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16화 (16/29)

16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上

12-2

다운 그레이드 버전 엘릭서의 개발은 성공적이었다. 미뤄 좋을 일도 아니라 즉시 모비딕 호에 올랐지만, 공식 방문이 아니기에 마술사는 내부 의무실로 안내되었다.

단어만 의무실이지 사실상 병원에 가까웠다. 최신임이 분명한 각종 전문 설비부터 인원과 규모까지.

웬만한 현대 병원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다. 굵은 것을 제외한 이쪽 세계의 곁가지들이 테사의 세계와 매우 흡사하단 걸 알았지만, 이만큼 와 닿는 적도 처음이다.

수술실이라 적힌 명패에서 테사는 시선을 뗀다. 흰 가운을 입은 선의들도 여럿, 너스들 또한 얼핏 봐도 그 인원이 제법이었다. 것도 전부 경력이 보통은 훌쩍 넘어 보이는 베테랑들.

어렴풋이 느끼긴 했으나…… 과연 사황의 배. 바다가 중심이 되는 세계라 배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게 당연해도, 이 정도 규모의 내부 시설을 갖추고 있다니. 이 해적단이 이곳에서 어느 쯤의 위치인지 마술사는 새삼 실감하고 만다.

그리고 그런 테사를 티 나지 않게 힐긋거리는 너스들.

소문으로만 듣던 바인브릿지의 마술사. 1번대 대장 마르코 직할 요주 인물로 담당인 1번대를 제외하면 접근이 제한된 유명 인사였다.

요주의 대상 혹은 경계 대상. 보통 명확한 적을 제외한 위협요소, 판단 보류의 위험인물(단적인 예로 혁명군)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과의 접촉은 관할 부대와 동행하거나 수기로 기록을 남겨야 했다. 그 과정이 까탈스럽진 않아도 번거로워 대부분 하지 않는다고 보면 됐다. 그냥 경계가 풀리는 걸 기다리고 말지.

그런 면에서 마술사는 조금 예외라 볼 수 있겠다. 처음부터 왜 경계 대상인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던 인물. 경험해본 적 없는 신비한 공방은 해적들이 번거로움을 감수하기에도 충분했다.

1번대를 위시하여 드나드는 인원이 점점 늘었다. 특히 보기 드문 미인이란 소문이 돈 뒤부터는 다른 부대에서도 들리는 경험담의 수가 심심찮았다. 최근엔 경계가 풀린다는 말까지 있어 너스들 사이에서도 가볼까 수군거리던 참이다.

게다가 뭣보다…… 소식 빠른 너스들 사이에서만 쉬쉬하는 그 얘기. 두어 명의 1번대에게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마술사가 마르코 대장의 여자인 것 같다든가.

“진짜일까요?”

비품실로 건너온 나탈리가 소릴 낮춰 속삭인다. 너스들 중에서도 막내인 나탈리는 종종 정말 전형적인 막내처럼 굴곤 했다. 담당 선임인 어텀으로서는 썩 골치 아픈 일이다.

“뭐가.”

“왜요, 아시잖아요. 그 소문. 1번대 대장의…….”

“나탈리. 누누이 말하지만 너 입 조심해. 특히 대장들 얘기 함부로 하지 말라고 얼마 전 헤드한테도 혼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끼리 있을 때나 그렇지, 밖에서도 이러는 건 아니라구요. 제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데. 어텀도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대장의 스캔들이라니. 모비딕에 오르고 처음이에요.”

“너…… 진짜. 누가 들을까 무섭다 얘.”

어텀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 쉬었다. 호기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상대와 장소를 가려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흰 수염 직속 대장의 사생활이다. 소문의 진원지인 1번대에서도 바로 사그라진 얘기라 들었다. 들쑤셔봤자 잔뜩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나탈리. 모비딕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명심해야 되는 두 가지가 뭐라고 했지?”

“……크루로서의 의리. 의료인으로서 의무요.”

“잊지 않았으면 됐어. 진짜든 가짜든 너나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남녀 문제잖아. 정 궁금하면 너 혼자 지켜보되 어디에서도 의견은 나누지 말 것. 알겠어?”

“이미 살짝 봤는데 마르코 대장 눈빛 장난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 거겠죠?”

“씁, 의견은 나누지 말 것.”

오케이, 오케이. 나탈리가 두 손 들었다. 이 뒤부턴 일기장에 쓸게요. 때마침 바깥이 소란스럽다. 그들의 선장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재빨리 비품을 챙겨 나가는 어텀을 따르며 나탈리가 소곤거렸다. 그런데 진짜면 대장 능력도 좋아, 그쵸. 어텀은 입 여는 대신 무언의 눈짓으로 긍정했다.

“특별히 불편하셨거나 그런 부분은 없으신가요?”

“있을 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좋다.”

확실히 그래 보인다. 흰 수염의 말에 테사가 끄덕였다. 그동안 묘책이 없다고 손 놓고 있진 않았다.

마르코를 통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음은 물론이고, 마르코 역시 마술사의 도움으로 의학의 진전이 있던 바. 흰 수염, 에드워드 뉴게이트는 테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정정한 모습이었다.

조금 건강해졌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사뭇 기세가 달라서. 잠깐 마술사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사내를 완치시키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1번대 대장님에게 얘기 전해 들으셨겠지만, 제 추측에…….”

“마르코 말이더냐.”

“네?”

“그냥 마르코라고 하거라, 마술사.”

아버지 제발…… 좀 떨어진 뒤에서 마르코가 이마를 짚었다. 옆에서 삿치가 웃음을 참느라 미세하게 떨어댄다. 현묘한 흰 수염의 얼굴에선 어떤 의도도 읽기 쉽지 않다. 얼떨떨한 것도 잠시, 테사는 다시 침착한 목소리로 얘길 이었다.

“……추측에 의하면 선장님의 상태는 단순한 병이라고 볼 수 없어요. 그러니 지금 이 약 또한 완치에 가깝지, 완치는 아닙니다. 문제의 근원이 제거되지 않는 이상 아마 무슨 수를 써도 그럴 거고요.”

“근원이라. 세계의 <악의>라고 했던가.”

“네. 그 고리를 잘라내는 방법을 최선을 다해 찾고 있어요. 그때까지 저보다 마르코…… 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제가 재료나 술식을 보조하는 쪽으로 진행할 예정이에요.”

테사가 곁눈질로 물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마르코도 눈짓으로 답했다. 신경 쓰지 마요이…….

지금 의무실에 있는 인원은 마르코와 대장 서넛, 의료팀이 전부. 입의 무거운 정도를 따지면 모비딕 내 최정예라 봐도 좋은 구성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더라도 어디 가서 떠들 인물들은 절대 아니다.

허공에서 마술사가 약병을 꺼냈다. 척 봐도 일반적인 격이 아님을 나타내는 황혼의 빛. 찰랑일 때마다 색이 달랐다. 의료팀에게 건넨다. 마르코가 지시하는 걸 보며 테사는 설명했다.

“<엘릭서> 비슷한 걸로 보시면 돼요. 전설처럼 불로장생의 약은 아니어도 어떤 상태 이상에서도 벗어나게 하죠.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선장님만큼 체격이 큰 경우 링거를 통하는 쪽이 나아요.”

“그런 영약으로도 완치는 못 된다 이건가. 우습군.”

“이것도 한 번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투약 받으셔야 하는걸요. 아마 열흘이나 보름 간격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때마다 제가 보조 술식도 새겨드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어째서지?”

그 질문은 삿치에게서 나왔다. 어떤 걸 보조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냐고도 덧붙인다. 의심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말라 손사래 치며.

“일단…… 이 약의 주재료가 <요정의 피>인데, 말도 안 되는 명약이긴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겐 독이 되기도 하거든요. 새길 술식은 그걸 방지하고 희석하는 용도예요.”

독이라는 말은 무조건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들 역시 그랬다. 미미하지만, 대장들의 표정이 순간 가라앉는다. 그럼에도 제지하지 않는 것은 마술사를 대동한 사람이 마르코이며, 어떤 날 선장실에서 보인 테사의 태도를 목격했던 탓이다.

일말의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전을 무릅쓰면서도 이뤄주고 싶노라. 곧게 허릴 펴고 정면을 향하던 사람. 그런 잊지 못할 감상을 준 이는 속는 한이 있어도 믿어보고 싶어진다.

링거를 가는 의료팀을 지켜보며 비스타가 말했다. “도난 걱정은 필요 없겠군.” 옆에서 삿치가 바람 새는 소릴 흘린다.

“그러게. 하지만…… 문제는 더 있어. 그럼 열흘이나 보름 간격을 두고 마술사가 계속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얘기인데. 분명 해군 쪽에서 말이 나오고도 남는다고.”

얼마 전 감시선들을 다 가라앉힌 사건이 있었으나 그게 끝이라 여길 멍청이는 아무도 없다. 사황 정도면 언제 어디에서든 눈이 따라붙는다고 봐야 옳았다.

정보의 유출도 문제지만, 마술사의 신상 역시 염려되는 부분. 삿치가 잠깐 마르코를 바라본다. 마르코는 마술사를 보고 있었다. 흰 수염 옆에 앉아 그의 팔에 진을 그리던 마술사, 테사가 고갤 들었다.

“큰 문제가 될까요? 사실 그쪽은 고려하지 않았는데.”

“정기적으로 드나들면 우리와 커넥션이 있다고 확신할 거다. 그럼 현상금이 붙을 수도 있어.”

나지막한 마르코의 말에 테사가 차게 코웃음 쳤다.

“지명 수배요? 말도 안 돼. 맥락도 없이 범죄자 취급이라니.”

“정의는 굳이 이유를 찾지 않지. 우습게만 여길 것도 아니고.”

“그럼 어떡할까요.”

마르코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내심 테사는 군 정부와 이미 척을 졌다고 여겼다. 그런 식으로 쫓아냈으니 무언가 액션을 취할 게 분명하므로.

다소 감정적인 처사였음을 인정하나 후회는 없다. 마술사를 기만해놓고 그쯤에서 끝난 건 온전히 테사의 자비였다. 성격 나쁜 마술사였다면 666시간의 지옥에 보낼 게 아니라 아예 이마에 낙인을 찍었을 터다.

마르코가 턱을 매만진다. 이쪽에서 테사의 공방에 드나드는 것과 테사 스스로 해적선에 드나드는 건 매우 다른 문제였다. 안 그래도 얘길 듣고 고민하던 차다. 열흘이나 보름마다라니. 오라힐리 테사 너…… 나한테 그런 얘기 없었잖아.

절대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지명 수배는 타인에게 합법적으로 목숨을 노릴 계기와 명분을 부여한다. 한 번 수배지가 바다로 퍼지면 되돌릴 수 없다. 마르코는 테사의 목에 판돈이 붙는 걸 지켜볼 마음 없었다.

“방법이 없진 않아. 네겐 4계급 공간 이동이 있으니까. 가본 장소는 다 갈 수 있잖아. 그걸로 다른 데 거치지 않고 바로 이쪽으로 오면 돼.”

“……4계급인 것까지 기억하고 있네.”

테사의 중얼거림에 마르코가 생각했다. 내가 너에 대해 잊는 게 있겠냐고. 다른 이들은 다소 놀란 눈치다. 당연했다. 공간 이동은 마술사들마저 마술의 꽃이라 부르는 대표 마술이다. 삿치가 외쳤다.

“마술사 인마,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마술사예요. 못하는 게 거의 없죠.”

고고하게 테사가 턱을 치켜 들었다. 7계급이었으면 더 높게 들 수 있는데…… 약간 아쉽다. 그 젊은 치기를 몰라볼 리 없는 흰 수염이 소리 내어 웃고, 마르코가 실소했다.

“문제는 갑자기 나타나면 저번처럼 공격 받을 위험이 있구만. 날짜나 시간을 정하기도 애매하고. 그래서 말인데 전보 벌레를 하나 줄 테니까…….”

“전보 벌레도 도청의 위험이 있다면서요.”

“음, 더 좋은 방법 있나?”

이봐요, 해적. 내가 언제 당신 질문에 부정한 적 있던가요. 테사는 살짝 장난기를 담아 답했다.

“물론 내게 있죠. 언제나 그랬듯이.”

태생이 어쩔 수 없는 마술사인가보다. 떠받들림에 익숙한, 행성 역사상 가장 오만한 영장류.

마술사들은 인류의 대표적 대도시마다 드높이 탑을 세웠다. 오라힐리의 테사는 그 중에서도 정점에 다다르는 상아탑 출신이다. 관객의 시선에 아드레날린이 샘솟았다.

젊은 마술사는 웃으며 눈을 뜬다.

켈트의 후예, 스코틀랜드 땅을 지배하는 오라힐리의 청회색 눈. 그리고 북위 산맥 회색 숲 요정 왕족의 상징, 금속성 백은색의 마술회로. 동시에 은하수처럼 만개하고…….

나긋한 휘파람이 별들을 부른다. 손짓을 따라 유성처럼 허공 위를 수놓았다. 순식간에 투명한 소우주가 탄생한다. 인간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는 황홀경. 마술을 처음 본 이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했다.

우주가 났으니 생명 또한 잉태되리다. 무엇으로 할지 마술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길지 않았다. 눈앞에 가장 친애하는 이가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게 뭔지도 이미 안다.

별의 꼬리들이 형상을 그렸다. 테사의 각인을 기초로 한 마술진이 그 밑에서 떠오른다. 이윽고 빛의 장막 아래 탄생하는 것은…… 시린 빛깔로 타오르는 백은색의 불사조.

마술사는 진언으로 사역마의 탄생을 마무리한다.

“파밀리아리스 스피리툼Familiaris Sprituum.”

약식이긴 해도 고위 마술사의 사역마. 팔뚝만한 크기의 불사조는 태어나자마자 어떤 소망에 의해 탄생됐는지 스스로 깨닫는다. 주저 없이 날아가 마르코의 어깨에 앉았다.

너스들로부터 안타까운 탄식이 샌다. 내심 그쪽으로 오길 바란 모양이다.

주변에서 부추겨도 끝끝내 미루던 사역마였다. 낯선 이곳에서 충동적으로 두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사람이 자아내는 불규칙성은 마술사에게조차 이리 쉽지가 않다. 테사는 고갤 돌려 흰 수염을 향했다.

“언제 어디서든 제 목소리를 전할 거예요. 선장님, 부디 그 애의 승선을 허락해주시겠어요?”

손가락에 부리 비비던 불사조를 마르코가 내민다. 어린 사역마는 한 번의 날갯짓으로 모비딕의 주인에게 안착한다. 바다란…… 정말 끝없지 않은가. 흰 수염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 구경을 했군. 물론이다.”

마치 책에서 오려내진 듯한 장면이다. 잔파도 위의 거선. 경애하는 아버지, 친애하는 형제 동료들, 또 하나의 불사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 문득 마르코는 묻고 싶어진다.

너 얼마나 날 더 집어삼켜야 만족할래.

이미 나는 당장 이대로 바다에 빠져 죽어도 물이 아니라 네 이름을 토해낼 지경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