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下
14
샤본디 제도, 13번 그로브.
정부의 시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세계 곳곳 각종 인간상이 모여드는 제도는 활성화된 관광지인 동시에 무법자들의 주요 온상지였다.
모든 걸 통제할 수 없는 군의 그늘 밖에선 자연스럽게 할렘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번대 안쪽부터는 해군조차 접근이 힘든 무법지대로 변모했고, 13번 그로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주인은 그 그로브의 암묵적인 실세였다. 맹그로브 뿌리 위 우두커니 지어진 작은 주점. 그곳에 괴물 두 마리가 똬리 틀고 산다는 사실을 아는 자에게나, 모르는 자에게나 공통으로 통하는 얘기여서.
“이런 간단한 정보조차 모르면 곤란하지. 정보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겼다간 너 단명한다? 조언 값으로 이거까지 받겠어.”
원 없이 얻어맞은 해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샤키가 담배를 한 번 깊이 빨았다가 뱉는다. 금붙이들이 가벼운 걸로 보아 썩 쏠쏠하진 않겠다.
잡음 없이 레코드판은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내부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주인만의 취향이다. 재즈 운율을 따라 흥얼거리던 샤키가 잔을 꺼냈다. 마치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린다.
“어머, 일찍인걸. 또 빚내고 팔려갔을 줄 알았더니.”
“운 좋은 날도 가끔 있어야지 않겠나.”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짓궂은 물음에 레일리가 미소 지었다. 감출 것 없는 사이에선 굳이 사설에 시간 쓸 필요 없다.
“답장은?”
“안 왔고, 안 오겠지.”
재떨이를 비운 샤키가 다시 불을 붙인다. 이보다 더 젊은 시절부터 피우던 브랜드의 담배는 맛도, 감상도 언제나 다르지 않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표정이 가려졌다. 명왕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은퇴한 지도 벌써 십수 년째.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자국 비켜난 두 명의 대해적은 그저 조용히 황혼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종종 썩어가고 있다고 자조하기도 했지만…….
“답지 않은 짓을 했어, 샤키. 흰 수염은 다른 건 몰라도 한 번 제 품에 들인 건 아끼는 사내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샤키 개인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샤키가 흰 수염의 보호 아래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사실은 편지 내용만 봐도 추측 가능했다.
서로에게 간섭하는 관계가 아닐지라도 레일리에게 샤키는 소중한 동반자다. 이 정도 관여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맞은편의 동반자는 그저 의미심장한 태도로 웃어 보일 뿐이다.
“은퇴했더니 이제 사황 정도면 무서운가 봐.”
“샤키.”
“어머, 정색하지 마. 내가 흰 수염을 건드렸다고 생각해?”
“아닌가?”
“물론 아니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약간 섭섭하네.”
샤키의 손가락이 담뱃재를 퉁겼다. 불씨가 바닥과 닿아 사그라진다.
“나름 경고였는걸. 아니, 조심하고 주의하란 뜻이었으니 그보다는 걱정일까? 어쨌든 호의지.”
“음, 언제부터 우리가 흰 수염을 걱정하게 됐나?”
“코팅 아저씨, 감이 너무 안 좋아졌지 않아? 또 틀려. 그쪽이 아냐.”
그 <명왕>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드문 일이다. 샤키는 즐겁게 구경하면서 꽁초를 비벼 껐다. 침음하던 레일리가 이내 혼잣말처럼 탄식한다. 그럼 그 <불로불사의 키>라는 게…… 설마 사람이었나.
“이거 일 났군. 바다의 미친놈들이 날뛸 거다. 누구지?”
“글쎄, 나도 몰라. 레일리.”
샤키가 웃었다. 사뭇 흥미가 고조될 때 짓는 웃음이었다.
“심심풀이로 해군 쪽을 도청하다가 엿들은 우연에 불과하거든. 하지만…… 신기한 건 여기서부터지. 내가 이미 그 키워드를 들은 적이 있다면? 그것도 제법 최근에.”
몇 개월 전, 제도 뒷골목마다 쉬쉬하며 나도는 얘기가 하나 있었다. 불로불사라는 개념이 몹시 희귀한 게 맞다면 아마 둘은 같은 가지이리라. 이 무법지대의 목소리가 어떻게 해군까지 흘러 닿았는지 의문이긴 하나, 그 치들이야 귀가 워낙 여러 개여야지.
이 위대한 바다에 비밀이란 없다. 그렇기에 아직 살만한 것 아니겠는가. 턱을 괸 샤키가 미소 짓는다.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일방적이긴 하지만 말야.”
“이런, 샤키. 물어봐도 알려줄 표정이 아닌데. 정말 이러긴가?”
“레일리 당신, 소문에 너무 어둡다니까. 이 기회에 경각심을 좀 가지는 게 어때. 정보의 소중함을 무시했다간 바다의 재밌는 일들을 모두 놓치게 될 테니.”
비록 역사 뒤편에서 점점 썩어가는 처지라도 한때 해적. 무대 위에 오르진 않아도 방관의 재미까지 놓칠 생각 없다. 샤키는 기꺼이 이에 충실할 마음이었다. 물론, 관객답게 마음에 드는 인물도 간혹 응원하면서 말이다.
/
마르코가 마술사의 공방을 오가는 대의명분은 선장의 치료였다. 선의로서 가장 우선된 일임은 당연했고, 1번대 대장으로서의 감찰 의무도 무시 못 했다.
그 말인즉슨, (임시방편이긴 해도) 흰 수염의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매일 방문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남의 시선도 시선일뿐더러 그간 미뤄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대선단의 1번대 대장은 여유부리며 떠맡을 만한 자리가 아니니까.
외부 출항 관련해선 사정을 아는 그의 아버지가 배려해주고 있으나…… 계속 이럴 수 없단 걸 마르코도 안다. 단순 며칠 나가는 출항이 아니라 반드시 타운을 떠나야 하는 때도 머지않아 오겠지.
최대한 외면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씩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마르코는 물끄러미 테사를 바라본다.
아주 늦은 새벽의 모비딕 호.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지워질 정도로 어두운 시간이었다. 지금처럼 보이는 것은 별, 들리는 것은 파도밖에 없는 때가 되면 갑판 위 누가 있는지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오늘 마술사의 여섯 번째 방문은 유난히 늦게 끝났다. 크루 대다수가 잠들고, 바다도 잠든 시간이라 테사는 갑판 위 남은 소수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해적선에 올라와서 술 한 잔 안 마시는 게 말이 돼?’
‘이미 여섯 번째인데 말이 안 되면 그게 더 우습죠.’
‘어이, 너네 아직도 테싸텟사를 모르는구나. 논리를 따지지 말고 감정으로 호소하라고. 위대한 마술사님, 이 미천한 해적들과 한 잔만 어울려주십시오.’
‘……유세프, 그동안 당신 대장한테 구박 받은 보람이 없지 않군요. 그 눈치와 노력에 감복하여 단 한 잔만 응하도록 하겠어요. 이리 내요.’
‘예이. 여기 럼주 대령하였나이다.’
그들이 간과한 점이 있다면 이 마술사는 보기와 다르게 주량이 매우 세다는 것이다.
진실을 아는 해적은 잘 논다고 생각했다. 한쪽은 술 먹여 골릴 생각이고, 한쪽은 은근히 신났지만 애석하게도 상대가 별로다.
마르코의 예상대로 테사가 취기도 돌기 전에 해적들은 나가 떨어졌다. 그간 적잖게 마술사와 대작해왔던 마르코는 웬만한 주당이 아닌 이상 감당 못 할 것임을 알았다. 너희 아마 해적질 이십 년은 더 하고 와야 될걸. 쓰러진 부하들을 보며 마르코가 혀를 찼다.
하여간 덕분에 갑판 위 말짱한 사람은 둘. 쓰러진 패잔병 더미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뜬금없이 체스를 두는 중이다. 1번대 막내 파블로가 요즘 배운다고 들고 다니는 건데, 마찬가지로 저기 뻗어 계시다.
“오늘도 한 이틀 만에 봤지요이, 아마.”
“응. 당신이 바빴잖아.”
“그래…… 그럼 이제 그만 침대로 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일 분 일 초가 아까운데.”
“별로. 당신 몸이 급하지, 내 몸은 딱히 아쉽지 않대. 잔말 말고 빨리 둬요.”
술 취한 파블로가 솔직히 카슨 말고 마르코 대장한테 배우고 싶었다고 주정 부릴 때만 해도 테사는 별 생각 없었다. 그래봤자 해적인데. 물론 해적 치고 꽤나 고상한 취미인데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의외로 좀…… 아니, 좀 많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유서 깊은 게임은 역사적으로 마술사들의 친구였다. 가지각색 변형하여 즐기기도 했고, 특히 탑에 속한 마술사들에겐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테사 또한 훌륭한 탑 출신의 공방 마술사. 화려한 승전 기록은 자부심 중 하나였다.
그러니 호기심에 두기 시작했어도 얕본 것이 사실. 테사는 생각했다. 이 야만인 해적, 세계가 뭔지 보여주죠. 내가 틀어박혀 체스 판 앞에서 흘려보낸 세월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물론 객관적으로 자랑거리는 절대 아니다. 마술사들끼리면 몰라도.)
딱 잘라 결론만 말하면 마르코는 잘 뒀다. 그것도 매우.
해적이면서 또 의사이므로 머리가 좋은 편인 건 알았는데…… 테사는 조금 당황했다. 이런 게임은 성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르코는 내내 열세에 몰리는 척하다가 허를 찌르는 한 수로 판을 뒤집곤 했다.
승패 기록은 테사 쪽이 압도적이었지만, 패전 역시 아주 적진 않았다. 초반쯤 내가 지금 혹시 취한 건가 싶기도 했으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마르코는 상대가 됐다. 테사가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난 맞수였다.
“자꾸 이런 식으로 시간 끌면 시계 꺼낼 거예요.”
“시간 끄는 게 아니라 진심이구만. 도박꾼, 혹시 네 애인 선실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걸 아나?”
“능글거리지 말라고 했어요, 깡패. 게임에 집중해.”
“집중하려고 해도…… 제일 방해되는 요인이 눈앞에 있어서. 어떻게 신경 끄는지 알면 좀 가르쳐주지 그래.”
“…….”
“이왕이면 몸으로 직접. 내가 해적이라 못 배웠거든.”
죽은 폰을 손가락에 끼워 돌리며 마르코가 힐긋 테사를 바라봤다.
저런 말을 하며 표정 변화 하나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힐 뿐이다. 느긋한 얼굴로 툭툭 던지는데 부동심은 어딜 갔는지 돌아올 기미가 없다. 테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건전한 대화도 못 배웠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글쎄. 내 견문색에는 다 잔다는데.”
마르코가 뒤로 손을 짚으며 주변을 느리게 훑었다. 둘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파도 소리가 빈틈을 메운다.
여유로운 자세로 앉은 해적. 검푸른 밤의 그림자가 그 위로 드리운다. 완숙한 이목구비 사이로 음영이 근사하게 졌다. 해풍이 접힌 세일과 두 사람이 입은 셔츠를 쓸고 지나간다. 테사는 문득 생각했다. 역시 제일 잘 어울리는 배경은 갑판 위구나.
“……이건 그냥 질문인데. 당신 선실, 아침에 누가 깨우러 오나요?”
“…….”
“…….”
“……아니. 아버지가 찾을 때 아니면 함부로 안 들어오지.”
“내일 아침 선장님이 당신을 찾을 확률은?”
“없지요이.”
담담히 답하던 마르코가 반 박자 늦게 실소했다.
“테사, 안심해. 내 선실에 데려가도 거기서 할 생각 없으니까. 해본 얘기구만. 방음도 안 되는 곳에서 돌았다고 내 여잘 안을까.”
진심 섞은 장난이었을 뿐. 이렇게 늦은 시간 홀로 돌려보내기 싫어 데려가 재우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테사가 반문한다.
“방음이 왜 안 돼?”
“…….”
“마르코, 난 세상 어디에서도 우릴 격리시킬 수 있어. 아무도 방해 못 하도록.”
되지 않는 것 빼고는 다 가능한 마술사다. 지금 당장도 가능하지만, 하지 않을 뿐이라서. 테사는 중얼거렸다. 소리쯤이야 아무 문제도 아냐.
“물론, 간다는 얘긴 아니고요. 게임은 아직 진행 중이니까. 당신이 내게 한 번 더 이기면 그때 고려해보죠.”
“이거…… 갖고 노는구만.”
“타임리밋은 날 샐 때까지. 딜?”
“딜.”
셔츠 단추 하나를 더 푼 마르코가 판을 다시 읽는다. 체스에서 크게 져본 적 없었던 이 해적은 테사가 거의 처음이다 싶은 강적이다. 아마 정석으로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백색 나이트가 잡힌다. 해적이 물었다.
“반칙도 허용인가?”
“음? 네, 뭐 가능하다면요. 다음 판부터겠지만.”
정석이 안 되면 변칙으로, 변칙이 안 되면 반칙으로. 누구보다 해적답게. 마르코는 은밀히 각도를 기울인다. 목 안으로 웃음이 낮게 울렸다.
“내 사랑.”
“…….”
“이만하면 놀이는 됐잖아. 제발 그만 애태워.”
팔을 뻗어 마르코가 테사를 잡았다. 체스 판이 흔들린다. 열기 담긴 중저음이 제안했다. 한 번만 져. 그럼 이 다음부턴 전부 네 거니까.
턴은 의미 없이 돈다. 백색 룩이 흑색 킹 옆에 선다. 노련한 해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웃으며 여린 귓가를 깨문다. “체크 메이트.” 귀를 부여잡은 테사가 노려본다. 마르코는 승자답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장소만 옮겨서 바로 다음 판 속행이야.”
“저기, 알아요? 이 정도 불공정거래는 학교에서 예시로 가르쳐야 될 수준이에요. 실수라도 응하거든 네 인생 망한다고.”
“그렇구만. 학교에선 그런 걸 가르치나? 이쪽은 배운 게 해적질뿐이라.”
기척을 죽이는 건 숨 쉬는 일보다 간단했다. 선실까지 가는 동안 어떤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문 앞에 다다르며 마르코가 무심코 생각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가져라. 갖지 못한다면 뺏어라. 물러설 수 없다면 결코 패배 말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가장 바라는 입술을 물며 해적은 속삭인다.
“그럼 이제 우릴 가둬. 마술사.”
날 샐 때까지 이 바다 위 누구도 네 소릴 듣지 않도록.
/
이렇듯 못 하는 걸 세는 쪽이 더 빠른 마술사지만, 약점도 없진 않다. 요정 혈맥에 따른 굴레도 있고, 부족한 체력, 세계의 제약 등등…… 무엇보다 이 세계에는 난생 처음 겪는 장애물이 실존했다.
<악마의 열매>, 어떠한 사전 조건도 없이 섭식한 자에게 초능력을 부여한다는 이 가공할 열매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불가사의한 힘이었다. 정확한 출처가 불명하여 단지 악마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지는데, 그로 인해 바다로부터 미움을 사 해수의 제약을 받는다고 한다.
세계와 악마가 어떤 관계인지, 이방인인 테사는 파악이 현재 불가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열매에 <뒤트는 힘>이 서려있다는 사실. 세계의 배열을 건드려 연산하는 마술사로서는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간섭력 문제 같거든. 악마의 열매나 당신 아버지나 결국 세계와 얽혀있는 거니까, 내 간섭력 수준이 높아지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
“…….”
“그런데 이 간섭력이라는 게 사실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죠. 마력처럼 생일마다 늘어나고 그러면 얼마나 편해. 이걸 다르게 또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계급Rank. 즉, 마술사의 레벨을 나누는 척도.
마술사는 세계에 간섭 가능한 힘의 정도로 지위가 갈린다. 간섭력이란 결국 그의 경지를 의미하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올릴 방법이 없다.
마르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갤 가눴다.
“그래서요이. 그거랑 이거. 무슨 상관인지 물었는데.”
만질 때마다 청염이 일렁인다. 태연한 손길로 테사는 무릎 위에 눕힌 불사조를 쓰다듬었다.
“경지 높일 방법이 요원하니 훈련이라도 해야죠. 훌륭한 실험체가 옆에 있는데 그럼 놀까요? 나태하게? 무려 사유하는 인간이면서?”
“실, 험체…… 오라힐리. 훈련 방식이 이미 나태하잖아.”
“마술사의 훈련 방식에 일반인이 주제넘게 참견하지 마요.”
“…….”
어련하실까. 마르코가 체념하고 힘을 뺐다. 아무것도 안 하고 불사조로 화한 상태로 있는 게 잘 적응되지 않을 뿐이다. 어쨌든 불사조는 그의 전투 형태니까 말이다.
안정적인 정적이 감싼 마술사의 공방. 해적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요즘 들어 해가 조금씩 더 길어짐에 따라 공방도 점점 화사해졌다. 테사의 속눈썹이 부드럽게 그늘진다. 긴 머리카락에선 흔들릴 때마다 흠뻑 산뜻한 향이 배어났다.
그에 취하듯 마르코가 읊조렸다.
“넌 요정의 피가 흐른댔지…….”
“일부긴 하지만. 내 증조모님이 요정이니까요.”
“그렇게 바다를 돌아다녔는데도 요정이 있다는 얘긴 처음 들어. 인간과 많이 다를까.”
“크게 다를 거 없어요. 음, 물론 어릴 때는 동화 속에 묘사된 것처럼 매우 작고, 대화도 불가능하지만. 유아기에서 벗어나길 성공한 요정들은 인간과 비슷하게 성장해. 대신 아주 강하고, 키가 크고, 빼어나게 아름답죠.”
증조모의 일족, 회색 숲 왕족들은 다르투라의 사망 후에도 오라힐리와 교류를 이어갔다. 방계의 일족으로 인정해 가족과도 같이 대우했다. 하기나 동계가 되면 테사는 어린 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테사가 지저귀듯 말했다. 매우 흰 마술사의 뺨은 기분이 좋거든 옅은 홍조가 감돌곤 했다.
“사진이나 초상화가 있음 좋을 텐데. 아쉽게도 그들은 그런 걸 허용하지 않거든요. 이런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아름다워. 상상이 될까?”
“……돼.”
마르코는 실소하며 눈 감았다. 그냥, 너 같겠지.
추억에 잠긴 마술사가 손가락을 휘두른다. 언젠가 녹음해둔 요정의 허밍이 살며시 허공 위로 스며들었다. 목소리를 타고난 회색 숲 일족의 노래는 듣는 것만으로도 평안을 부른다.
손길 아래 청염이 더 안정됨을 테사는 느낄 수 있었다. 한껏 나른해진 불사조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게 평화롭구만.”
“너무 그래도 불안한데 말이에요.”
“그거 마술사의 직감?”
“말로 꺼내지 않을래요. 그냥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눈을 뜬 마르코가 테사를 한 번 돌아봤다. 평소처럼 무던한 얼굴이지만, 그의 눈에는 조금 다르다. 그래도 더 묻지 않았다. 테사가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바꾼다.
“그러고 보니 사역마 이름이요. 그쪽이 애기 불사조라고 웃기지도 않게 부르는 걔 이름.”
“그게 어때서. 네가 지은 마르코 2세보다는 나아.”
“차, 참나, 아무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다시 지었어요.”
“뭔데.”
“당신 이름, 유래를 알아?”
“글쎄. 누가 붙인지도 모르는데 알 리가.”
기억 안 나는 순간부터 이미 마르코였다. 부모든 누구든 성의를 담아 붙여줬을 거라곤 생각 않는다. 마르코는 어쨌든 세상에 한 번 버려져, 위대한 흰 수염에게 구원 받은 해적이니까.
테사의 무릎에서 마르코가 고갤 들어올렸다. 자세를 바꿔 다시 사람으로 화한다. 해적의 강청색 눈을 들여다보며 테사가 속삭였다.
“마르코. 마르스로부터 비롯되니. 그는 모든 전쟁의 지배자요, 위대한 전장에 으뜸 되는 전사이로다.”
“…….”
“내가 믿는 신은 아니지만, 아주 오래된 전쟁 신의 이름이죠.”
들은 순간부터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술사들은 이름이 지닌 힘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테사는 한평생 전장과 얽매인 이 사내가 다른 이름을 갖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니까 이름은 마르스. 이게 좋아요.”
“……곤란한데. 애기야, 라고 부르는 게 이미 익었구만.”
“……이, 나한테도 없는 애칭 따위 갖다 붙이지 말래?”
마르코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아, 그쪽이었어. 몸을 일으키며 테사 쪽으로 무게를 기울인다. 테사가 해적의 금발을 움켜쥐며 어깰 두드렸다. 아냐, 아니라고! 야! 부르지 마, 죽일 거야!
그대로 소파에서 한참을 뒤엉켰다. 적절한 건수를 문 수완가는 집요했다. 그리고 오가는 게 장난만이 아닐 때쯤, 마술사가 더운 숨소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비켜 봐요. 손님 와.”
“……후, 농담이겠지 테사. 지금 문 연다고?”
“내 손님 아냐.”
손짓 한 번에 외견이 말끔해졌다. 머릴 묶은 테사가 짧게 키스했다.
“내 모든 축복이 늘 당신과 함께함을 잊지 말아요.”
무슨 의미냐 마르코가 되묻기 전에 공방 문이 열린다. 저절로 열린 문에 놀라기도 잠깐, 달려온 유세프가 숨을 고르며 외쳤다.
“직속 대장 전원 소집입니다, 마르코 대장!”
아버지 명령이고, 본대 출항이랍니다! 어인 섬으로!
[작품후기]
p.s. 19편 체스씬 마르코 이미지는 작품 설정을 확인하시면 매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