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5화 (15/29)

15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上

12-1

요정 족은 순수해야 할 것이다.

이 제사장 일족이 영생에 가까운 장생과 강대한 힘을 타고나는 대신 짊어진 굴레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살생을 꺼리고 욕망을 삿된 것으로 여겼으며 무엇보다 피가 섞이는 일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신의 심술일까. 모순적이고 불행하게도 이들은 어떤 종보다 감정적이었으며 또 심약했다. 바람을 따르듯 인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호수를 아끼듯 인간의 눈을 들여다보았으며, 숲을 사랑하듯 인간의 품에 뛰어들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많은 요정 족들이 무수한 영생을 잃었다.

요정 족의 왕들은 모여 보다 엄중한 법을 제정했다. 이후 현저하게 수가 줄긴 했으나 여전히 필멸의 인간 종은 그들에게 지독히도 매혹적이었다. 오라힐리 테사의 증조모도 그 중 하나였다.

회색 숲 요정 족은 마술사 신의 첫 번째 딸로부터 이어진 명맥이다. 얼어붙은 북위 산맥과 침엽수림에서 태어난 이들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바람의 총애를 타고났다. 가장 폐쇄적인 부족이기에 일족 모두가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걸로도 유명했다.

천 년을 넘어도 얼굴의 빛을 잃지 않는 일족. 그러나 테사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늘 누워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까이 오렴, 테사.’

태어나자마자 테사는 증조모의 각인을 물려받았다. 가장 닮은 딸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증조모 본인의 의지가 확고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테사에게 항상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건 일종의 빚이 되기에 충분했다.

마술사들은 유아기를 거의 거치지 않는다. 이미 세 살에 위대한 갈라가르스의 제자로 입적된 이 어린 마술사는 여섯, 일곱이 되자 어떤 대화에도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어려운 증조모와 있는 시간만은 예외였다.

‘표정이 안 좋구나. 아가, 무슨 일이라도 있니?’

‘……오늘 스승님이 알려주셨어요. 이렇게 누워계신 이유. 다르투라 님은 대체 왜 인간과 결혼하신 거죠?’

‘날 비난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건,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그냥 전 이해가 안 돼서. ……결국 이렇게 될 걸, 끝을 알면서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요?’

아름다운 요정에게도 죽음은 끔찍했다. 그건 결코 낭만적이지도 다르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나라하며 무자비한 것이었다. 밝은 피부는 빛을 잃었고, 손과 발톱은 갈라졌으며, 속에서부터 썩어가는 냄새가 났다.

테사는 죽어가는 요정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회색 숲 요정 왕의 장녀, 다르투라는 자신과 가장 닮은 인간의 딸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가치가 있었지. 물론이란다. 테사. 아주 넘쳤어.’

‘…….’

‘그는 내게 자유를 알려주고 세계를 열어주었지. 인간이란, 테사, 불꽃을 지닌 종족이야. 얼마나 매혹적인지 아니. 그 불꽃이 한 번 피어나면 남김없이 불태울 때까지 멈추지 않는단다. 그 스스로마저.’

한 점 남김없이 치열하게 불사르는 짧은 삶. 아무리 짧아도 요정의 기나긴 삶이 그보다 의미 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거칠지만 꺾이지 않는 열정은 눈부시고, 한계 없이 꿈꾸는 눈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근사하지.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영원히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니.’

요정 다르투라의 눈이 마치 젊은 날처럼 반짝였다. 고갤 들은 테사가 그제야 그 눈을 바라보았다.

‘영원은 아쉽지 않아, 테사. 세계는 넓고 아름다워. 난 그와 함께 그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무엇보다도 큰 걸 얻었단다. 그러니 내 선택이 어떻게 가치가 없을까.’

‘…….’

‘굳이 찾자면 한 가지. 자손들에게 피의 굴레를 씌인 것만은 슬프지 아니할 수가 없구나. 지존하신 분은 심술궂으시니…….’

다르투라가 갸날픈 팔을 뻗었다. 머뭇거리다가 테사가 그 손을 잡았다. 요정은 어린 마술사를 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 내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없겠지. 괜찮아, 아가. 네게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단다. 운명을 두려워 말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렴. 요정의 사랑이 널 마지막 순간까지 지킬 테니.’

뿌리를 만난 테사의 마술회로가 빛을 발했다. 요정이 누구보다 친애하던 인간의 청회색 눈 속이었다. 다르투라는 웃으며 눈 감았다.

아름다운 요정 왕의 딸이 긴 영면에 든 것은 그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은 뒤였다.

/

테사는 증조모 다르투라를 생각한다. 요정의 피가 섞인 모든 인간은 단명한다. 요정들은 그걸 <오염>이라고 불렀다. 짙게 섞일수록 정도가 심해 이 젊은 마술사의 모친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

왜 원망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했다.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한낱 유혹에 빠져 자손들에게 굴레를 씌운 자라 여겼다. 다행히 테사는 다르투라를 빼닮아도 피까진 아니어서 피해갔지만, 그렇다고 증조모로 인한 죽음들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그러나 요즘…… 자꾸만 어린 날의 그 대화가 떠오른다. 이해하기 싫은데 이해하고 있는 자신이 있다. 테사는 마르코를 보며 말했다.

“안 돼요. 그러면 후회할걸.”

흰 손이 해적에게서 시약병을 조심스럽게 빼낸다. 마술사는 마르코의 손등을 툭툭 치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요정의 피는 반드시 제일 마지막에 넣어야 된다고 했잖아요. 이건 잘 안 섞여. 나머지를 다 오염시켜요.”

“아, 그랬지.”

눈가를 주무른 마르코가 라벨을 다시 확인한다. 공방을 닫고 이른 오전부터 시작된 연구. 지지부진하던 진도를 단번에 끌어올린 건 그가 발견한 <요정의 피> 때문이었다.

솔직히 공방 어디에 어떤 게 있는지 테사도 잘 몰랐다. 워낙 뭐가 많아야지. 따라서 이 또한 그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약재를 챙기던 마르코가 우연히 찾아낸 것이었다.

‘테사. 이건 뭐지요이?’

‘응? 라벨 안 붙어있어요? 읽어봐.’

‘음, 시어세이드 왕자의 피.’

‘아, 그거. 오랜만에 듣네. 어린 요정 왕자의 피예요. <요정의 피>란 게 원래 쓸 수 없지만, 드물게 어린 귀족이나 왕족의 피는 재료로 섞이기도 하거든요. 돈이나 황금으로는 절대 못 구하는 거죠.’

‘대단한 건가?’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요정의 피>는 그 자체로 영험한 힘이 있는걸. 안 섞여서 문제지 섞이기만 하면 약재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특히 로열 블러드 같은 경우 단 한 방울이라도 희석해 넣기만 하면, 활기가 돌고 모든 <상태 이상>에서 회복된…….’

‘…….’

‘그니까…….’

‘…….’

‘모든 상태 이상에서…….’

‘…….’

‘…….’

‘…….’

‘……문 닫을까?’

‘……그래.’

비유하자면, 열심히 우물을 팠는데 옆에 오아시스가 있던 격이다.

바로 외부 공방을 닫고, 둘은 내부 공방에 틀어박혔다. 테사가 급히 마르코의 연구 일지들을 검토했다. 특별한 의술 능력 없이도 마르코는 지식적인 방면에선 매우 뛰어난 의사였다. 이미 상당 부분 진전되어 몇 가지만 더하면 될 듯했다. 방금 결정적인 키가 손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최종 단계.

테사가 손가락으로 술식을 그린다. 완성된 여러 개의 진들이 떠오르다가 딱, 딱 퉁기는 손짓에 따라 빛으로 부서져 내렸다. 산개하는 빛들. 아름다웠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마르코의 시선이 오래도록 마술사에게 머무른다.

“됐어. 지금이요.”

천천히 마르코가 희석한 왕자의 피를 떨어뜨렸다. 짙은 주홍색으로 일렁이던 약수가 그와 닿자마자 깊은 파문을 자아냈다. 마치 뜨거운 황금이라도 부은 듯이.

서서히 노을빛으로 바뀌는 영약. 젊은 마술사는 신중하게 고갤 기울인다. 핵심적인 재료들이 빠져 그렇지 이 정도면 손실된 버전의 <엘릭서>라 봐도 무방하다. 완전한 엘릭서만큼은 못 돼도 일시적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다.

“이대로 삼십 분 정도만 지켜보면 되겠어.”

“별 이상 없으면 성공인 거구만.”

“응. 그때까지 좀 쉬어요.”

아침부터 질주하듯 이어진 일이었다. 기지개켠 테사가 찻잔을 불러온다. 램프를 잠깐 보다가 마르코도 주변을 정리했다. 갈겨 쓰인 양피지부터 종이, 노트, 서적들, 잉크에 젖은 신문까지.

벗은 안경을 셔츠 포켓에 꽂아 넣으며 마르코가 무심코 읽는다. 흰 수염 해적단, 해군과 신세계 바인브릿지 타운에서의 충돌…….

“12월…… 오늘 날짜인데. 치졸하게 나오는군.”

“왜요?”

“섬 지명을 그대로 공개했으니 말이야.”

“아, 위험하려나…….”

“큰일은 없겠지. 그래도 경계는 강화할 테니 걱정 말고.”

지나가는 얘기였다. 테사는 다시 찻잎을 고른다. 마르코가 다가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차는 별론데.” 차분한 얼굴로 테사가 대꾸한다. “그럼 오전부터 술이라도 찾는 거예요?” 마르코는 살짝 눈썹을 휘었다.

“술 얘긴 하지도 마.”

“누가 보면 싫어하는 줄 알겠어.”

“어제 그거 때문에 한숨도 못 잤으니까.”

“못 잤다고? 어쩌다가.”

“새벽까지 아버지와…… 아니다, 이 얘긴 됐고.”

네 생각하다가 술 생각이 절실했다고 말해봤자 뭐하겠는가. 꼴만 우습다. 마르코는 침음하다가 마술사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차는 됐고, 잠깐 쉬기나 하자며.

재차 말하지만, 이 남자는 해적이다. 것도 테사가 듣기로는 무장색의 달인이라나. 무투파 비슷한 거라고 했다. 과연 그러한지 움직이는 모든 근육이 탄력적이고 단단했으며 테사 한 명쯤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들 수 있었다.

들다시피 마술사를 끌고 마르코가 비스듬히 앉았다. 한쪽 팔은 무릎 위에 앉힌 마술사를, 다른 쪽은 소파에 걸친 채 고갤 젖힌다. 그리고 손등으로 두 눈을 덮는데 정말 피곤하긴 한 모양이라서.

테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잠깐 눈 좀 붙여요.”

솔직히 그게…… 테사를 위해서도 좋다. 가슴 아래 둘러진 마르코의 팔을 의식하지 않으려 테사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경험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관계가 굳어지자 마르코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테사를 만져댔다. 허리를 쓸어내리는 것은 기본이요, 다리 위부터는 다 만진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무어라 말도 못 할 만큼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게다가 노골적인 뉘앙스를 띈 것도 아니고 접촉 자체는 담백한데…… 굳이 말하자면 야생 동물이 체취를 묻히는 것과 약간 닮았다.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혹시 이것조차 노린 걸지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지금도 그냥 자는 척하는 거 아냐? 테사가 눈을 가늘게 좁힌다. 마르코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다. 낮은 호흡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한낮으로 넘어가는 공방 안.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향기들뿐이다.

관엽 식물들이 뿜어내는 청량한 냄새부터 영약의 오묘한 향, 각종 시약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바람과 열대, 유리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냄새, 쌓인 종이와 서적들…… 그리고 마르코.

친애하는 내 해적.

마술사의 눈가가 서서히 부드럽게 풀린다.

바다 냄새가 늘 희미하게 묻은 셔츠 깃, 햇빛이 입 맞춰 옅게 그을린 피부, 단단하고 탄력적인 팔, 흐트러진 금발, 살짝 수염이 돋은 근사한 턱…….

말없이 테사는 해적에게 몸을 기댔다. 가는 손가락이 벌어진 셔츠 사이 타투에 닿는다. 흰 수염 해적단의 졸리 로저. 누구라도 못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가슴팍 정면에 커다랗게 새겨 넣은 이 남자의 신념이자 긍지.

홀린 듯 마술사의 손이 그 문신을 매만지고…….

“테사.”

“……네?”

안 잤다니! 아무 말도 못하고 바짝 굳은 테사. 마르코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손등으로 눈가를 덮은 채.

“네가 나보다 어리긴 해도…….”

“…….”

“스물일곱 먹은 애인을 가만둘 생각은 없어.”

“…….”

“지금 거기서 더 내려가고 싶은 거면 계속하고.”

그 즉시 테사가 손을 떼고 일어났다. 견고히 옭아맸던 팔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준다. “어쩜 벌써 시간이! 삼십 분이 이렇게 빨랐나?” 어색하게 뛰어가는 발걸음. 그녀의 해적은 그저 작게 실소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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