하기 힘든 동물이었다. 평범한 자들에겐 특히.
좀 시끄럽긴 해도 이 바보 놀음이 그를 희석하기 위함이라면 방치 못 할 일도 아니니까. 그들이 알 리 없으나 일단 마술사의 공방은 대대로 중립 지역이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깃펜을 놓으며 마술사가 한숨 쉰다.
“테사라니까…… 저 멍청이들…….”
작은 소리지만, 앞에 앉은 상대에게 들릴 만큼은 충분했다. 양피지 위를 만년필로 흘려 적고 있던 마르코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유세프, 적당히 해요이. 너무 소란 떨지 마.”
등 뒤에서 유세프가 투덜거린다. 보쇼, 아재. 대장한테 나만 혼났잖아. 나 1번대 대원 맞다니까. 마르코가 덧붙였다.
“그리고 주인장께서 자기 이름은 테사라신다.”
“아, 알았어! 미안, 텟사테싸!”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다시 펜촉을 적시던 테사가 멈칫 묻는다. 중요한 부분을 적고 있는지 마르코의 답은 조금 느렸다. 안경 너머로 힐긋 보고 실소한다.
“설마 지금 안 건 아니겠지.”
“웃지 마요. 마술사한테는 중요한 문제인데. 이름은 내 신분증이나 다름없어. 세계가 듣는단 말이에요. 헷갈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야.”
“세계?”
반문하며 마르코가 테사 근처 종이와 양피지들을 살짝 치운다. 펜 등으로 위를 툭툭 치는 건 이 마술사의 습관 중 하난데, 그때마다 잉크가 튀어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
“응, 세계. 마술은 그들과 소통하는 법이니까. 당연히 증명이 가장 중요한데 그중 하나가 남들에게 불리는 이름이거든. 간단히 요약하면 이름에 얽힌 역사의 확인이에요. 쌓인 흔적들로 얘가 어떤 사람인가 읽는 거죠. 보통 마술사인 걸 확인만 하는데, 드물지만 경우에 따라 더 너그럽거나 더 까탈스럽기도 해.”
그렇기에 모든 마술사들은 에고가 강하다. 스스로의 길을 잃을 때 세계는 언제든지 그들을 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선과 악을 말함이 아니다. 인간의 기준은 무의미했다.
세계가 볼 수 있도록, 나 여기 있노라 존재를 세우는 것. 그저 그걸로 족했다. 물론 너무 지나치면 변덕에 휘말릴 수도 있지만…… 마치 이세계의 <거물>들처럼 말이다.
흰 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 필기체로 흘려 적힌 마르코의 진찰 기록과 연구 일지 쪽으로 테사는 잠깐 눈을 둔다. 마술사가 의학 외적인 부분을 연구할 동안, 요즘 그는 테사의 약들을 섭렵하며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몰랐는걸…….”
“그 정도로 중요한 문제니까. 알겠죠, 자제 좀 시켜요.”
“말은 해두지요이. 먹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뭐 이렇게 매번 믿음직스럽지 못해요, 사람이? 물론 허언을 하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늘 현실적이어야 돼요?”
“말에 뼈가 있구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야.”
“됐어. 말을 말아.”
표정 변화 없이 토라지는 것도 재주라고 마르코는 생각했다. 얼굴은 냉랭해서 잘도 귀엽단 말이지…… 연하란. 안경을 벗어 셔츠 주머니에 넣고 마르코가 한쪽 턱을 괸다.
“테사.”
“왜?”
“테사.”
“…….”
나지막한 중저음으로 몇 번이고 부른다. 뇌까리듯 부를 대마다 마술사의 귓불이 점점 더 달아올랐다. 제발 그렇게 그만 쳐다보라고 테사는 속으로 비명 지른다.
세 번을 더 부른 마르코가 픽 웃고 일어난다. 누가 좀 덜 부르면 어떤가. 수천, 수만 번이고 내가 그 몫까지 부르면 그만인 것을. 해적은 뜨거워진 마술사의 귓불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그리고 공방 진열대들이 위치한 메인 홀. 그쪽으로 나가 말한다.
“거기. 너네, 언제까지 여기서 노닥거릴 거냐. 할 일들 있을 텐데. 얼른 돌아가.”
“마르코 대장은 여기 계속 있잖아. 왜 우리한테만!”
“난 마술사랑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고. 너흰 할 일이 하기 싫어서 여기 있는 거고. 몰라서 냅두는 줄 알지. 계속 까불어 봐.”
“……그럼 안녕히 계십쇼. 테싸테싸도 수고하십쇼.”
주민들한테는 굳이 나가라 말할 필요 없다. 덩치 큰 해적들이 빠져나가면서 저절로 퇴장 분위기가 조성됐으니까. 소수의 단골들이 인사 없는 마술사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다.
백색 공방은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기에 빼어났다. 여타 모든 백색들이 그러하듯 다른 색을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 저항 없었다. 해가 뜨고 짐에 따른 밝기는 물론이요, 하늘의 색까지 죄다 머금었다.
창가에서 비롯된 노을이 벽을 물들인다. 마술사의 윤기 나는 흑발에도 역시 금빛이 돈다. 마르코가 책상 위를 짚었다. 앉은 채로 단단한 팔 사이에 갇힌 테사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조용하구만.”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하니까요.”
“그래. 그렇게 있어.”
착하네. 낮게 속삭이며 해적이 허릴 숙인다. 부드러운 키스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이어졌다.
/
마술사와의 관계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불가피하게 아는 몇 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그게 마르코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이 사람이 내 것이라고, 사내들이 내세우는 소유욕 따위 마술사의 안전 앞에서 전부 무의미했다.
폭풍우 치던 그날 해안 절벽, 테사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 해적은 아마 평생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숨기고 억누르다가 혼자 간직한 채 떠났겠지. 추억으로도 충분하다고 되새기면서.
이 삶이 어떤 길인지 마르코는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다. 해적으로서의 인생이 어떤 무게인지도 분간 못 하고 날뛰는 일은 핏덩이 시절에도 거친 바 없다. 오히려 그런 이들을 보며 혀를 찼으면 모를까.
달리 말해 해적이지, 이건 수라의 길이다. 이 머저리들아.
믿을 건 오로지 자신의 동료와 선장. 바다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나고 죽는 아수라 인생. 그렇기에 신중했고 또 누구에게도 쉬이 내주지 않았는데…….
“마르코. 들어가도 돼?”
“하루타.”
“일 보고 있었구나. 어, 안경 바꿨네. 새로 샀어?”
“깨졌으니까.”
고치려면 못 고칠 일도 아니나 마르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서랍 깊이 넣어두었다. 이 무게를 잊지 않도록.
12번대 대장 하루타. 어린 외양이지만, 그렇게 어리지도 않다. 그 역시 수천 명 중 단 열다섯 뿐인 흰 수염의 직속 대장. 가끔 외양만 보고 만만히 여긴 놈들이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할 만큼 날카롭다.
하루타가 이 선실까지 오는 일은 드물었다. 마르코는 안경을 벗고 턱짓했다. 용건을 말하라는 뜻이다. 별것 아니란 듯 하루타가 손을 흔든다.
“아버지 호출. 나가는 김에 전해달라고 하셔서.”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어인 섬에 다녀온 게 12번대였지. 지금까지 하루타가 아버지 옆에 있었던 모양이다. 마르코는 창가를 확인한다. 늦은 시간이니 아마 일 얘긴 아닐 것이다.
대장인데다가 선의이니 당연하지만, 다 차치해도 선장과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마르코였다. 마르코는 흰 수염의 오른팔인 동시에 에드워드 뉴게이트의 첫 번째 아들이었으니까.
“마르코.”
“아버지. 일찍 주무시라 했잖아요이.”
“잔소리도 지겹다. 내 아들이랑 마음대로 얘기도 못 한단 말이냐.”
옆에 놓인 차트를 확인하니 이미 다른 선의들이 다녀간 듯하다. 마르코는 능숙하게 간단한 것들을 체크하고 싸인했다. 그를 뉴게이트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이 놈, 빈손으로 오다니.”
“뭘 기대하셨는지 몰라도 어림없구만. 술은 줄이라고, 아버지.”
“이런 깐깐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앉거라.”
이 선실의 창은 모비딕 호 선실들 중에서도 제일 컸다. 낮에는 정면의 햇빛으로 꽉 차고, 밤이 되면 액자처럼 달이 걸렸다. 아무데나 앉아도 월광이 흠뻑 쏟아진다. 흰 수염의 발치 근처에 앉으며 마르코는 생각했다. 정말 술이 있었으면 좋긴 했겠다고.
두 부자는 가만히 앉아 세계를 감상한다. 말없이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뒤쪽으로 손을 짚은 마르코가 먼저 운을 뗐다.
“아버지. 미리 말하지만, 너무 사적인 얘긴 안 해.”
뉴게이트가 웃었다. 그라라라. 그래, 이 아들 놈은 그런 녀석이다.
피붙이보다 더 피붙이 같은 가족. 닮은 부분이 없을 리가 없다. 뉴게이트 역시 수십 년의 세월동안 아들에게 한 번도 그런 얘길 하지 않았다. 반백 년 넘게 바다와 세계를 누볐다. 왜 인연이 없고, 왜 운명이 없었겠나. 모두 지나며 바다와 가슴에 묻었을 뿐이다.
“넌 날 닮았지. 마르코. 그래서 모든 아들들을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널 제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아.”
“…….”
“그래서 더 안타깝기도 하구나.”
모든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닮지 않길 바란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에드워드 뉴게이트 역시 한 명의 아버지였다.
현 시대는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해가 지면 달이 뜨듯, 내일은 오늘이 영원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두 개의 별이 졌고, 두 명의 신예가 나타나 빈 옥좌를 채웠다. 뉴게이트에겐 마르코의 어깨에 짊어진 짐들이 보인다.
“아무 얘기 하지 않으마. 네게 바라는 건 하나 뿐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살거라, 마르코.”
“……매번 이미 다 하신 다음 그런 말씀 하시지. 아버지는.”
“시끄럽다.”
가라앉은 한 시선이 창가 너머 바다를 향한다. 이 장성한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얘길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들이 그렇듯 아들 또한 당신의 뜻대로 살기 어려울 뿐이다. 아들에게도 아들의 사정이 있으므로.
사랑, 그런 거. 마르코는 믿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옭아매기 위한 용도의 실체 없는 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지나가는 인연들에게 들을 때마다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고, 그 견고함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고도 믿었다.
그런데…… 이런 나한테 어쩌다가 네가 와서.
운명이 두렵다던 마술사의 말이 마르코는 문득 떠오른다. 왜인지 그 마음을 조금 알 듯도 하다.
“아버지.”
“…….”
“진짜 술을 가져올걸 그랬어요이.”
“해적이다.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렇게나 어려울 줄도 몰랐지.”
쉬운 인생이라 생각해본 적 없지만…… 마르코가 재차 곱씹는다. 이렇게 어려울 줄도 몰랐지. 심야의 파도에 바다가 술렁거린다. 그 위를 무수하게 떠다니는 것들. 난파선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