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짖는 야만의 발톱 아래-20화 (20/29)

20회

무기여 잘 있거라 下

15

여러 번 했던 얘기지만, 이 낯선 바다는 테사의 세계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지리와 크게 특징적인 몇 가지를 제하면 전반적인 문명의 베이스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었다.

기하학, 의술, 건축, 천문학 등의 과학은 물론이고, 정치적 원리도 비슷할뿐더러 언어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곳 원주민들이 아무렇지 않게 알파벳과 한자를 쓰는 모습에서 테사는 위화감조차 받지 못했다.

인간의 문명을 떠받치는 반석인 언어가 그러한데, 쌍두마차인 종교라고 예외일 리 없다.

아무래도 영향력이나 규모 면에선 비할 바가 아니나 분명 존재했다. 테사의 시선이 로마식 수단을 걸친 신부에게 오래 머무른다. 신부는 경건한 얼굴로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거룩하신 주, 전능하고 영원한 분이여. 크라이튼 바렛에게 바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이 가혹한 세상에 그를 불러내셨으므로. 자비로써 그의 죄와 실패들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빛의 안식처와 평화를 허하소서.”

바인브릿지 타운의 지역 유지로서 바렛 씨는 이 타운 내 유일한 교회의 마당에 묻힐 수 있었다. 해적들도 출항해 조용한 이 시점. 많은 이들이 조의를 표하기 위해 기꺼이 자릴 채웠다.

죽음에 감히 때가 어디 있겠나 싶지만, 참 공교한 타이밍이긴 하다고 마술사는 생각했다. 떠나자마자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잠 들다니. 이래서야 반 해적파인 그의 떠나는 길을 위해 해적들이 비켜주기라도 한 모양새지 않은가.

전능하신 분은 심술궂다 했나. 이쪽에서도 썩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전 고인과 가까웠던 이들이 돌아가며 추도사를 바친다. 흙과 꽃 냄새가 물씬하다. 이제 곧 테사의 차례였다.

성직도 없는데다가 친분도 얕다는 일전의 우려는 불필요했다. 타운의 유일한 마술사로서 그간 쌓아온 이름값은 생각보다 높았다. 유족들뿐만 아니라 고인의 지인들마저 감사를 전해왔다.

테사는 잠깐 그웬을 본다. 검은 복장과 대비되는 창백한 뺨. 무수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슬픔이 가장 무겁다. 차분히 입을 뗐다. 마술사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내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근심으로 눈과 영혼과 육신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그로 기력이 약하여지어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수요일의 마술사에게 슬픔이란 평생 짊어질 업. 그만큼 제 피부처럼 익숙했다. 몹시 가까운 애도에 유족들이 고갤 떨군다. 그웬은 대신 테사를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하고 나니 보였다. 한없이 부드러운 마술사의 눈이.

“가여운 양이여, 염려 말고 나를 보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다.”

울컥해 눈물 짓는 그웬의 손. 테사는 그저 조용히 잡아준다.

“두려워 말라. 내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낮게 부는 미풍에 수목이 운다.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바람이다. 닫힌 관 위로 검은 흙 한 줌과 함께 마술사의 가호가 뿌려졌다. 이계에서 거둔 첫 죽음이었다.

장례식 당일 정찬은 신부와 더불어 모두 참석했지만, 석찬은 유족들끼리만 보낸다고 한다. 그 사이 비는 시간, 두 친구는 오랜만에 걷기로 했다.

어인 섬의 연락에 해적단이 급히 떠난 타운. 벌써 일주일이 흘렀음에도 황량할 만큼 쓸쓸하다. 사적인 감상이 섞인 걸 수도 있으나 적어도 테사에겐 그랬다.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도 못 물어봤네. 내가 이래. 정신이 없어. 병상만 지키고 있었더니 시간 개념도 없고.”

“이해해. 간호가 보통 일이니. 바렛 씨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됐어. 적어도 마지막 하나 정도는 제대로 했잖아.”

음, 의미심장한 뉘앙스인걸. 테사가 한쪽 눈썹을 치켜 든다.

“마지막? 미안하지만, 오거스트 소령 일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맞아, 그거.”

“그웬.”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대충 지나가듯 말할 순 없다. 얼굴을 굳힌 테사 앞에서 그웬이 머뭇거렸다.

“날 비난할 거니?”

“듣기도 전에 비난할 머저리로 보였다니 실망인걸.”

“……편지가 왔어.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사과였지.”

‘그웬 양, 여기까지가 당신의 약혼자 탈을 쓰고 내가 그대를 기만한 일에 대한 사죄이며, 이 뒤부터는 미련으로 고하는 이 비겁자의 변명이자 고해입니다. 읽지 않으셔도, 불태우거나 찢으셔도 나의 죄로써 기꺼이 받아들일 것임을 맹세 드립니다.’

‘나는 적어도 해군으로서 죽고자 했습니다. 사실상 자살 시도라고 봐도 좋습니다.’

‘……일가족 모두가 그렇게 천룡인에 대한 반역이란 누명 하에 처형당했습니다. 본부 중령으로의 진급은 다 거짓입니다. 과거엔 그랬을지 몰라도 더 이상 귀족도 아닐뿐더러, 역적이 된 왕국의 반역자를 누가 요직에 쓰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사이퍼 폴에게는 제법 쓸 만한 말이었을지도요. 그들이 원하는 패는 적절하게 죽어줄 젊은 해군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원수님께서 원래 내정한 인물이 아닌 제가 바인브릿지에 가게 된 것입니다. 원래 그분께서 계획하신 그림과도 아주 다르게 되었지요. 결과가 좋다고 할 순 없으니 당분간 이번 같은 사이퍼 폴의 월권행위는 줄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술사는 묵묵히 들었다.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진급도 막힌 오거스트 소령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다고 한다.

사이퍼 폴이 제안한 죽을 자리를 거절할 힘도 물론 없었다. 반역자였고, 군인이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어떻게 쓰나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다만 사진으로만 봤던 약혼녀가, 반드시 죽으리라 여겼던 목숨이 이럴 줄은. 평생 머리 굴리며 살아온 그조차도 전혀 예상 못 한 바여서…….

“네게 목숨을 빚졌다고. 짐작했던 것보다 착한 사람이어서 음…… 황당할 지경이지만, 그래도 은혜를 입었다고.”

테사의 입가가 비틀린다. 못 본 척 그웬은 급히 말을 이었다.

“보고 과정에서 요원이 난리치는 바람에 원수도 내막을 알고 엄청 화냈대. 소령도 깨지고 정직 당했지만, 곧 가프 중장 밑으로…… 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그래서 군에선 테사 널 적대시할지 몰라도 소령 사적으로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전해 달랬어.”

긴 얘기는 거기서 끝난다. 마치 자기 일처럼 그웬이 눈치를 살폈다. 마술사는 차분히 묻는다. “그걸 믿니?” 의도를 읽기 어려운 얼굴. 말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웬이 대답했다. “믿고 싶어.”

사건 이후 몇 개월. 처음부터 답장하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하나 읽긴 했어도 찢고 태우는 일 역시 잦았다. 그러나 보내지 말라 하거든 보내지 않겠다는 소령의 말에도 차마 그걸 못 하겠어서. 쌓이고 쌓인 편지가 수십 장에 이르던 어느 날, 그웬은 마침내 펜을 들었다.

“너 그 남자가 좋아졌구나.”

“그래. 하지만 전처럼 결혼 생각은 없어. 단지, 시작인 거야.”

“시작이라.”

“사람 일이잖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다만 난 지쳤고, 힘들었고, 외로웠으니까. 누군가 끊임없이 물어봐주는 안부가 나도 모르는 새 힘이 됐다고 인정 안 할 수 없더라.”

그러므로 믿노라고, 작은 타운의 아가씨는 다짐처럼 마술사에게 속삭인다. 테사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잘됐네. 축하해.”

“……끝이야? 무섭게 물어봐놓고.”

“무섭긴 뭐가 무서워. 애꿎은 마술사 잡지 마.”

“이러지 마. 믿어도 되는 거 맞아? 얼른 맞다고 해.”

“믿는다며. 허세였니?”

여우를 닮은 군인.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멍청해 보이는 타입이 아닌데 빤히 멍청하게 구는 꼴이. 그래서 끝까지 테이블 위에서 풀어보고자 인내를 썼을지도 모른다.

“네 직감을 믿어봐, 그웬. 얌체는 맞는데 뒤에서 칼을 찌르는 놈은 아냐. 확실히 재수 없긴 하지만.”

시큰둥한 그 말이 얼마나 신용되는지 마술사는 모르리라. 발개진 눈가와 상복도 한결 가벼워지는 그웬의 안색을 가리진 못했다.

떠나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기 마련.

바람이 분다. 타운의 규모 탓인지, 바렛 씨의 인맥 탓인지…… 걷는 거리 곳곳 검은 옷을 걸친 이들이 간혹 눈에 띈다. 종종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들과도 인사하며 걷던 평화로운 오후.

‘그래서 테사 넌 어떻게 지내는데, 그 해적이랑 이런저런 짓 하고 다니는 거 맞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애초에 이런저런 짓이 뭔데.’

은근한 기색으로 캐묻는 그웬에게 실소하던 찰나. 별안간, 짧은 비명과 함께 테사의 무릎이 꺾인다.

“테, 테사!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파?”

“손대지 마!”

신경질적으로 테사가 소리쳤다. 안 그래도 흰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있는 힘껏 마술사는 입술을 짓씹었다. 마치 습격 같은 통증. 날카로운 송곳처럼 골수를 후벼 판다.

바닥을 짚은 테사의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찌할 바 모르고 그웬이 발을 구른다. 그만큼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마 이 젊은 마술사는 원인을 모를 것이다. 알려줄 동류들도 이젠 곁에 없었다.

전쟁이 사라진 테사의 세계에선 오로지 왕의 기사단과 정부의 특수 부대만이 일깨워 터득한 최후의 감각. 범인들에겐 오랜 세월 잊혀 본래라면 이 마술사도 평생 겪지 않고 지나쳤을…….

그건 바로 마술의 경종警鐘. 바야흐로 전장이 개막하고, 마술사가 숙명적으로 참전해야 할 때 깨어나는 제7의 감각이었다.

/

‘어인 섬, 거기도 그쪽 영토였군요.’

‘그래. 가본 적은 없나 보구만.’

언젠가 해도를 짚으며 소유의 해역들을 알려줄 때다. 어떻게 알았냐 눈을 동그랗게 뜨던 테사. 마르코는 어인 섬처럼 분쟁이 잦은 구역은 이런 타운보다 훨씬 눈에 띄게 깃발을 걸어둔다고 일러주었다.

‘신세계까진 그럼 마리조아를 거쳤나?’

‘응. 거길 통해서요. 성지라고 해서 좀 기대했는데 뭐 없던데요.’

‘제법 운이 좋았는걸. 민간인은 대기가 길 텐데.’

‘바렛 씨 덕분이죠. 어쨌든 해군 쪽에서 일했던 사람이니까. 편하게 오긴 했지만, 어인 섬을 통해 갔어도 나쁘지 않았을 듯하네요.’

‘좋은 곳이지.’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가겠죠. 그땐…… 음, 아니에요.’

테사가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마르코는 짐작됐다. 얼핏 보면 벽이 높은 냉랭한 인상의 마술사. 허나 마르코처럼 눈썰미도 좋은데다가 밀접한 교감을 나누다 보면 그렇게 읽기 어렵지도 않았다.

현재처럼 정립된 관계도 아니고 애매한 선상만을 오가던 시점. 지금도 내일이나 미래에 대해선 서로 말을 삼가지만, 그땐 훨씬 더해서. 피차 몇 번이고 나오던 말을 삼켜내곤 했다.

마르코도 그랬다. 같이 가자 먼저 권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함께 거리낌 없이 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고 자르라는 이성이 연이어 충돌했다.

테사를 대하는 매순간은 그런 번민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욕심내면 안 되는데도 네가 욕심이 나. 놓아주고 싶은데 그런다고 내가 살 것 같지도 않아. 너 없는 내 세상이 어땠는지도 이젠 희미하기만 한데…….

결국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이 해적의 최선이었고.

“선수 좌현 20도! 아버지! 어인 섬입니다.”

마르코는 선수 방향을 응시한다. 가까워지는 어인 섬. 덕분에 잠깐 예전 생각을 했다.

어두운 심해 아래 유일하다시피 환한 곳. 태양의 나무, 이브에서 스민 햇빛이 모비딕 호의 갑판을 스친다. 무심한 표정의 1번대 대장을 삿치가 팔꿈치로 건드렸다.

“뭐해. 좋은 거 보니 애인 생각이라도 나냐.”

“어.”

“……진짜로?”

“보면 걔도 좋아했겠지.”

자주 오가며 이 배의 해적들에겐 더 이상 새롭지 않아도 마술사에겐 다를 것이다. 그 순간의 테사 표정이 마르코는 궁금했다. 마술사를 그리는 상상은 매번 실제 현실에 비하면 턱도 못 미쳐서.

담담한 얼굴로 가볍게 뱉는데도 매우 무겁다. 삿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차라리 의료 팀으로라도 배에 태우는 게 어떠냐 제안하고 싶지만, 한 사람 분의 인생. 그렇게 가볍지 않다는 걸 그 또한 안다.

하물며 마르코에게 마술사의 희생? 이 자식이 그러려고 할까. 마르코라면 오히려…… 거기서 삿치는 바로 생각을 관둔다. 그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오싹했다.

희게 물보라가 친다. 모비딕이 막을 통과하고 있었다.

어깨를 한번 짚은 마르코가 삿치를 지나친다. 용궁성에서 나온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흰 수염이 거구를 일으켰다. 직속 대장들이 그 옆으로 선다.

“후카보시 왕자인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흰 수염!”

병색이 가신 황제는 전성기의 기량에서 멀지 않다. 단지 입국만으로 소란이 잦아든다. 사황의 등장을 목격한 해적들이 부랴부랴 소식을 알리러 뛰어갔다.

넵튠은 잘 있나. 선수로 나아간 흰 수염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래, 빈손으로 왔으니 선물부터 준비해야겠군.

“이 흰 수염의 구역을 어지럽힌 각오는 되어있겠지!”

현 시대의 이름이 심해를 울린다. 내리찍는 거창에 실린 패기에 달려가던 해적들이 쓰러졌다. 흰 수염이 씩 웃었다. 마르코,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라져.”

어슬렁 걸어간 마르코가 외친다. 선장 명령이다, 전부 정리해!

견문색에 읽히는 적선은 총 스물세 척. 요즘 정신 빠진 루키들이 있다고 하더니 이 놈들인가. 삿치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제발 식후 운동 정도는 되어달라고.”

마르코가 조소했다.

“준비 운동이나 되면 다행이려나.”

걸어온 비스타가 여유롭게 검을 꺼내며 거들었다.

“운동? 용궁 나들이라고 들었다만.”

잡담은 더 필요 없다. 졸리 로저는 위대한 아버지의 체면. 이젠 신세계에서 대가를 어떻게 치르는지 알려줄 차례다. 청염을 두른 마르코가 난간을 박찬다. 일방적인 응징의 시작이었다.

“꿈만 같아요. 이렇게 조용하다니.”

“있지, 있지. 흰 수염 해적단이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사황이 어떻게 한 곳에만 머물러?”

“그럴 수도 있잖아. 바라는 것도 안 돼? 너무해!”

토라진 샐리가 한 바퀴 홱 돌았다. 꼬리의 물결에 따라 작은 물보라가 인다. 사황의 본대가 입국한 지 이틀째, 어인 섬 어딜 가나 이 얘기로 한창이었다.

본디 호기심이 넘치고 떠들기 좋아하는 인어들이다. 더 말해 무엇할까. 거주 구역과 중심가 구분 없이 공통된 화제로 들썩였다. 지금 이 머메이드 카페 역시 마찬가지.

어쨌거나 그 해적들도 인간임을 상기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인 섬에서 흰 수염이란 그만큼 대단한 예외였다.

“너희, 샐리한테 그러지 마렴. 영웅에게 빠지는 건 어린 애의 특권이야. 상냥하게 대하도록.”

“나 어린애 아니야! 마담이 제일 심해!”

“앗, 에머렛 초코 쿠키잖아. 자, 샐리 너 줄게.”

“우와! 고마워!”

인어들이 어깰 모아 키득거렸다. 함박웃음 짓던 샐리가 뒤늦게 눈치 채고 울상 짓는다. 관둬, 나 갈 거야! 등 뒤에서 쿠키는 두고 가란 말이 울렸지만, 애써 못 들은 척 가게를 박차 나왔다.

중심가는 여유를 즐기는 주민들로 가득했다. 용궁성에서 외출을 자제하란 권고가 내렸던 일이 불과 며칠 전이다. 단 이틀 만에 이리도 달라진 풍경이라니.

문득 샐리는 걱정 많은 친구 클라라를 떠올린다. 이러다 모두 죽는 게 아니냐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는데…… 오늘은 데이트를 갔지. 새로 산 립스틱까지 바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갔다.

평생 똑똑하다 칭찬 한 번 들은 적 없는 샐리여도 이게 어떤 의민지 잘 안다. 내일을 살아갈 걱정이 아닌 어떤 색 립스틱이 어울릴까 고민하는 삶. 흰 수염이 지켜주는 건 그런 일상이다.

그러니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뭐가 나빠.

왜 강한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할까. 어쩌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손에 든 것도 더 많은 걸까.

어린 샐리가 제 상아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수개월 전 만난 어떤 이도 몇 번이고 그녀의 삶을 구해준 다음 훌쩍 떠나버렸다.

“갑자기 우울한걸.”

응, 그래. 그니까 해적을 봐야겠어! 입술을 앙 다문 샐리가 방향을 튼다. 듣기로 흰 수염의 배는 <바다의 숲>에 정박했다고 했다. 금세 기분 좋아진 인어는 망설임 없이 직진했고, 얼마 못 가…… 또 잡혔다.

“왜, 왜지! 거짓말! 난 정말 납치 페티쉬 같은 거 없는데!”

“뭐라는 거야, 이 인어?”

“신경 꺼. 제기랄, 그래도 한 몫은 챙겼군. 술통에 가둬두고 흰 수염이 가면 챙겨서 튀자고.”

“아니, 저기요! 왜 아직 안 죽고 이런 데에 남아있는 건데요! 이 못된 해적들!”

“이 인어 순진한 얼굴로 엄청 막말하네! 확 씨, 조용히 해. 우리가 살아있는 게 불만이야?”

바다의 숲 인근. 늘 인적 드문 곳이긴 해도 흰 수염 해적단이 정박한 근처에 잔당들이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아무리 무모해도 그 정도 계산은 하고 움직였던 건데.

불안정한 기색의 해적 둘은 척 봐도 정상과 멀었다. 한쪽은 초췌하고, 한쪽은 눈에 실핏줄이 다 터졌다. 샐리가 저도 모르게 진저리친다.

“악! 저리 가요! 끔찍해! 진짜 못생겼어!”

“……이 인어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 아냐? 아님 상황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멍청한가. 어?”

이 불한당은 그냥 뱉은 말이겠지만, 옳다. 샐리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왜 발동이 안 되는지 조금 불안해하는 중이기도 했다.

원리는 몰라도 샐리가 위험한 순간마다 발현되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때때로 보호막처럼 나타나기도 했고, 안전한 곳으로 이끄는 길라잡이가 되기도 해, 딱 한 가지로 정해진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 그 마술사, 차갑지만 또 누구보다 온화했던 은인이 남긴 선물이리라 샐리는 생각했다. 만난 마술사는 단 한 명뿐이니 확실하다.

그리고 인어가 아는 유일한 마술사. 위대한 고위 마술사의 술식은 결코 믿는 자를 배반하지 않으므로.

약속처럼 구원의 목소리가 내린다.

“여기 맞는 거 같은데, 마르코. 웬 예쁜 인어 아가씨가 못생긴 불한당한테 붙잡혀 울고 있거든.”

왼쪽 후미였다. 인어와 불한당 모두 번뜩 고갤 튼다. 아무렇게나 쌓인 나무 상자들 위, 셰프 복을 걸친 해적이 수그려 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샐리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다.

그 미소와 그 뒤로…… 왈칵 샐리는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안도의 눈물이다. 셰프 복을 걸친 남자 뒤, 금발의 해적에겐 누구도 지나칠 수 없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 바다 위 가장 위대한 이름, 사황의 졸리 로저.

“불사조 마르코……!”

“왜 대장 둘씩이나 이런 곳에!”

조무래기들이야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하나. 바람의 영롱한 종소리가 지금도 울고 있었다. 마르코가 눈썹을 이지러트리며 묻는다.

“거기 인어. 너, 오라힐리 테사를 알어요이?”

[작품후기]

(19.03.28 후기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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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즐겨듣는 음악 공유 좀

A. 주로 듣는 아티스트: cigarettes after sex, rhye, charlotte cardin, iri, mild high club, vancouver sleep clinic, the xx 등등 섹슈얼한 곡이 듣고 싶다면 charlotte cardin의 paradise motion 혹은 drive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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